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3
42
헬무트
42화
보통은 의뢰비 일부를 먼저 받고 거래를 하지만, 이렇게 은신처에 꽁꽁 숨은 마법사를 상대로 남몰래 거래할 땐 이야기가 달랐다. 선금을 먼저 받는 과정이 난항이다.
그래서 뷰탄 상회에서는 물건을 전달한 대가로 의뢰비 전액을 현장에서 받아갈 예정이었다.
비슷한 거래를 꽤 여러 번 했던 터라 선금이 없이도 거래가 이루어진다.
안티올이 쯔쯧, 혀를 찼다.
“마차 꼴이 너덜너덜해진 걸 보니 알 만하구만. 마차 대 수에 비해 사람 수도 적어. 저 아래 핏자국도 묻어 있군. 인간의 생명력이 빠져나간 흔적이야. 여럿 죽어 나갔나 보지?”
예리한 시선을 빛내며 자신이 관찰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통찰력이 느껴졌다. 마일즈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남은 인원이 3분의 1쯤 됩니다.”
“맙소사, 대단히 힘든 길을 왔군. 가만 그렇다면 마물을 좀 많이 만났겠네. 저기, 저 마차 안쪽에서 마기가 느껴지는 데, 마물 사체인가?”
역시 마법사답게 그의 관심사는 그쪽이었다. 안티올의 초록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마일즈는 흔쾌히 이야기했다.
“그렇습니다. 손질해 놨으니 함께 구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뭐, 일단 상태를 보고 이야기하지.”
죽은 지 얼마 안 된 싱싱한 마물의 사체는 이 수다스러운 마법사를 만족시킨 것 같았다.
“좋아, 전부 내가 인수하는 걸로 하지. 의뢰비가 얼마였더라.”
“10만 마르크로 말씀하셨습니다만.”
“마물 사체에, 자네들의 신속한 배달에 대한 만족감까지 더하여 13만을 주지. 충분한가?”
역시 마법사는 돈도 씀씀이도 컸다. 금액적으로는 충분했지만 더 부르면 줄 듯한 여지가 보여서 마일즈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잇속 밝은 뷰탄 상단주가 괜히 위험부담이 많은 이 마법사의 의뢰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다.
은인이니 뭐니 명목을 달았지만, 안티올은 돈이 되는 고객이었던 것이다.
“자네 표정을 보니 답을 알겠네. 15만 마르크를 주지. 욕심이 과하면 체하니 이걸로 만족하시게나.”
안티올은 대마법사다운 후한 인심으로 빙그레 웃으며 두둑한 돈주머니를 마일즈에게 넘겼다.
돈을 세서 액수를 확인한 마일즈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자고로 고객은 왕이었다.
전승 마법사. 스승으로부터 은신처와 연구실을 상속받는 그들은 수 대에 걸쳐서 어마어마한 재산을 쌓았다. 마법 약이며 무구를 팔아치우면서 획득할 수 있는 수입은 가히 엄청났다.
만약 그들이 신전에 대항하여 세력을 구축하고자 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자들은 각개로 따로 놀았고, 도통 뭉치려 하지 않았다. 괴짜에, 독존적이며 평생을 연구에 바쳤다.
하지만 그들이 강력한 존재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차는 두고 갈까요, 아니면 회수할까요.”
“나야 별 쓸모가 없으니 가져가시게나. 짐은 바닥에 놓고 가면 되네.”
“그렇게 하지요.”
“서둘러 주게. 자네들이 온 길이 흐트러지기 전에 가야 하거든. 그러고 보니 거기 소년,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데 뭔가 할 말이 있나?”
정확한 지목에도 헬무트는 당황하지 않았다. 헬무트는 줄곧 마차 곁에 서서 대마법사라는 호칭이 달린 이 노인을 관찰하고 있었다.
확실히 파헤의 숲의 그 교활한 늙은이, 에루고와는 달랐다. 은은하게 현기가 느껴지는 이 노인은 자신의 마력을 완전히 감추어 내고 있었다.
인간의 강함을 재보는 건 쉽지 않은 일. 특히나 이렇게까지 마력을 고스란히 숨길 수 있다면, 이 노인은 강자다.
마법사와 검사의 전투력은 싸워 보지 않으면 우열을 가르기 어렵다. 호승심이 솟았지만, 섣불리 싸움을 걸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대마법사의 시선이 헬무트를 관찰하고 있었다. 실은 안티올은 진작부터 헬무트의 존재를 의식했다.
