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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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헬무트가 그렇게 되고, 대공비와 미하엘의 처신에 깊이 실망하여 리노사를 떠나갔다.
그녀의 행동이 옳지 않게 보일지라도, 그녀에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샤를로트가 말끝을 흐리자, 대공이 재차 입을 열었다
“너는 리노사 대공녀다. 그리고 내 딸 샤를로트이기도 하지. 리노사를 떠나 그레타 아카데미를 다니며, 언젠가 네가 혼란을 겪으리라 생각했다.”
검사로서 샤를로트가 생각하는 옳음과 리노사 대공녀로서의 옳음이 항상 일치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고지식하고 올곧은 그녀에게 두 개의 정체성이 맞부딪혀 타협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샤를로트는 그러한 상황을 가정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자 그저 알았다. 늘 어긋남 없는 길을 걸어왔기에, 어긋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한 각오했다. 그녀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겠노라고.
“균형을 잃지 않고, 옳다고 믿는 길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선 굳건한 의지가 필요하지. 또한 그만한 노력도.”
묵직하게 내리깔린 목소리가 그녀를 두드렸다.
“샤를로트. 너는 훌륭히 해내 주었다. 수고했다.”
단순히 이번 종합 무투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한 것에 대한 치하만이 아니었다.
리노사 대공은 그녀의 선택도, 그녀가 옳다고 믿었던 길도 틀리지 않았노라고 인정해주는 것이다. 아버지로서, 아니 리노사의 군주로서.
샤를로트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누군가가 칭찬할 만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이자 검사, 샤를로트로서도 리노사의 일원으로서도.
죄를 지은 리노사 대공가의 아무도 지지 않는 그 책임을 그녀 홀로라도 짊어져야만 했다.
그러나 그 말에 이토록 가슴이 뜨거워지다니.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샤를로트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리노사 대공, 자신의 군주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녀는 어른이며 검사이니까.
또한 리노사 대공은 분명히 전달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그녀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노라고.
불의와 배반으로서 리노사는 지킬 수 있을지라도, 그 명예는 지킬 수 없다.
샤를로트는 땅에 떨어진 리노사의 명예를 떠올렸고, 그것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그리고 대공도 분명히, 그녀 이상으로 그러했으리라. 그 사실을 깨닫자 가슴이 벅차 왔다.
바싹 마른 입안을 축인 뒤, 샤를로트는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대공은 침묵을 삼켰다. 그의 두 눈은 심연처럼 검었다. 헬무트와 같은, 그리고 또 다른.
헬무트보다 더한 고난을 겪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가 겪어온 고난과 그가 품은 고뇌 역시 범인의 것은 아니며, 또한 가볍지 않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담긴 군주의 눈빛. 그는 두 어깨에 리노사를 짊어지고 있는 자였다.
그는 다른 말을 꺼냈다.
“미하엘은……. 무투회에 함께하지 않았다.”
대공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미하엘은 늘 그가 겪었던 문제를 또다시 겪고 있을 뿐이다.
그를 병상에 드러눕게 한 원인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의 마음. 허약한 몸은, 샤를로트가 빛나는 시간들을 견뎌내지 못했다.
미하엘은 무투회가 성황리에 진행되어가는 가운데, 샤를로트와 황태자가 양국을 대표하여 나란히 한 자리에 있는 그 그림을 참지 못했다.
샤를로트에 대한 뿌리 깊은 질투심과 열등감.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앗아갈 수 있는 유일한 그의 경쟁자에 대한 경계심.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리노사에 묶여 있어야 했던 그에게, 그 마음은 독이 되었다.
“오지 않는 편이 나을 겁니다.”
어차피 그는 샤를로트가 무투회의 주최자로서 자신을 맞이하는 순간조차 순순히 웃어넘기지 못할 테니까.
샤를로트는 고개를 갸웃한 뒤 물었다.
“대공비 전하께서는 함께하시지 않았습니까?”
황제와 리노사 대공이 마주하는 중대한 자리다.
웬만큼 아팠다면 미하엘도 참석하려고 했을 텐데,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은 웬만한 정도가 아니라는 거다.
미하엘을 아끼는 어머니라면 리노사에 남아서 그를 간호하고 싶어할 터였다.
대공이 홀로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것은,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대공은 고개를 저었다.
“네 어머니는, 무투회장을 둘러보고 싶다고 하더구나. 알론소가 그녀를 따르고 있다.”
샤를로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마그리트는 조용한 귀부인이었다. 낯선 장소에서 내놓고 돌아다니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혹시 뭔가를 아시는 건가.’
설마, 헬무트에 대해서 그녀에게 알려졌던가. 그녀는, 헬무트가 살아 돌아오길 결코 바라지 않을 터.
만약 그녀가 헬무트의 존재를 안다면, 그의 계획을 망치려 들 수 있었다.
그러나 샤를로트의 의혹스러운 눈빛에도 리노사 대공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곧 석찬이 있을 것이다. 알론소가 함께하고 있으니, 그때까지는 돌아오겠지.”
“그렇군요.”
샤를로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찰나, 대공의 시선이 그녀에게 옮겨졌다.
“그래서, 어떻더냐.”
“예?”
“황태자 말이다. 나는 네가 그와 파르네세 대공자, 어느 쪽을 선택하든 상관없다만.”
뜬금없는 소리였다.
