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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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랑한 목소리의 개회사가 끝나고, 준비된 행사가 뒤따랐다.
이 성대한 규모의 무투회를 고작 경기 한 번으로 끝맺음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흥겹고, 누군가에게는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아레아는 턱을 괴고, 아스카는 반쯤 졸고 있었으며, 샤를로트는 굳은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그들과는 달리, 어느새 자리를 옮겨 간 엘라가와 그를 안아 든 시안은 좌우로 신나게 몸을 흔들며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지켜보았다.
졸던 아스카가 머리를 떨어트리다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날 때쯤이었다.
드디어 모두가 고대한, 두 결승전 진출자들이 맞대면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참가자 양측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걸어 나온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관중들에게선 술렁임이 일었다.
“아니, 저건.”
“일부러 저렇게 입힌 건가? 설마.”
철가면의 검사, 다크. 그는 이전과 똑같은 복장이었다.
그 어떤 꾸밈도 없는, 실용성에 치중한 검은 옷.
장식이란 오로지 허리에 매달린 검과 철가면뿐. 그 때문에 더 사람 같지 않은 느낌을 준다.
마치, 죽음의 기사가 걸어 다니는 것처럼.
그리고 그는 강했다. 상대에게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할 만큼. 위력적이나 밤처럼 고요한 어둠.
철가면의 남자는 자신의 검으로서 낮이 지면 오는 밤처럼 절대적인 압도감을 안겨주었다. 그의 상대에게든, 관중에게든.
그러나 관중의 동요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 반대편에 선 금안의 남자.
그는 상대와 대조되게 눈부시도록 하얀 의복을 입고 있었다. 빛을 반사하는 눈처럼 희디흰 성기사의 약식 전투복.
그 복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본 관중들은 혼란에 빠졌다.
“아니, 저자가 성기사란 말이야?”“제국과 신전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게 사실이 아닌가?”
“황제 폐하께서 여기 계시는데…….”
“성기사가 어째서 무투회에 참가해?”
“그렇다면 그냥 성기사 복장만 입었다는 거야? 그건 말도 안 돼.”
루멘을 섬기는 고고한 성기사들은, 세속의 명예에 구애받지 않는다.
신전의 권위란 그들의 활약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기에 성기사들은 일체 바깥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것이 암묵적인 규정이었다. 단 한 번도 깨어져 본 적 없는.
그러나 성기사가 여기에 있었다. 성기사를 사칭하는 것은 중죄. 저자는 성기사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
하지만 성기사가, 성기사 복장으로 그를 배척하는 황제 앞에서 무투회에 참가하다니.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무투회의 주최 측은 어찌 저자가 저러도록 내버려 두었단 말인가. 황제가 진노하고도 남을 일이건만.
술렁이는 관중들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황제가 앉은 상석의 공기는 이상하도록 고요했다.
다만 그곳에 있는 모두가 금안의 남자를 보고도 태연했던 건 아니었다.
어제 그와 인사를 나누었던 마그리트도 그의 대담함에 놀랐다.
‘어찌 저런.’
그렇지 않아도 지난 밤 석찬 자리에서 그자의 처분에 대해서 거론된 바 있었다. 황제는 그 자리에서 선언했다.
‘이 무투회는 실력으로 자신을 입증해 보이는 자리. 아무리 그자가 성기사라고 해도, 정당한 방법으로 자신을 입증해 보였다면, 그에게서 무투회의 참가 자격을 박탈할 수는 없소.’
‘동의합니다.’
리노사 대공이 호응했다. 두 군주의 묵인으로 서번트의 결승전 참가는 방해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보란 듯이 성기사 복장까지 갖춰 입고 나타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주최 측에서도 제지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결승전 참가자가 고집하는데, 강제로 붙잡고 옷을 갈아입힐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결승전을 파투내버릴 수도 없기도 하다.
보고를 받은 바 있었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게 되자 황제도 동요를 감출 수 없었다.
황제가 굳은 얼굴로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오만한 자로군.”
파르네세 대공이 말을 받았다.
“이긴다면 신전의 위용을 드높이는 일이겠지만, 진다면…….”
제국으로부터 내몰린 현실 속에서, 신전에 대단한 불명예를 안겨줄 것이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봐라. 진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기세이지 않은가.”
저 때문에 무투회장이 소란스러워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대 위에 오연히 선 남자에게선 흐트러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뚝 선 등에서 묻어나오는 것은 확신이 깃든 자신감.
황제가 넌지시 물었다.
“대공은 어떨 것 같은가. 이번 경기의 결과, 예상대로 될 것 같은가?”
“저는 지는 패에 걸지 않습니다.”
파르네세 대공이 담담히 말했다. 파르네세 대공의 눈이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황제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내 아우는 그랬지. 그렇다면 나도 대공이 건 쪽에 걸어 보지.”
파르네세 대공의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그러셔도 괜찮겠습니까? 저도 장담은 못 합니다.”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는군.”
핀잔을 준 황제의 시선이 무대 위로 돌아갔다. 이번에 그의 눈길이 닿은 곳은, 성기사가 아닌 그 상대였다.
“그들의 고고한 낯짝이 일그러지는 꼴을 보는 게 기대가 돼. 결과로서 모든 것을 말하는 자들 아닌가.”
“이긴다면 루멘의 뜻이고, 진다면 그 또한 루멘의 큰 뜻이니. 필히 겸허함을 배우겠지요.”
파르네세 대공의 얼굴에 차가운 기색이 서렸다.
신전이 지원하는 다른 형제와 힘겹게 맞서 싸우다가 끝내 황위에 오른 황제와 그의 곁에서 고락을 같이했던 대공. 두 사람 모두가 신전에 대해서는 한뜻이었다.
