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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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아와 엘라가가 뭘 할지는, 비밀이라는 단어로 가볍게 묻혔다.
그녀는 헬무트에게 설명을 거부했고, 그것으로 끝났다.
아레아의 제의에 마음이 동했는지, 엘라가는 들어보지도 않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헬무트는 아레아와 엘라가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고 신전과의 전투를 예비해야 했다.
그건 그가 생각한 이상적인 전투 구도와 가까우면서도, 어쩐지 고독했다.
“흐음, 괜찮을까.”
헬무트를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것은 시안의 불안한 얼굴뿐이었다.
그는 헬무트와 달리, 아레아도 엘라가도 없는 상황에서 신전의 군대로부터 자신을 지킬만한 실력은 못 되었다.
하지만 그는 헬무트가 고용한 마법사. 월급을 받는 이상, 아레아처럼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이참에 대지의 정령이 확 나를 선택해버렸으면 좋겠군.”
아직 어머니도 정정하시니, 그러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겠지만. 대지의 정령이 있다면 무엇이 무서울까.
그는 그레타 아카데미 마법학부 차석치고는, 별 볼 일 없는 마법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정 안 되면 그린카나를 팔지 뭐.’
시안은 그것으로 불안을 달랬다.
*
베네타에서도 신전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탈론을 보내왔다.
탈론은 신전이 게이트를 열고 라토나로 진격할시, 함락 이전에 구원군이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까지 짜왔다.
그로서는 헬무트를 포함한 리노사의 전력만으로 신전의 군대를 상대로 승기를 잡는다는 가정에는 회의적이었다.
신전에서 얼만큼의 전력을 보내올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재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도 하루는 버텨야 합니다. 신전이 성물이나 신성 마법으로 라토나에서 가까운 지역의 마법적 흐름을 차단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신전의 침략이 포착되면, 마법사협회가 게이트를 열고 베네타의 원군을 리노사로 이동시킬 것이다.
제국은 좀 더 도착이 빠를 것이고, 바소르도 베네타와 속도가 엇비슷할 것이다.
일단 도움이 될 만한 정예병을 대규모로, 신속하게 파견할 수 있는 건 그 세 나라뿐이었다.
“바소르야 신전에 원한이 있다지만, 베네타는 대가 없이 도움을 주진 않을 텐데.”
“베네타에서는 재물을 원합니다.”
액수를 들은 헬무트는 단칼에 고개를 저었다.
“그럼 베네타의 도움은 필요 없다.”
일단 파견해놓고 뜯어갈 참이던가. 미리 묻길 잘했다고 여긴 헬무트는 불쾌감을 느꼈다.
리노사의 재산은 그의 재산이었다.
베네타의 왕도 내전을 통하여 왕위에 오른 데다가, 그린카나에도 좀 뜯겼으니 여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 전쟁을 통해서 돈벌이를 해볼 셈인 듯한데, 액수가 좀 과했다.
“후회하실 텐데요.”
“제국과 바소르가 있는데, 베네타 정도는 있으나 마나지. 다른 나라들과 신전을 비난하는 여론의 한 축에 서면 그것으로 족해.”
“그렇게 전달하지요. 신전에 대해서 블랙호크에 쓸만한 정보가 있습니다만.”
“알론소나 샤를로트에게 보여주고 거래하도록.”
헬무트는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편하게 떠넘기기로 했다.
잘못했다간 괜히 바가지를 쓸 수 있다.
“예.”
물러나는 그를 보며 헬무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탈론의 말투가 어느샌가 공대로 바뀐 터였다.
그는 헬무트를 리노사의 대공자로 대우하고 있었다.
그건 참으로 실감 나는 변화였다.
정체 모를 헬무트로서 마주했던 과거의 인연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시작된 헬무트의 삶이 리노사에 있었다.
그는 이것을 지켜내야 했다. 그의 새로운 둥지를.
*
리노사 대공은 처음으로 라토나가 함락될지도 모른다는 이 사태를 덤덤히 받아들였다.
“군주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야 하지. 너를 받아들이기로 한 때부터 각오한 바 있으니.”
신전은 어차피 리노사를 멸할 수 없다.
