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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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자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헬무트의 명을 따르게 한 건, 충성심이 아닌 모욕감과 자존심이었다.
이 많은 기사를 상대한다고? 그 오만을 꺾어주고픈 충동이 흑익 기사단에 전의를 불렀다.
‘여기는 흑익 기사단이다.’
지배자의 핏줄이라고 하나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가 뛰어난 재능과 실력만을 믿고 설쳐댈 곳이 아니었다.
무투회에서 헬무트의 실력을 목격한 바 있는 이들마저도, 그의 말에 모욕감을 느꼈다.
전력을 알 수 없이 그 이름만으로도 고평가받고 있는 신전의 성기사단을 제외하면, 바소르의 팔마와 제국의 황실 기사단과 더불어 대륙에서 최강으로 꼽히는 것이 이 리노사의 흑익 기사단.
꺾이고 나면 알게 되리라. 이곳이 어떤 곳인지.
‘헛된 만용을 부려선 안 된다는 것도!’
그러나 흑익 기사단은 한 명도 빼놓지 않고, 헬무트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그들의 결심이 만용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시작부터 망설임 없이 뽑힌 검에 비스가 일어섰다.
검을 든 이상, 그들은 적.
그 검을 본 순간 그들의 전신에 소름이 일어섰다.
입가에 비웃음을 닮은 미소를 띤 채로, 리노사의 후계자는 검을 들고 몸을 날렸다. 사라지듯이 보일 만큼, 아찔하게 빠른 속도.
뻗어오는 검은 단순하고 간결했다.
그러나 빛살 같았다.
순식간에 대기를 가르고, 세상 그 무엇도 잘라낼 듯이 예리하게 날아든다.
화려하지 않음은 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검의 표면을 일정하고 고르게 감싼 비스.
어떤 낭비도 없는 최소한의 힘으로 적을 부수기 위한 검.
상대를 압도시키는 가공할 힘이 그 검에 담겨있다.
쩡! 맞선 검이 깨져 나가고, 맞부딪힌 자의 비스는 흩어지며 일부는 안으로 파고든다.
“커헉!”
역류한 비스는 내장까지 침투하여 타격을 줬다. 무서운 반발력이다.
쓰러진 자는 다시 일어나 검을 잡지 못했다.
산과 같은 높이로 밀려오는 파도를 인간이 거스를 수는 없다.
흑익 기사단원들은 가랑잎처럼 쓰러졌다.
기사 간에도 격차는 있다. 개중 몇 번, 검격을 막아내며 저항해보는 자도 있었으나 오래 시간이 끌리지는 않았다.
만약 처음부터 하나의 적을 상대로 한 실전이라고 생각하여, 포위망을 형성했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헬무트 역시도 까다로움을 느꼈을 터.
하지만 흑익 기사단은 다수이기에 내심 자신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판단했고, 합을 맞춰 싸우거나 진영을 형성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자신들은 흑익 기사단인데, 아무리 마구잡이로 싸운다고 한들 한 명을 상대로 이기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그 한 명은, 마치 군대와 같은 한 명이었다.
헬무트는 그들 사이를 헤집으며, 호흡을 무너뜨리고 싸움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전투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거기에 흑익 기사단이 휘말린 그때부터는, 온전히 그의 시간이었다.
다수에 대한 전투 경험은 중요치 않았다. 헬무트는 그보다 더 본질에 가까웠으므로.
‘이기는 방법만 알고 있으면 돼.’
의식과 본능이 습득한 대로, 헬무트는 움직였다.
땅을 박차고 대기를 젖히며 날개 달린 듯이 빠르게.
그의 검은 검을 부러트리거나, 검을 쥔 자를 부서트렸다.
검사의 검은, 비스를 사용하기에 최적화되어 만들어진다.
비스가 실린 검은 세상 그 무엇보다 강력하고 견고한 무기가 된다.
그 검을 부수는 것은 더욱 강력한 비스가 담긴 검.
아니, 단순히 강력해서만은 안 된다. 힘과 균형이 고루 갖추어진, 정제되어 완성에 가까워진 검.
검사는 누구나 그 완성을 향해 진주한다.
그리고 여기에 그 완성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검사가 있었다.
