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30
429
헬무트
429화
[나는 내 의지로 이곳에 왔다. 루멘이 나를 파헤의 숲에 가두었다지? 그런데 생각보다 시시하군. 그 안에 있으면 루멘이 너희를 지켜 줄 것 같으냐?]마기를 쏟아 내는 위협적인 눈빛. 날름거리는 혀가 입술 주변을 느릿하게 핥았다.
거대한 표범의 목에서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표범 앞에서 인간은 한낱 토끼였고, 토끼라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소리였다.
인간도 짐승의 하나이니, 상대의 강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레비나는 창백한 얼굴로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켰다. 그녀의 지팡이는 꿋꿋이 엘라가를 겨누고 있었다.
“마물이여. 바라는 게 뭐냐. 복수하려는 것인가?”
[그 꼬챙이로 대체 뭘 하려고?]엘라가는 콧방귀를 끼었다. 이내 그는 당당히 선언했다.
[나는 이곳을 무너뜨릴 거다. 산산조각 낸 돌덩이를 밟으면서, 루멘의 흔적을 이곳에서 지워 버릴 것이다!]잠깐 망설였지만, 이런 식으로 위협해야 리노사로 간 녀석들이 돌아올 것이다.
엘라가는 이빨을 드러내며 다시 한 번 크게 울부짖었다.
크아아아앙!
마기가 실린 포효는 결계를 또다시 후려쳤다. 온 사방이 그 파동에 파르르 떨렸다.
레비나는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리노사로 성전을 수행하러 간 신전의 군대. 그들을 함부로 물릴 수는 없다.
어둠의 싹을 가진 자를 척결하는 것이 그들의 신성한 의무였다.
어찌 루멘의 군대가 목표를 놔두고 뒷걸음질 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는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결계를 부수고 들이닥친 마물이라니.
그 마물은 너무도 강력했고, 수월하게 이곳까지 들이닥쳤다.
이곳에는 루멘의 제단이 있다. 신전의 중심인 이곳이 함락당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레비나는 곧 계산을 끝마쳤다. 그녀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악한 마물이여. 어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전의 군대는 이곳에 없다. 그들이 돌아온다면 너를 물리칠 것이다.”
[그래, 여기 없지. 없다는 게 중요하지. 막을 테면 어디 한번 막아 보라고!]그러나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달려들 듯이 몸을 뒤로 뺐던 엘라가는 일순 멈춰 섰다.
레비나의 손에서 지팡이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대신관의 신성력을 퍼부은 지팡이가 성스러운 빛을 허공에서 내뿜었다.
‘공격 마법인가?’
피하면 된다. 엘라가는 그녀의 동작을 주시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빛이 가신 지팡이를 내리며 끝으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처음으로 어떤 격렬한 감정이 드러났다.
그것은 분노였다. 루멘의 뜻을 받들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분노.
어둠의 싹을 가진 자가 나타나면, 신전은 총력을 기울여 그를 토벌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리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군대를 물리리라. 그것은 패배와 마찬가지로 여겨졌다. 치욕적이었다.
“비록 성전이 뒤로 미루어지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루멘의 뜻이 꺾인 것은 아니니. 후에 다시 때가 올 것이다.”
중얼거린 그녀는 지팡이를 꽉 쥔 채 엘라가를 노려봤다.
그녀는 조금 전, 출정한 대신관들에게 알렸다. 신전이 마물에 의해 반파되었고, 심각한 위기 상황이니 속히 돌아와야 한다고.
결과적으로 엘라가와 아레아가 의도했던 것은 그대로 먹혀들었다.
[엘라가, 적들이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곧 몰려올 겁니다.]어디선가 아레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엘라가는 허공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은신 마법을 쓴 아레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소리냐. 이제 저 건물만 부수면 끝나는데.] [지체하지 말고 바로 빠져나가야 합니다.]정말로 금세, 돌아올 테니까. 리노사로 이동하려면 게이트를 열어야 하지만, 신전으로 귀환하는 일은 훨씬 수월하다.
루멘의 권속들은 성역으로 돌아오는 데, 아주 적은 힘만을 필요로 하니까.
엘라가와 아레아도 흔적을 지우고 여기서 내빼려면 이만하는 편이 좋았다.
올 때는 라토나의 이동 마법진을 탔으나, 돌아가려면 공간 이동 마법을 여러 번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엘라가의 등 뒤로 우뚝 선 신전의 중심지를 보자, 아레아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마지막으로 공격 마법을 사용한다면.’
엘라가의 마기는 신성 마법과 극상성이므로, 그의 공격은 내뿜는 마기의 양만큼 강력하게 먹히지 못한다.
신성력은 아주 적은 힘만으로도 대량의 마기를 상쇄하니까.
하지만 마법은 달랐다. 아레아가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한 공격 마법이라면 엘라가가 여러 차례 두드린 저 결계를 뚫고 저곳을 박살 낼 수 있다.
그녀는 대마법사의 경지에 가까워진 마법사니까.
‘그러면 안 될 이유가 있나? 나 역시도…….’
원한이라면, 엘라가가 아니라 자신에게 있었다. 아레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안에 잠들어 있던 강렬한 복수심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 마음에 응하고 싶은 충동을 누르는 일이 꽤 버거웠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그녀는 이곳에 분명하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
마법사가 마물을 조종하여 신전을 공격했다. 신전의 공적으로 지명될 충분한 이유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이케와 혈연관계라며 그녀의 부모를 살해한 신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짓이다.
신전의 공적, 하이케의 손녀답게 마물까지 부려서 신전을 침략한 마법사라면서.
정당한 길을 걷고자 돌고 돌아 이렇게 왔다. 이제 와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아레아는 의지로서 마음을 누르며 내뱉었다.
