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38
437
헬무트
437화
“여어, 헬무트.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대공의 집무실에서 빠져나오는 길에, 어쩐지 퀭한 얼굴의 시안과 마주쳤다.
주변을 두리번거린 그는 손을 흔들며 헬무트에게 아는 체했다.
자신의 직속 마법사임에도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헬무트였다.
“네 활약상 잘 봤다. 멀리서도 잘 보이더라. 하도 인상적이라.”
“그랬지. 너는?”
어떻게 지냈느냐는 질문인데, 시안은 질타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억울한 표정을 지은 그는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얼굴 살 빠진 것 좀 봐라. 안 놀았다고. 내가 뒤에서 지원 마법을 갈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젖 먹던 힘까지 마법에 쏟아 냈어. 게다가 아까 전까지 부상자 치료를 도왔다고! 이만하면 월급값은 했지?”
월급을 날로 먹고 있다는 지적이 어지간히 찔렸던 모양이었다.
헬무트는 간단히 한마디로 답했다.
“수고했어.”
그레타 아카데미 마법 학부 차석이면, 아무리 허당이라도 제 역할을 할 만한 수준의 마법사다. 제 몫을 해내리라는 당연한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칭찬을 들을 줄 알았는지, 시안의 표정에 약간의 실망감이 서렸다.
아니, 그게 아니다. 헬무트는 그의 실망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알아챘다.
‘월급을 올려 주는 걸 원했나 보군.’
어쩐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라니, 특혜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모양이다.
헬무트는 잠시 뒤에 입을 열었다.
“곧 포상이 있을 예정이야. 네 이름도 포상자 목록에 있을 테지.”
그건 헬무트도 알 수 없지만, 시안이 제 말처럼 열심히 싸웠다면 누군가는 그를 알아주었을 터였다.
포상이 있을 예정이라는 건 대공이 말한 사실이다.
“오오, 정말?”
시안이 눈을 반짝였다. 네 사람 중에 가장 가난한 그였다.
아카데미 시절에도 아껴 가며 살았으니, 돈 욕심이 없을 수가 없다.
의욕이 솟은 듯 그가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좋아. 그럼 이따가 보자고.”
부리나케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헬무트는 그 말을 곱씹었다.
“이따가?”
저녁때 보자는 소린가.
아직 시안은 근무 중이다. 직속 마법사지만, 막상 헬무트에게는 아레아가 붙어 있어서 달리 마법사가 필요 없었던 탓에 시안은 갖가지 일에 활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헬무트는 만찬에 참석하게 될 터였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저녁 무렵, 드레스를 입고 단장한 아레아와 함께 헬무트는 만찬이 열리는 장소로 향했다.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돌아온 아레아의 표정에는 그늘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헬무트에게 이유를 알려 주었다.
“하이케와 안티올, 두 사람 모두 연락이 안 돼.”
신성 결계는 특히, 안티올의 전문 분야가 아닌가. 아레아는 수정구를 통해 먼저 그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다.
하이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무슨 일이 있는가.’
그들에게 위협이 될 존재는 신전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신전은, 반파된 자신들의 성역을 복구하느라 정신이 없을 터였다.
두 사람이 위험해질 일은 없을 테고, 뭔가 두 대마법사의 신경을 빼앗을 만한 일이 발생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전언은 남겨 두었으니, 며칠 더 기다려 보지. 정 소식이 없으면 찾아가면 되니까.”
그녀는 명쾌하게 말을 맺었다.
“우리는 만찬을 즐기자고.”
만찬이라기에, 대공 일가만 함께하는 자리인 줄 알았던 헬무트는 곧 의외의 기분에 잠겼다.
중간 규모의 홀에 거대한 식탁이 놓이고, 거기에서 만찬이 열리고 있었다.
부상자들이 있기에 우선, 소규모로 축하연을 가지는 것이다.
때맞춰 왔건만 자리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두 착석한 터였다
식탁 위로 음식이 하나하나 실어 날라지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음식에 손대고 있지 않았다.
“왔구나. 어서 앉거라.”
대공의 묵직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헬무트의 시선이 움직였다.
이제껏 헬무트와 마주치는 것을 피해 왔던 리노사 대공비, 그리고 미하엘.
그 두 사람이 참석할 거라는 건 예측한 터였다. 하지만 알론소에 시안까지.
‘그래서 이따가라고 했던 거로군.’
맞은편에 앉은 알론소에게 제법 친근하게 말을 붙이며 대화하고 있던 시안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럴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의식한 듯 그는 급히 손을 내렸다.
흑익 기사단장이야 그렇다 치고, 고용된 마법사에 불과한 시안은 여기 낄 만한 입장은 못 된다.
그런 그가 자리에 있는 걸 보니, 대공의 의도가 느껴졌다.
대공은 그의 친구인 시안을 초대함으로써, 이 자리가 승전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기도 하지만, 헬무트를 위한 자리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의도는 알겠지만.’
차츰차츰 헬무트에게 힘을 불어 넣으며 그의 후계자 자리를 확고히 한다.
헬무트는 아군으로 돌아선 대공이 익숙지 않았다.
“어서 앉자.”
아레아가 그의 팔을 당겼다. 헬무트는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 끝에는 대공과 대공비가 나란히 앉았고, 대공의 다른 쪽 옆이 헬무트, 그리고 다음이 아레아의 자리였다. 아레아의 옆에는 시안이 앉아 있었다.