그는 리노사의 후계자이며 그들의 군주가 될 자였다.
드디어 모두가 쓰러졌을 때, 헬무트는 오연한 눈으로 그들을 굽어보았다.
그의 몸을 감싼, 부드럽고 약한 재질의 예복은 옷깃 하나 상하지 않은 채였다.
힘이 실린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흑익 기사단은 앞으로 내 명에 따른다. 이의가 있다면 말해보도록.”
그러나 누구도 대답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검이 꺾인 흑익 기사단은 경외와 공포로서 헬무트를 쳐다보았다.
홀로 기사단을 쳐부수다니. 이는 홀로 나라를 멸할 전력이라는 뜻.
헬무트는 그것을, 그리 힘들이지도 않고 약간의 수고로서 증명해 보였다.
그가 증명해 보인 것은 검성 다리언의 힘이기도 했다.
배신당하지 않았다면, 누구도 꺾을 수 없었던 검사.
검사의 생명은 검을 통해 이어진다. 헬무트가 이어받은 것은 그의 검이며, 또한 그의 검술이었다.
‘흑익 기사단을 꺾었다면 다리언도 좋아했겠지.’
대륙에서 이름난 기사단은 서로 경쟁 관계이기도 하니까.
대답 없는 그들을 두고 헬무트는 몸을 돌렸다.
예상했던 대로 승리로 귀결지어졌다. 그렇기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할 일을 제대로 끝마쳤다는 후련함뿐.
“부족한 실력에 안일함까지. 흑익 기사단도 별거 없군. 한참 훈련이 필요하겠어.”
헬무트가 내뱉은 말에 의식을 잃지 않은 이들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모욕감. 그러나 이번에도, 그에게 무언가 항변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부인할 수 없는 결과였다.
“치료사가 필요할 것 같군요.”
헬무트는 힐끗 알론소에게 눈길을 주며 말을 남겼다.
홀로 전투에 가담하지 않은 알론소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누구를 상대로든 겁먹거나 내빼본 일이 없는 그에게도, 등골이 오싹한 광경이었다.
헬무트의 결투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그는 흑익 기사단 앞에서 현재의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으리라. 그 홀로.
‘어둠의 싹이란 게, 이 정도인가.’
아니, 4년 전의 어둠의 싹에 집어 삼켜진 그 괴물은 그렇지 않았다.
마기로 인해 폭발적인 힘을 얻었으나, 검술의 경지가 뛰어나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이는 헬무트의 실력이었다.
자질과 재능을 넘어서, 갈고 닦아 한 명의 검사가 더할 수 있는 것을 모조리 더해내어 이루어낸 실력.
역사상 이보다 이른 나이에 이 같은 경지에 오른 이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흑익 기사단장 알론소는 전율했다.
‘리노사에 검성이라.’
그러나 그만한 힘은 적에게 위협감을 가져다준다.
더군다나 어둠의 싹이라는 절대적인 구실이 달려있다면.
리노사 대공이 지는 패에 걸진 않았을 테지만, 인간 세상에서 신전은 무너뜨릴 수 없는 산과 같은 세력이었다.
그들이 겨눠올 검을 어떻게 받아칠지, 근심이 들었다.
흑익 기사단장으로서도 앞으로 다가올 시련에 대비해야 할 터였다.
턱을 쓰다듬은 알론소는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흑익 기사단을 돌아보았다.
“내일부터 특훈에 돌입한다.”
리노사의 검을 갈고닦는 것. 그것이 흑익 기사단장의 소임이었다.
*
대공이 새로운 후계자와 귀환한 직후, 왕성의 분위기는 급격히 변화해갔다.
미하엘은 다시 앓아누웠고, 대공비는 죽은 듯이 칩거에 들어갔다.
흑익 기사단을 꺾은 직후, 리노사 대공은 헬무트에게 선생을 붙였다. 본격적인 후계자 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아레아에게도 붙었다.
“도대체 내게 무슨 수업이 필요하다는 거지?”
식사를 마칠 무렵 다가온 시녀장이 대공 전하의 명으로 수업을 받으셔야 말하자, 모든 방면에서 소양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아레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리노사의 역사와 예법에 대해서도 정통한 그녀였다. 그러나 시녀장이 한 말에, 그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교춤 수업입니다.”
