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2
41
헬무트
41화
“진심이 아니면?”
헬무트는 반문했다. 차갑게 느껴질 만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심연 같은 그의 검은 눈이 늘 진지한 빛을 띤다는 걸 핀은 알았다.
재능이 없는데 재능이 있다고 없는 말로 굳이 기를 세워 줄 헬무트가 아니다. 그가 핀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
핀은 기분이 좋아졌다. 헬무트는 퓌엔보다 강한 검사였다. 천재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은 소년. 무시무시한 마물도 홀로 때려잡은 검사 중의 검사다.
그런 헬무트가 자신이 내심 자신 있어 하는 부분을 인정해 주는 게 기뻤다.
“내가 정말 요리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아?”
“네가 만든 음식 맛있다고 했잖아.”
핀이 머쓱하게 볼을 긁었다.
“그건 그렇지. 어쩐지 네가 좀 잘 먹긴 하더라.”
신이 난 핀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내일은 엄청난 숙취에 시달릴 게 분명했지만, 그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핀은 자기 말에 빠져든 듯 중얼거렸다.
“내가 좀 한 요리하지. 그래, 내가 한 음식 맛없다고 한 사람이 없었어.”
“그런데 용병이 요리사보다는 멋지지 않냐? 검을 들어서 고기 써는 거랑 막 이렇게 싸우면서 휘두르는 거랑은 다르잖아.”
“잘 모르겠는데.”
헬무트의 기준으로는 둘 다 멋지지 않았다. 사실 멋지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겠다.
핀은 어느덧 진로 변경을 진지하게 고심하고 있었다.
“하긴 요리사도 이름을 날리면 돈은 많이 벌어. 나는 그쪽이 나을 수도 있겠다. 솔직히 검을 배우긴 배웠는데 맨날 까먹는 거 같아. 땀내 나게 훈련하는 거 재미도 없고.”
그러더니 심지어 이렇게 묻는다.
“야, 네 검에 대한 재능과 내 요리에 대한 재능 어떤 게 더 높은 거 같아?”
‘그걸 말이라고 하나?’
히죽대는 얼굴에 헬무트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당연히 내 쪽…….’
일까? 이렇게 대놓고 비교를 하자니 할 말이 없어졌다. 헬무트도 자기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감을 잡지 못했다.
‘퓌엔보다 내가 강하니 최소한 2급 용병 이상은 되겠지.’
그러나 2급 용병 이상의 실력을 가진 열네 살 소년이 얼마나 되냐, 핀만큼 요리를 잘하는 열네 살 소년보다 적냐는 질문에는 답이 궁색해졌다.
아마 자기 쪽일 거 같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헬무트는 침묵을 지키는 걸 택했다.
“야, 내가 진짜 요리사가 돼서 내 식당 하나 차린다. 그럼 너도 초대할게! 꼭 와라.”
“그래.”
거나하게 취한 핀이 무슨 소리를 하건, 헬무트는 대충 대답하고 넘겼다.
곧 한계에 다다른 핀은 식탁에 머리를 박았다. 쿵!
아프지도 않은지 쌕쌕거리며 잠든 뒤통수를 헬무트는 말없이 내려다봤다. 이제 혼자였다.
그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파헤의 숲에 나와서부터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의 입장에선 문제없이 순탄히 흘러가고 있었다. 인간 세상은 새롭고 흥미로웠다. 결계를 통과하면서 겪었던 고통이 아깝지 않을 만큼.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몸도 회복했고, 자신이 강하다는 것도 안다.
‘의뢰를 마치면…….’
얼마나 되는 액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 풍족해질 거다.
그걸로 가야 할 곳이 있었다. 거기로 가는 것이 옳은지는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다리언이 필요하다고 말한 일. 그에게도 생각이 있을 것이다.
‘내게도 시간이 필요하니까.’
검을 다듬고, 좀 더 경험을 쌓고, 인간 세상에 익숙해지면서 천천히 알아보는 거다.
그의 펜던트 속에 있는 여인, 헬무트의 어머니가 누군지.
헬무트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벽을 만나더라도 넘어설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식탁에서 곯아떨어진 핀을 내버려 두고 헬무트는 혼자 방으로 돌아갔다.
핀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불편한 자세를 느끼고 잠에서 깼다. 비척비척 방으로 올라온 그는 자기가 어떻게 방으로 왔는지도 모르고 다시 잠들었다.
출발 시각이 이른 아침이 아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일어나지도 못할 뻔했다.
여관을 나설 무렵, 퓌엔이 술값을 계산하면서 얼굴을 구겼다.