원한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제국의 주인이 신전으로부터 등 돌린 이것이 그들이 따르는 루멘의 뜻이라면, 이번에도 루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바로 저 무대에서.
*
사방은 혼잡했고, 가득한 말소리는 어지러이 번져갔다.
예선에서 본선을 거치기까지 이토록 무투회장이 부산한 때가 있었던가.
그러나 무대 위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청명하도록 맑았다.
‘좋은 날이야.’
헬무트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무대 위로 올랐다. 그 주변 공기는 무투회장의 공기와 괴리되어 있는 듯이 고요했다.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그자가 있었다. 성기사. 운명의 날 맞이한 상대가, 하필이면 루멘의 검이라니.
헬무트의 운명을 비틀고, 그를 파헤의 숲에 가둔 루멘.
그리고 마치 그 루멘이 예비해놓은 양 루멘의, 아마도 가장 날카롭고 강력한 검이 눈앞에 있었다.
마지막 장벽을 두고 서 있는 기분이다.
‘그렇다면 이것만 넘으면…… 이라는 거겠지.’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다. 대단한 실력자라더군.”
인정하는 듯이 말하는 것치고는, 남자의 말에 감탄은 묻어나지 않았다. 도리어 내려다보고 평가하는 듯한 여유마저 느껴진다.
헬무트는 찬찬히 그자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반듯한 얼굴에서 태양처럼 강렬한 금안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 눈을 한 자들을 안다. 자신이 옳다고 믿고, 흔들림 없이 그 길을 나아가는 자들. 그것이 아집이건 그릇된 신념이건, 정해진 이상 중요치 않다.
빗방울을 튕겨내듯 자신을 적시려 드는 모든 반대를 배제할 테니까. 그 견고한 믿음은, 부딪히는 것은 모조리 부수리라.
‘그러나 네 것은, 그만큼 단단한가?’
헬무트는 물었다. 곱게 다져져 왔을 신념과 믿음은 과연 어떠한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 견고한가?
‘아니.’
헬무트는 답을 내렸다. 명백한 비교 대상이 있었으므로.
헬무트에 비하자면, 온실의 화초와도 같은 삶을 살아왔을 자다. 그가 쌓아온 것들이, 헬무트가 쌓아온 것만큼이나 단단할 리 없다.
한 번도 충격을 겪어보지 못했을 자다. 그렇기에 저자는 자신이 믿어온 대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승리를. 그리고 헬무트의 패배를.
‘불쾌하군.’
헬무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스쳤다.
파헤의 숲에서 자란 헬무트에게 저보다 약한 놈이 자신을 얕보는 것만큼 불쾌한 일은 없다.
첫눈에 알았다. 눈앞에 있는 자는 강했다. 루크 예거보다도, 전대 팔마 기사단장보다도. 헬무트가 파헤의 숲을 나와서 만났던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신전에서 자신만만하게 내놓을 만한 전력이다. 검에 있어선 희대의 천재라고 말해도 좋을 자.
그러나 그는 다리언보다 약했다. 헬무트와 만난 가장 강한 인간인 다리언을 능가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다리언보다 약한 자가 헬무트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너무도 당연했다.
‘재능이라면 이쪽이 못하다고 할 수 없지.’
인간 세상에서 한 번도 자신과 비등한 적수를 만나보지 못한 헬무트 아닌가. 헬무트는 질문을 던졌다.
“성기사, 내 검은 보았나?”
“아니.”
“안타깝군. 보았다면 진작 알았을 텐데.”
상대의 강함을, 그리고 자신의 약함을. 제대로 볼 수만 있었다면, 오늘 그 차림으로 여기에 오지 않았을 터다. 불운하다면 불운한 일이었다.
그는 여기까지 와서야 비로소 자신이 알지 못했던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 테니까.
패배의 교훈은 언제나 뜻깊은 법이다.
금안의 남자도 헬무트의 도발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썹을 치켜들었다.
“자신감은 좋으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지지 않는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루멘의 첫 번째 검. 그렇기에 내게 패배는 허락되지 않으니까.”
처음으로 밝힌 그의 정체였다. 루멘의 첫 번째 검. 헬무트는 알지 못했으나, 성기사단장은 루멘의 두 번째 검으로 말해진다.
첫 번째 검 자리는 오랜 세월 공석이었다. 성검이 선택한 자만이, 루멘의 첫 번째 검이 될 수 있기에.
그리고 그는 루멘의 첫 번째 검이자 성검의 주인. 루멘의 가장 강력한 성물이 그에게 승리를 안겨다 주리라.
모든 마를 사른다는 성검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그 힘은 그의 실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으나, 서번트는 개의치 않았다.
‘검성이라고 한들, 나를 꺾진 못할 것이다.’
대신관들조차 그리 말했으니까. 그의 두 눈에 암석 같은 결의가 서렸다.
“유감이군, 나도 한 번도 져본 적 없어.”
헬무트의 입매에 사나운 미소가 맺혔다. 더 이상 말할 필요 없다. 결과로서 보여 주면 될 테니까.
운명의 순간은 불붙듯이 찾아온다. 헬무트는 그 불에 고통받고, 상처 입고, 또한 제련되었다.
그 결과로서 그는 지금 여기에 있었다.
루멘의 빛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그의 어둠을 사르지는 못하리라. 빛은 잔약하나, 그의 어둠은 오래도록 짙었기에.
‘오랜만입니다, 어머니.’
스치듯 그녀가 있는 그곳에, 시선을 준 헬무트는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곧 커다란 신호와 함께, 결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