리노사 대공가는 제국 황실의 혈통이고, 신전은 종교 집단으로 나라를 직접적으로 점령하여 지배하지 않는다.
그들이 멸할 수 있는 것은 그릇된 선택을 하여 악의 씨앗에 물든 후계자를 임명한 리노사 대공과 그 후계자뿐.
리노사 대공비는 신전에 우호적이었으니, 그녀를 내세워 리노사를 통치하게 할지도 몰랐다.
그 경우 리노사의 후계자는 다시 미하엘이 되리라.
어쩌면 리노사 대공이 대공비와 거리를 벌려둔 것은, 그 만약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공비에게는 과오가 있었지만, 그녀 역시도 리노사 대공가의 일원이다.
그녀는 헬무트 건에 있어서 발생한 대공과 자신 간의 오차에 대해서도 받아들이려고 애썼을 터였다.
헬무트는 퍼뜩 의문을 품었다.
신전이 제국을 건너뛰고 리노사로 곧장 진격해 들어올 거라는 최악의 가정을, 과연 대공이 떠올리지 못했을까.
아니, 그는 그럼에도 선택했다. 리노사 대공으로서는 모든 것을 잃는, 최악의 상황을 감수하면서까지.
벼락이 떨어졌음에도 너무도 태연한 대공의 표정이 그를 말해주고 있었다.
깨달음 속에서 헬무트는 뚫어지게 대공의 암석처럼 굳건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가…… 알 것 같군.’
헬무트에게 사죄하지도, 용서를 바라지도 않았지만…….
대공은 그저 모든 것을 내맡겼다. 리노사를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면서까지.
그것이 그저 은혜 갚음이며, 리노사의 명예를 위한 것일 수 있을까?
리노사 대공으로서 합당한 후계자 선정이라고 말하기에는, 적은 강대했고 위험은 너무도 컸다.
진정한 속내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나타난다.
대공은 말을 아꼈고 때로는 헬무트를 시험하는 듯이 굴었으나, 결정적인 순간 행동으로서 그의 숨겨진 속내를 드러냈다.
그는 헬무트가 리노사의 후계자로 적합하기에 그를 택했다고 말했으나, 그 선택을 결정지은 것은 인간의 마음이었다.
부정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가책과 양심. 그리고…… 옳고자 하는 마음.
그것은 헬무트가 샤를로트의 올곧은 눈빛에서 엿본 것과 빼다 박은 듯이 닮았다.
그들은 진정으로 부녀였다.
“제게 당신의 저울추가 기울 만큼, 무게가 실린 이유가 있습니까.”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리노사가 존속할 수 있어야 헬무트를 택한 게 의미가 있다는 것. 패배할지라도 선택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그건 리노사의 방식도 검사의 방식도 아니었다.
헬무트는 자신의 강함을 알았다. 하지만 리노사 대공은 그만큼 확신하지는 못할 텐데.
대공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실렸다.
“너는 순연한 검사지만, 본능적으로 계산한다. 리노사의 혈통답게도 말이지. 자신의 위치를 가늠할 줄 알고, 승리의 가능성을 따져보지. 그렇기에 4년 전, 네가 정체를 숨겼던 것이다.”
4년 전 제 속내를 긁듯이 끄집어올리는 대공의 말에 헬무트의 눈썹이 위로 움직였다.
대공의 눈빛에 확신이 깃들었다.
“나는 네가 질 거라 생각했다면, 돌아오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만.”
4년 전 헬무트에겐 신전을 상대하여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 때문에 리노사를 전화에 휩쓸리게 해선 안 됐다.
그래서 정체를 숨기는 것을 택했다.
당시의 그를 점령한 것은 강해져야 한다는 강박.
그런 그였으니, 싸우기로 결심하고 모습을 드러낸 이상, 승리에 대한 확신과 근거가 있을 거란 예상이었다.
그건 헬무트란 인간에 대한 직관.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도 군주의 자질이다.
대공은 나직이 덧붙였다.
“검성의 이름은 신전에 견줄만하지.”
헬무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실렸다.
“제게 과한 기대를 거시는군요.”