“대체 술을 얼마나 퍼마신 거야?”
“저거 핀 녀석,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네.”
“아오, 머리 아파. 야 넌 어떻게 그렇게 혼자만 멀쩡할 수 있냐. 얄밉게.”
머리를 붙잡고 끙끙대며 핀이 투덜거렸다. 헬무트는 무시로 일관했다.
핀과는 달리 헬무트는 멀쩡했다. 마신 게 물이 아니라 술일 뿐이었다. 비스의 힘으로 몸속에 남은 취기를 싹 증발시켰다.
이제는 정말 며칠 남지 않았다. 오전까지 푹 쉰 페이스 용병단원들은 어제보다 한결 안색이 좋아졌다.
의뢰 중이라고 핀처럼 끝까지 풀어지지 않고 휴식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핀에게 자연히 구박이 떨어졌다.
“이 새끼, 4급 용병 주제에 이거 벌써부터 빠졌네. 야, 의뢰 아직 안 끝났어!”
등을 팍 치고 지나가는 손길에 핀은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얼굴을 실룩거리며 핀이 소리쳤다.
“션은 내 식당에 초대 못 받을 줄 알아요! 션 월급으론 엄두도 못 낼 비싼 식당을 열 테니까, 그때 두고 보자고요!”
션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는 거야?”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고도 어제 나눴던 대화를 잊지 않았나 보다.
션한테 의기양양하게 내뱉은 핀은 헬무트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진로를 바꾼 한 소년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고 있었다.
*
그로부터 며칠이 흘러 여행은 슬슬 막바지에 이르렀다.
도착할 때가 되어 마일즈도 마차 창문을 열어 놓고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를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뷰탄 상회, 즉 의뢰인 측 사람은 이제 마일즈 혼자였다. 그와 함께 살아남은 뷰탄 상회의 상인은 저번 마을에 남았다.
의식은 찾긴 찾았으나 정신적인 충격이 컸는지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지경이라, 도저히 여행을 계속할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상회에 기별은 보내 두었으니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에 반해 페이스 용병단원들은 부상으로부터 거의 회복되었다. 우터도, 마로스도, 션도.
페이스 용병단원들은 그들이 겪은 위험에 비하자면 상태가 대단히 좋은 편이었다. 마지막 날이 되자 거의 풀어진 분위기로 대화도 나누었다.
“의뢰가 끝날 때가 되어서 몸이 다 나으니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부상을 핑계로 설렁설렁 지냈으니 좋은 거겠지.”
“돌아가면 푹 쉬어야겠다.”
“난 당분간 의뢰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다.”
“나도. 특히 마물 토벌 같은 건 사양이야. 그 반으로 쪼개진 원숭이 대가리가 자꾸 꿈에서 나온다고! 요양이 시급해.”
“얼씨구, 의뢰비만 많이 쳐주면 하겠다고 바로 손들 거면서.”
“아직 안 끝났으니, 다들 정신 차리라구. 여긴 마을이 아니야.”
노상이니 마물이 아니더라도 도적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마물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효과가 있는지 용병들의 감각은 한껏 예민해져 있었지만 걸리는 게 없었다.
타냐가 마일즈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곧 목적지에 도착하겠군요. 지도상으로 여긴 마을도 아니고, 그냥 노상인데 이런 데서 만나서 물건을 전달합니까?”
“맞아, 마을에서 만나는 게 아니니까. 지도에 표시해 둔 지점으로 오면 된다고 하더군.”
“그래서 의뢰인, 안티올은 우리가 전달한 물건들을 어떻게 받아서 가져가겠답니까. 마차째로 가져간다고 해도 혼자서 끌고 갈 순 없을 테고, 부하가 있는가 봐요?”
“그가 가져갈 필요 없지. 안티올의 처소까지 우리가 물건을 실어다 주는 거라네.”
“실어다 주는 거라고요?”
“그래, 그가 은신처를 열어 줄 거야. 우리는 들어가서 물건을 두고 나오면 돼.”
들을수록 아리송해지는 소리였다. 은신처를 열어 준다니. 이 근처에 건물이 있다는 소리일까?
돋보기를 끼고 지도를 살피던 마일즈가 얼마 후 손을 들어 보였다.
“여기야.”
마차에서 내린 마일즈가 손에 뭔가를 쥐고 섰다. 긴 줄과 이어진 색이 예사롭지 않은 붉은 보석이 박힌 펜던트였다. 그 보석에는 희미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뭔가를 의미하는 것처럼.