어린 나이로 보이지만, 강력한 비스를 가지고 있는 검사. 그리고 약간이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희미하지만 꺼림칙한 기운.
의뢰품을 모두 확인하고 나자 그제야 헬무트에게 신경이 미쳤다. 헬무트를 샅샅이 훑어본 안티올이 그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이거, 이거 흥미로워.”
종교에 심취된 것처럼 팔을 펼치며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너는 아주 특별한 아이야. 나는 그걸 알 수 있지.”
“헬무트! 대마법사한테 인정받아서 좋겠다, 야.”
멀뚱히 서 있던 핀이 곁에서 헬무트의 어깨를 툭 쳤다. 속으로 ‘대마법사에게 요리사는 인정받을 수 없나?’라고 구시렁대면서.
“눈빛이 살아 있구나. 검사라면 그래야지.”
안티올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은 진지해졌다. 오래된 숲처럼 깊고 아득한 눈빛이었다.
“때때로 마법사는 진실을 엿볼 수 있지. 특히 나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남들이 감히 짐작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헬무트의 기운이 날카로워졌다. 살의를 띤 비스에 핀이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저자가 아는 듯이 지껄이는 건지 정말 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후자라면 베어 버려야 한다.
노골적으로 살의를 드러냈음에도 안티올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렇지, 비밀이 필요하구나.”
그가 가까이 다가오며 주변에 얇은 막이 쳐졌다.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분리된 듯했다.
이런 섬세하고도 난도 높은 마법을 바로 구현할 수 있다면 그는 확실히 대마법사라는 호칭에 걸맞은 마법사다.
옆에서 뭐라고 외치는 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티올이 말했다.
“나는 마법사란다. 그리고 마법사는 평범한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는 법이야. 적도 아군도 말이지. 이제껏 나는 세상의 많은 비밀을 접해왔고 그것에 침묵해 왔단다. 비밀은 그것을 간직하는 자에게 모습을 보이는 법이지. 나는 항상 수면 밑에 감추어져야 할 진실을 존중해 왔단다. 그러니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게다.”
“맹세할 수 있어?”
헬무트는 일전에 들어 본 것을 언급했다. 어길 시에 마력의 막대한 상실을 가져온다는 ‘마법사의 맹세.’
목숨이 걸리는 문제는 아니지만, 마법사들은 마력에 집착한다. 목 아래 칼이 들어오지 않고서야 어기지는 않았다.
안티올이 턱에 길게 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래, 마법사의 맹세. 잘 아는구나! 나 마법사 안티올은 헬무트란 소년이 어둠의 싹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서 발설하지 않겠다.”
역시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힘이 깃든 언어가 그의 말에 효력을 부여했다.
마법의 기운이 퍼져나가는 걸 느끼며 헬무트는 살기를 가라앉혔다.
그는 말투를 바꿨다. 자신이 안티올과 대화가 준비됐다는 호의적인 신호였다.
“신전이 당신을 적대한다고 들었어요.”
“그래, 놈들은 나를 적대하고 난 놈들이 하는 일을 망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 절대로 서로에게 유리한 일을 하지 않는 건전한 관계란다.”
말투가 묘했다. 적이라는 것 같은데 유쾌하게도 말한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네가 뭘 궁금해 하는지 알겠구나. 네 심장 깊숙한 곳에 있는, 그 어둠의 힘이 걱정되는 게 아니냐.”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마법사인 당신은 이걸 없애는 방법을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무슨 힘인지는 알고 있겠지.”
“마왕의 흔적. 마기의 덩어리. 놔두면 점점 커져서 이지(理智)를 잡아먹는 잠재적 위험.”
때때로 어둠의 싹은 단순히 존재할 뿐인 힘이 아니라 저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왕이 남긴 힘의 흔적이라 하니 그것이 어쩌면 마왕의 의지일지도 모르겠다.
파멸의 의지.
“너는 경지에 이른 검사이니, 이지가 잡아먹힐 만큼 어둠의 싹이 커질 때까지 여유가 좀 있을 게다. 심신이 피폐해지는 엄청난 사건이 있지 않고서야. 척 보기에도 평정심을 잘 유지하는 성격이구나.”