“이긴다면 너는 리노사의 모든 걸 가져갈 것이다.”
“진다면 다 잃게 되고요.”
“그러니 전력을 다하여 싸우겠지. 너는 파헤의 숲에서 빠져나온다는 기적을 실현시켰다. 두 번이나. 그렇다는 건, 저들이 말하는 루멘의 뜻에 네가 더 가깝다는 것 아니겠나. 저들로서는 인정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파헤의 숲을 가두는 것은 루멘의 의지가 담긴 결계니까.
“오랜만에 검을 들겠군.”
대공은 눈살을 찌푸리며, 창밖 저 너머를 쳐다보았다.
신전의 군대가 몰려오는 양.
그의 결의를 엿본 헬무트는 인사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대공은 리노사가 멸하는 것이 헬무트의 복수라 생각하지는 않는 걸까?
그 믿음이 어디서 오건, 상관없었다. 이제 헬무트의 검은 신전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
미하엘이 자신을 찾아온 건 의외였다.
그와 한 번 대화를 할 계획이 있던 터라, 헬무트는 미하엘의 방문을 받아들였다.
헬무트의 집무실로 들어오자마자 그가 툭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할 셈이죠?”
침대에 누워서 자신이 평생 추구해왔고 헬무트로 인해 잃은 것들을 반성 없이 곱씹었을 미하엘이었다.
그러나 앓아누웠다기에는 반질반질한 얼굴이었다.
순수한 척하는 것도 진력이 났는지, 독기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기는 했지만.
헬무트는 반문으로 답했다.
“너는? 리노사가 무너지면 그들은 너를 왕위에 올릴 텐데.”
신전이라고 해서 리노사의 핏줄이 아닌 자를 대공 위에 올릴 수는 없다.
루멘의 이름으로서 리노사를 징벌하되, 가장 높은 자리를 자신들과 미하엘이 여태까지 신전과 유착 관계를 형성했던 건 헛된 일이 아니었다.
신전은 그를 원하는 자리에 다시 올려줄 힘이 있었다.
이제는 명분도 생겼지 않은가.
그들의 입장에서는 마에 현혹된 대공이 미하엘에게서 예정된 후계자 자리를 박탈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정당성을 찾기도 쉬웠다.
미하엘이 코웃음 치며 물었다.
“당신이 지면, 내가 대공 위에 오를 거란 걸 알고도 나를 살려둘 건가요?”
미하엘은 헬무트가 그에게 한 짓을 잊지 않은 듯했다.
“삶에 의욕이 생긴 모양이야. 움직일 마음이 든 걸 보면.”
그보다는, 갚아줄 것이 있어 원한을 품은 쪽에 가까워 보였지만.
독기 어린 눈으로 헬무트를 쳐다보면서도, 미하엘은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신전은 내게 도구였을 뿐이에요. 그들이 내 머리 꼭대기에 서려고 해선 안 돼. 리노사를 내준다는 건 안 될 일이죠.”
껍데기뿐인 자리에 올라앉고 싶지 않다는 것. 자신이 차지해야 의미가 있다는 것.
헬무트는 미하엘의 정직함에 처음으로 ‘리노사다움’을 느꼈다.
어쨌든 미하엘은 자신의 쓸모를 헬무트에게 증명해 보여야 하는 입장이다.
헬무트가 나직이 지적했다.
“나서다가 네가 쓰러지면 도움이 아니라 폐가 될 텐데.”
“당신 벌레가 무슨 효능을 가졌는지, 꽤 건강해진 것 같으니 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미하엘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인상을 구기며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숙주가 죽으면 기생충도 죽는다. 그 벌레에게는, 숙주를 강화하는 효능이 있는 모양이다.
원래 몸뚱이가 허약하니 한계는 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하엘은 자신의 목숨을 통제당하는 대신, 일반인 수준보다 약간 못한 건강을 얻었다.
그의 기준에서는 잃은 것 대비 얻은 것이 꽤 있었다.
‘운이 좋은 녀석이야.’
그 운이 이번 전쟁에도 먹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샤를로트에게 가보도록.”
두 남매가 머리를 맞대고 리노사를 지키기 위하여 골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