[아까 온 곳으로 그대로 빠져나가요. 서둘러 가지요.] [그래.]엘라가는 아쉬운 듯 뒤를 힐끔 돌아보고 몸을 뺐다.
투다다다다! 그는 날듯이 달려 그곳을 벗어났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수잔을 닮은 인간을 죽이는 건 좀 찜찜한 일이니까.
게다가 신성력에 닿으면 아팠다. 엄청나게.
살을 지지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당해 보니 그도 신전의 군세와 맞서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이길 수는 있겠지만, 그 결과로 자신의 털은 홀라당 벗겨질 터.
엘라가도 별로 몸 다쳐 가면서 싸우고 싶지 않았다.
나호와 죽어라고 싸운 것도 헬무트 때문이었을 뿐이다. 내내 놈이 거슬리면서도 내버려 뒀던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닥치는 대로 싸우는 싸움꾼과 거리가 먼 그였다.
엘라가는 금세 신전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내가 마물이라 그런가. 생각보다 약한 놈들은 아니로군.’
처음 신전을 주파했을 때만 해도 괜찮았다. 작은 신성력이 조금씩 두들겨 봐야 엘라가의 마기를 뚫지는 못한다.
하지만 큰 신성력의 덩어리는, 그의 마기를 뚫고 본신에 상처를 입혔다.
그 상처는 작지만 고통스러웠고 잘 낫지 않았다.
어둠의 싹을 가진 헬무트에게는 확실히 위협적인 힘이었다.
‘라토나 쪽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쪽에는 대신관 대다수를 비롯한 신전의 전력이 가 있었다. 헬무트와 리노사의 인간들이 과연 잘 대처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은 리노사로 돌아가면 확인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신전을 빠져나왔다.
* * *
작열하는 성검의 힘이 전신을 불타는 듯이 뜨겁게 만들었다.
신성력이 피가 되어 그의 온몸을 타고 도는 것 같았다.
태양처럼 강력한 신성력을 품고, 레반트의 검이 적을 향해 휘둘러지고 있었다.
암흑에서 나고 자란 듯이 검고, 흉악한 힘과 교활함을 두루 갖춘 그의 적.
헬무트. 리노사의 후계자라고?
부정한 힘을 가진 자가, 양지로 드러나는 것을 그도 신전도 용납할 수 없었다. 루멘의 뜻으로서 그를 불사르리라.
그러나 그 순간, 헬무트의 몸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레반트가 그만한 신성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막대한 힘을 휘두르려면 반응이 약간은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용암에 굳이 몸을 담글 필요는 없겠지.’
헬무트는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몸을 날렸다.
신성 마법이 사방에서 날아들고 있었으나, 모든 마법이 동일한 위력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가장 약한 마법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몸을 날려, 검으로서 베어 낸다.
최소한의 비스로 최대한의 효율을. 그것이 원칙이다.
적의 공격을 무식하게 맞받으려고 한다면, 신성력을 맞상대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는 다리언이라도 큰코다칠 것이다.
콰삭! 마법이 그의 검날에 깨어져 나가 흩어졌다.
헬무트는 바로 옆쪽에 있던 성기사를 베어내고 그의 말을 잡아탔다.
자신의 말이 어디 있는지는 이미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말이야 그가 원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기만 하면 그만이다.
헬무트는 순서를 알았다. 대신관이 뒤에서 성기사를 보조하는 한, 그리고 그 성기사가 헬무트의 검격을 버텨 낼 실력을 가지고 있는 한 이쪽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대신관들은 헬무트에게 신성 마법을 퍼부으며, 성기사의 몸과 힘을 회복시켜 주고 그에게 힘을 불어 넣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도움을 줄 터였다.
그것은 그들이 같은 속성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들은 신성 마법을 방어하고 신전 쪽에 공격 마법을 퍼부어 견제할 수는 있겠지만, 헬무트에게 같은 방식으로 도움을 주진 못한다.
신성력을 행사할 그릇의 역할.
‘거기에 딱 걸맞은 것이 저 녀석이지.’
다른 성기사들과 달리, 단번에 죽여 버릴 수 없다. 그렇다면 일단은 순서를 뒤로 미루는 것이 나았다.
대신관을 하나하나 잡아 죽이고 나서 상대해도 좋다.
이미 한 번 꺾은 녀석이었다. 검 실력만으로는 이쪽이 우위라는 걸 충분히 알려 줬다.
치사하게 성검의 힘인지 뭔지 일깨워서 달려드는데 자신이 굳이 정면 대결해 줄 이유는 뭐가 있겠는가.
저만한 신성력을 내뿜으면서 제한이 없을 리 없으니 피하다 보면 힘이 떨어질 것이다.
뒤늦게 레반트가 헬무트의 뒤를 쫓아왔다.
“어디로 도망치는 것이냐!”
그의 안면에 가득 피어오른 것은 분노였다.
그는 맹렬히 헬무트의 뒤를 쫓기 시작했으나, 중간에 거치적거리는 것들이 많아 거리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헬무트는 그의 존재를 싹 무시하고 말을 달렸다. 적을 만나면 제게 달려드는 성기사를 베고, 바로 그의 말을 탈취했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적들의 틈새로 파고들었다. 진영을 갖추기 전에, 최대한 빠른 속도로 헤집는다.
조금 전, 대신관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이 전투에서 지휘권을 가진 것은 그들이었다.
쏟아지는 신성 마법들의 사이를 비집고, 검으로 베고 막으며 헬무트는 거침없이 진격했다.
그는 이미 홀로서 군대였다. 그의 등을 지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물러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대로 깊숙이 파고들어, 대신관이라는 벽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 벽을 산산이 부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