대공비의 다른 쪽 옆자리는 미하엘의 차지였다. 헬무트와 마주 보는 자리다.
그는 슥 시선을 피했다. 전보단 낯빛이 좋아 보였다.
“늦었습니다.”
그들이 착석하기 무섭게 나타난 샤를로트가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미하엘의 옆자리였다.
미하엘은 인사를 하긴커녕 그녀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대공 앞에선 착실한 척하는 그였으나 이제는 그럴 마음도 없는 듯했다.
이 자리에 나온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물론, 그의 의지는 아니었겠지만.
“무사히 리노사의 위기를 넘기고, 승리로 이 자리를 장식하게 되었으니 기쁠 따름이오. 자, 마음껏 식사를 듭시다.”
대공의 말이 떨어지자, 그들은 그제야 식사를 시작했다.
리노사 대공비는 차분한 얼굴로 음식에 손을 가져갔다.
시선을 피하는 미하엘과는 같으면서도 다르게, 그녀의 시선이 헬무트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리노사 대공가의 안주인으로서 늘 이런 자리를 이끌어 왔던 그녀는 오늘따라 소극적이었다.
평온한 듯 보였던 마그리트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녀가 버린 아들이 리노사를 지켰다.
신전의 명분은 헬무트였으나, 그 명분을 내세울 수 있게 한 것은 힘이었다.
헬무트는 신전을 쳐부숨으로써 힘을 힘으로 부정했다.
그는 승리자였고, 그것이 리노사의 후계자로서의 증명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헬무트는 그간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가 어렵다 여겨 도외시하고 눈을 감았던 그 길을, 다시금 살려 내 걸으면서.
시작부터 그랬다. 무투회 우승. 돌아온 헬무트는 당당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증명하면서 리노사로 걸어 들어왔다.
그에게 서린 어둠은 빛보다도 눈부셨다.
한 명의 인간이, 리노사의 군주가 될 자가 가질 만한 후광이었다.
4년 전, 그때의 선택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그저 대공이 부재한 시점에, 짊어져야 할 리노사가 버겁고 또 두려워 헬무트를 내쳐 버린 것은 아니었을지.
제국이며 바소르며 많은 이들이 헬무트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이번 사태를 통하여 마그리트는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에 의문을 품었다.
그 의문은 심장 한구석을 찌르는 듯한 죄책감으로 화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저토록 빛나는 헬무트는 리노사의 후계자일망정, 다시는 그녀의 아들이 되지 않으리라.
늦은 후회였다.
마그리트는 감히 헬무트와 시선을 맞출 수 없었다.
샤를로트가 헬무트에게 말을 건넸다.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적들은 성에 근접조차 하지 못했으니까요.”
왕성을 지킬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남아야 했던 샤를로트였다.
그녀는 성안에서 애를 태우며 전장으로부터 들려올 소식을 기다려야만 했다. 검사로서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헬무트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아니, 그래도 네가 있기에 왕성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샤를로트의 역할이 실은 대공비와 미하엘을 견제하는 데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녀는 그녀의 몫을 충분히 해 줬다.
그러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샤를로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쁩니다.”
그러나 그때, 노골적으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미하엘이었다.
아무것도 한 게 없고, 할 수 없었던 그의 입장에서 거슬리기 짝이 없는 대화였다.
이런 절대적인 힘이 격돌하는 전쟁에서, 지휘권조차 없는 미하엘이 무엇을 하겠는가.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성안에서 지켜지는 일뿐.
미하엘이 비아냥거리며 입을 열었다.
“승리한다고 한들 소득 없는 전쟁에 인력과 재정이 엄청나게 낭비되었지만, 이겼으니 된 거겠죠.”
“미하엘.”
대공비가 조용히 그녀의 아들을 제지했다. 대공이 차갑게 반문했다.
“소득이 없다니?”
그는 바로 이어, 냉엄한 어조로 지적했다.
“리노사는 검성을 얻었다. 그만한 소득이 있더냐.”
리노사의 후계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 검술.
결코 그것을 채울 수 없었던 미하엘의 눈빛이 바르르 떨렸다.
질투심과 열등감. 그에게 뿌리 깊은 감정이었다.
수지에 맞지 않는 싸움을 하는 건 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비틀린 심정을 이기지 못해 입을 열어야 했던 건 불가항력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소득도 있을 수 있지. 식사를 마저 들거라.”
대공의 말은, 마치 경고처럼 들렸다.
미하엘은 고개를 떨구며 접시를 들여다보았다.
헬무트는 그가 말한 그 이상의 소득이 뭔지 알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 신전은 퇴각한 것이지 전쟁 패배에 승복한 것이 아니다.
리노사가 신전에 쳐들어갈 수도 없으니, 패배의 대가를 받아 내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보였으나, 실은, 그들에겐 보상을 받아 낼 방법이 있었다.
대신관 아가토.
인질과의 교환을 명목으로 신전에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하면 되리라. 그 외에도 많은 조건을 달아서.
비록 미하엘은 그 사실을 아직 모르는 눈치였지만.
대공가의 불화를 목도한 시안은 불편한 기색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하지만 그는 곧 ‘에라 모르겠다’라는 마음으로 다시 포크를 들어 올렸다.
적어도 음식은 맛있었고, 그는 배가 고팠으므로.
헬무트 역시도 태연한 반응의 아레아와 함께 느긋이 식사를 즐겼다.
이 익숙지 않은 그림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 가리라.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