옆에 있던 시안이 웃음을 터뜨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파르네세 대공비의 권유로 수업을 받긴 했지만, 아레아의 춤은 썩 늘지 않았다.
무투회에 참가하는 동안, 조금 늘었던 실력도 퇴보해버렸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레아가 받아야 할 수업이 딱 꼬집어 그녀가 아주 부진한 사교춤 수업인 걸 보면, 파르네세 대공비와의 교류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아스카 녀석이 수를 썼을지도?’
아레아를 골탕 먹이기 위해선 수고를 감수하고도 남을 녀석이니까.
“지금 뭐가 웃겨?”
“아, 아니. 아무것도.”
아레아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눈치챈 시안은 입을 틀어막고 쏜살같이 도망가야만 했다.
*
나흘 뒤, 리노사의 후계자로서 헬무트를 소개하는 거대한 환영 연회가 열렸다.
그 며칠 동안 빠른 속도로 대공자의 소양을 몰아 갖추어야 했던 헬무트는 표정이 굳어 있었다. 피로하다기보단 지겨운 기색이었다.
그도 학습력이 좋은 덕에 빠르게 대공의 기대치에 부응해갔다.
애초에 그는 검사로서 출중하다는 표현이 모자람이 있을 정도니, 다른 부분은 면을 갖출 정도만 되어도 좋았다.
“준비됐어?”
헬무트가 아레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레아는 도도한 얼굴로 그 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은사와 진주, 레이스로 장식된 화려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색다르지만 여느 때와 같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헬무트의 첫 데뷔 연회에서 그녀와의 약혼 사실도 공표될 터였다.
헬무트가 ‘물구나무로 서서 물 마시기’처럼 낯선 결혼과 약혼이라는 단어를 고심하는 사이, 대공이 먼저 그것을 제의했다.
‘함께 공표해두는 게 편하게 않겠나.’
헬무트는 편하게 대공의 결정에 따라가기로 했다.
그 덕에 아레아에게도 할 말이 생겨, 고비를 수월하게 넘길 수 있었다.
“……너희들,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헬무트와 아레아의 모습을 보고 시안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깊고 강렬한 눈동자에 수려한 이목구비. 큰 키에 단련되고 군살 없는 몸.
최고급의 옷감과 보석이 아낌없이 투여된 남색 예복으로 몸을 근사하게 감싼 헬무트는, 어딘지 위험한 분위기의 귀공자처럼 보였다.
그의 옆에 선 아레아까지. 그들이 선 곳만 공기가 다른 것처럼 비현실적이고 그림 같은 한 쌍이었다.
시안은 곧 빨려드는 듯한 정신을 차리고 물어왔다.
“아레아, 너 춤은 좀 늘었어?”
헬무트나 아레아와는 달리, 평범하게 한가한 그였다.
헬무트의 직속 마법사로서 고용된 그는 뛰어난 적응력으로 빠르게 제 자리를 찾아갔다.
리노사에 몸담은 지 며칠 되지 않은 그는 왕성의 마법 방어에 힘을 보태고, 간간이 마법 물품을 생산하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었다.
자연스레 남는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터였다.
‘한가하고, 마법연구도 할 수 있고, 연봉도 높다.’
꿀 같은 직장이었다. 아주 만족도가 높았다.
“나와 춤춰보면 확인할 수 있겠지.”
싸늘한 눈초리가 내리꽂히자 시안은 찔끔했다. 헬무트가 제지했다.
“그건 안돼.”
“왜?”
“아무튼, 안 돼. 마음에 안 들어.”
“알았어.”
이유도 설명도 없는, 단순한 대화였다. 그러나 아레아는 순순히 대답하며 생긋 웃었다.
둘만의 세계에 빠져든 그들을 보고 시안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팔을 벅벅 긁었다.
‘하, 내가 이런 걸 다 보네. 더러워서 살 수가 있나.’
1년 전만 해도 이 둘의 바퀴벌레 짓을 상상도 하지 못한 그였다. 적응하기 몹시 힘들었다.
다행히 곧 연회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그들을 수행하는 것이 시안의 일이다.
시안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출발하시지요.”
그들은 바로 그곳을 떠나 연회장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