표정 없는 얼굴과 차분한 눈동자. 어둠의 싹은 감성을 무디게 하는 한편 악의와 분노를 이끌어 낸다.
하지만 눈앞의 소년은 침착했고 흉포한 성격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이룬 성취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경지에 오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더 잘 다스리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은 어린 나이로 보이건만, 눈앞에 소년에게선 어마어마한 비스가 느껴졌다.
저만한 비스를 쌓으려면 가진 바 재능으로만은 안 된다. 아마 스승이 있었을 것이다. 이름 높은 검사가 그에게 검을 가르쳤으리라.
“어둠의 싹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많지 않아. 연구할 만한 표본이 적었거든. 하지만 나는 대마법사이지. 그래서 조금은 알고 있는 게 있단다.”
뻐기듯이 말한 노인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듯 자신이 아는 지식을 읊기 시작했다.
“어둠의 싹을 가진 아이는 태어나면서 마기를 발현한다. 신전은 발현된 마기의 파동을 감지하는 수단을 가지고 있지. 발견된 아이는 죽거나 파헤의 숲으로 보내진다. 그 방법을 쓰면 아기가 가진 마기를 파헤의 숲으로 함께 격리시킬 수 있다. 하지만 파헤의 숲으로 보내는 데는 신성력이 많이 드니 선택하기 어렵지.”
목을 가다듬은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보내지는 아이는 아마 마물에 잡아먹히겠지. 파헤의 숲은 온갖 마물이 득실거리는 숲이니까. 어둠의 싹은 육체적 성장과 이지의 발달에 도움을 주지만, 인간은 성장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의 아이는 짐승과 달리 성장이 느리고 그건 그 아이에게 얼마나 대단한 재능이 있건 극복할 수 없는 문제지.”
“운 좋게 살아남아 파헤의 숲을 나오는 아이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헬무트는 무심한 척 물었다.
“일단 마기를 가지고 있다면 신성 결계를 지날 수 없다. 그건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결계. 마법사들을 감지하는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의 결계야. 고대로부터 전해져 왔지.”
다행히 안티올은 헬무트의 말보단 자신의 생각에 집중한 것 같았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어둠의 싹은 생명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몸이 쇠약해서 배 속에서 죽었어야 할 아이한테 깃든다는 게 정설이다. 죽을 생명을 살리면서 대신해서 그 아이를 숙주로 삼는 게지. 하지만 어둠의 싹은 결국 마기 덩어리. 결계에 의하여 정화가 이루어지면, 어둠의 싹도 불타 사라질 거다. 그렇게 되면 숙주의 생명도 꺼지게 되는 것이지.”
‘그렇다면 나는 진짜로 비스가 어둠의 싹을 지켜 줬기 때문에 살아남은 거구나.’
정말 한 끗 차였다. 헬무트의 어둠의 싹은 정말로 꺼질 뻔했었다. 그리고 그때 헬무트는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회생한 것이 기적.
그러니 헬무트가 파헤의 숲을 나온 건 성공적인 이론에 따랐다고 할 수 없다. 말 그대로 하늘이 도와준 것이다.
안티올이 결론지었다.
“그 때문에 네가 말한 일은 내가 아는 이론상으로는 불가능하다. 다른 이론이 있다면 모를까.”
상식을 넘어서 짐작한다고 했지만, 눈앞의 마법사도 헬무트가 파헤의 숲에서 왔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네 경우는…… 사실 드물어. 어둠의 싹이 희소한 경우로, 너무 미약하여 아기일 때 발현하지 않아 신전의 이목에 걸리지 않은 거지. 그런 경우에 마법사나 검사로서 자라나면 빠르게 경지가 오르지만, 그런 자들은 오래 살 수가 없어.”
“어째서요?”
“신전에서 잡아 죽이기 때문이지. 정신적 성장이 어둠의 싹이 이지를 먹어치우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여 점점 더 흉포해져서 폭주하거나 그 전에 이상 징후를 보이거든. 마기는 마기를 찾는다고, 어둠의 싹은 성장을 추구하지. 하지만 평범하게 사람들 속에서 살면서 마기를 얻기는 쉽지 않아. 마물의 핵을 씹어 먹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래서 대신해서 부(不)의 감정을 쫓지. 공포와 살의와 분노를 추구하는 거야. 역대로 나타난 잔인무도한 살인마들은 하나같이 어둠의 싹을 가지고 있었단다. 비공식적인 사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