내린 자리에서 두리번거리던 그가 용병들에게 물었다.
“어디 보자, 이쯤인 것 같은데. 말라붙은 고목이 있지 않나?”
“저기 있군요.”
“그래, 저거야.”
마일즈가 그리로 다가가 고목 중간쯤에 팬 홈에 까치발을 들고 펜던트를 밀어 넣었다. 흡사 빠진 조각을 끼워 넣은 듯이 꼭 들어맞았다.
그 순간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르릉.
바닥으로부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헬무트의 얼굴이 굳었다.
몸을 감싸고 타고 도는 이 이질적인 힘. 그러나 해로운 작용을 한다기엔 은은하고 공격적이지 않았다.
헬무트는 치밀어 오르려는 비스를 억눌렀다. 고목 너머로 숲이 길을 열고 있었다.
그 너머로 빽빽하고 우거진 나무와 수풀이 자리를 비키고, 마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날 만한 폭의 숲길이 만들어졌다.
용병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이거. 마법인가?”
“대마법사의 은신처답구만. 신기해.”
“자, 자, 이제 다 끝났네. 어서 안으로 들어가지.”
마일즈가 느긋하게 재촉했다. 늘 완고하게 얼어 있던 그의 표정이 좀 느슨해져 있었다. 비로소 안도하고 있는 것이다. 상행의 끝을 맞이하여.
그들은 숲길을 따라 이동했다. 주변은 방향감각을 흐트러트리는 은은한 안개로 싸여 있었다. 숲길은 일자로 이어지는 듯했으나 확신할 수 없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듯했다가 위로 올라가고, 좌로 구부러지는 듯했다가 우로 구부러졌다. 도통 어디로 가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공간을 건너뛰는 마법이 걸려 있는 듯하군.”
퓌엔이 중얼거렸다.
“실상 아까 그 장소와 동떨어진 어딘가로 가고 있는 거야. 이 숲길을 통해서.”
헬무트가 물었다.
“어떻게 알아요?”
“온도가 서늘해지는 게 느껴져. 이렇게 온도 차가 날 정도면 먼 거리를 이동하고 있다는 소리지.”
기이한 현상이었다. 마법사는 두 부류로 나뉜다. 일반 마법사들과 일인 전승을 기반으로 한 마법사들.
후자의 마법사들은 희소했다. 집단을 이루지 않으며 마법은 주로 스승에서 제자로, 일대일식으로 전승된다.
그 때문에 전승 마법사란 용병인 그들로서도 접하기 쉬운 존재가 아니었다.
전승 마법사는 대체로 아카데미에서 교육받거나 과외를 통해 마법을 익힌 마법사들보다 실력이 좋았다. 그들은 이처럼 자신들만의 독특한 마법을 펼치기도 했다.
안개를 뚫고 저 멀리 공터가 보였다. 푸른 잔디가 깔린 널찍한 공터는 마차가 모두 들어설 만한 크기였다.
그들은 공터의 끝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는 한 인영을 발견했다.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외눈 안경을 낀 온화한 인상의 노인.
“환영하네, 뷰탄 상회의 손님들.”
양팔을 벌려 보이며 인사한 노인에게 마일즈가 다가섰다.
“안티올 님 되십니까.”
“그럼 이런 곳에 이런 마법을 걸어둘 게 나 말고 누가 있다고.”
“의뢰품을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제가 확인해 본 바로는 손실된 것은 없었습니다만, 목록이 여기 있습니다.”
“그래, 그러지. 다행히 제때 도착했군. 내 정말 애타게 기다렸다고. 늦게 왔으면 난 결계의 수식을 변경했어야 했을 거네. 숲은 시기에 따라 변화하니 그때마다 다른 수식을 짜서 적용해야 하지. 성가시지 않아서 참 좋구만. 역시 뷰탄 상회야.”
학자적인 인상의 노인은 공터에 들어선 마차의 문을 열어 안쪽을 뒤져 보며 쉴새 없이 말을 쏟아 냈다. 괴짜라 하더니 수다쟁이에 가까워 보였다.
한동안 목록을 확인한 노인이 박수를 쳤다. 짝!
“좋아, 제대로 왔군. 구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는데 정말 수고했네. 무척 만족스럽구만.”
“사실 오는 길에, 마물의 습격을 받아 고생을 좀 했습니다만 무사히 의뢰품을 전달하게 되어 기쁩니다.”
마일즈가 은근슬쩍 상행의 고충을 내세웠다. 이제 의뢰비를 받을 시간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