“……혼담에 대해선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시지 않으셨는지요.”
훌륭하게 성장한 딸의 모습을 본 순간, 황제가 왜 그리 혼담에 적극적이었는지 바로 이해한 리노사 대공이었다.
자고로 리노사의 핏줄에 추남 추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샤를로트는 리노사의 핏줄에서 낸 최고의 성과물이었다.
단순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똑똑하고, 성정도 바르고, 검도 잘 다루고, 품위도 있고, 리노사 대공녀다.
‘아비의 눈으로 봐서가 아니라 황후의 자리에도 차고 넘치지.’
리노사 대공은 객관적인 듯 생각했다. 샤를로트의 입장에서도,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신분의 남자는 드물었다.
혼담이 들어왔을 때, 특히나 그것이 최고의 상대라면 이쪽에서도 긍정적으로 고려해보는 것이 옳다.
리노사 대공은 눈을 낮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만약 아스카가 그저 평민 남자로서 샤를로트와 맺어졌다면 리노사 대공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대공이 넌지시 물었다.
“황태자와 내내 붙어 있었지 않느냐. 정이 들만도 하지.”
샤를로트는 눈을 깜빡였다. 각자 서류 더미와 붙어있기는 했다.
거의 매일 보긴 했으나, 대화를 나눠도 무투회에 관한 것이 거의 전부였다.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조금은 친숙해진 것은 사실이나, 그분을 대하는데 다른 어떤 마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샤를로트는 칼같이 철벽을 쳤다. 황태자는 아스카와는 달리, 샤를로트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인생을 꼬아 놓을 수 있는 유력한 인물이었다.
샤를로트는 결코 그것을 잊지 않았다. 그동안 샤를로트에게 슬쩍 접근을 시도했던 황태자에겐 안타까운 사실이겠지만.
그녀의 표정을 살핀 대공이 이내 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다른 쪽은 어떻지? 파르네세 대공자가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했나. 검술학부 선배? 그와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했겠군.”
샤를로트는 대공이 리노사 대공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대공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낯설고 어색했다.
딸의 연애 문제에 참견하고 싶은 건, 리노사 대공도 마찬가지리라.
단지 샤를로트의 입장에서는 불편하게 느껴졌다는 게 문제다.
그녀는 정색을 하고 잘라 말했다.
“대공 전하, 결승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 말씀은 나중에 하시지요.”
그런 곳에 신경 쓸 여력은 없다며 자신의 혼담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샤를로트였다.
리노사 대공은 아쉽게 궁금증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
리노사 대공비, 마그리트는 숄을 두른 채 걷고 있었다. 무투회장 주변을 돌아보고 싶다고는 했지만, 실상 그녀의 근심을, 산책으로 달래고 싶었을 뿐이다.
‘미하엘은 괜찮을지.’
리노사에 두고 온 병약한 아들이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공과 동행하여 이곳 무투회장에 오는 것을 선택했다.
리노사와 신전이 얽힌 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녀에게도 책임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국과의 우호를 다지는데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녀가 리노사 대공의 뜻에 동의하고 있고 신전에 치우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야 했다.
신전과 제국의 대립이 격화되더라도, 그녀의 신앙심이 어떻든 마그리트는 리노사 대공비로서 처신할 것이다.
‘어쩐지 답답하구나.’
마그리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 자꾸만 번민에 빠졌다. 그녀에게도 균형이 있었지만, 그녀의 균형은 샤를로트의 것과는 달랐다.
리노사 대공비로서, 루멘의 신도로서, 어머니로서.
그러나 요즘 들어, 마그리트는 수십 년간 충실히 수행해왔다고 믿었던 자신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뚜렷하지 않게 어딘가서부터 어긋나있는 듯한 느낌.
대공은 그녀를 탓하지도,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런 대공의 의중을 살펴서 행동하는 건 마그리트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물 흐르듯이 잘 맞는 부부. 그러나 대공에게서 때때로 희미한 벽이 느껴졌다.
언젠가부터. 아마도…… 대공이 죽었다가 살아난 그 순간부터던가.
‘그때 일은 후회하지 않아.’
마그리트는 굳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불현듯 그녀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확인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결승전이 치러질 무투회장은 한적했다. 리노사 대공가에 이어 제국의 황제도 이곳을 방문할 것이다. 그 때문에 무투회장은 철통같은 경비 속에서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뒤에서 그녀를 따르고 있던 흑익 기사단장 알론소에게 마그리트가 물었다.
“우승 후보는 어떤 이들인가요.”
“알려진 자들이 아닙니다. 기사가 아니니, 이름을 들어도 알지 못하실 겁니다.”
마그리트는 리노사 대공이 파악한 사실을 알고 있지 못했다. 둘 중 한 명이, 신전에서 파견된 성기사라는 것을.
그때 저편에서 한 남자가 그들을 향해 똑바로 다가왔다. 경계하듯 눈을 가늘게 뜬 알론소가 마그리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저자가 결승전을 치를 서번트라는 이름의 참가자입니다.”
마그리트는 기묘하게도 그를 본 순간, 그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본적도, 소문을 들어본 적도 없음에도.
‘신전에 속한 사람인가?’
남자는 마그리트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리노사의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확신이 서린 말투였다. 알론소를 보고 추측한 것이 아니라, 그는 그녀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접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