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41
440
헬무트
440화
“엘라가잖아?”
이그렐이 코웃음 쳤다.
난데없이 경비를 건너뛰고 독특한 경로로 등장한 고양이를 대공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이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게 헬무트의 고양이라는 걸 알고 있더라도.
[다 들었어.]바닥에 내려선 엘라가가 고개를 꼿꼿이 쳐들었다.
[이그렐도 나돌아다니는데, 나라고 해서 더 이상 고양이인 척할 이유는 없지 않겠냐?]대공의 시선이 엘라가와 헬무트를 빠르게 오갔다. 놀람 반, 설명을 요구하는 마음 반이다.
헬무트는 이마를 짚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언젠가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 상황은 너무도 느닷없었다.
“원래 고양이잖아. 덩치만 클 뿐이지.”
이그렐이 빈정거렸다.
[닥쳐, 약해 빠진 주제에.]그 말은 부인할 수 없는지, 이그렐이 입을 딱 다물었다.
[그보다 정말 신성 결계에 구멍이 났다고? 나는 그냥 핑계 댄 건데.]“핑계를 대?”
[그래, 그 대신관인지 뭔지 하는 여자가 나한테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파헤의 숲에서 왔다고 했지. 신성 결계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니 좀 살펴보라고 했거든.]“오, 대신관하고도 싸웠던 거야?”
[얼마 전에. 뭐, 별것도 아니더만.]엘라가는 허세를 떨면서 털이 다 자라지 않은 앞발을 감췄다.
그때의 통증은, 마치 불로 지지는 것 같았다.
신성력에 살 닿느니 차라리 나호 같은 녀석과 또 맞붙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레아가 정리했다.
“그렇다면 신전도 이 사실을 알고 있겠군요.”
파헤의 숲에서 나왔다는 마물이 떡하니 눈앞에 있으니, 신성 결계 쪽을 돌아보지 않았을 리 없다.
그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의문이었다. 엘라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역시 난 대단해. 결계에 이상이 생긴 걸 본능적으로 느꼈나 봐.]“그냥 우연이겠지.”
중얼거리면서도, 이그렐은 자신이 파헤의 숲으로 향한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닌지 의심했다.
마물의 본능은 강력하다.
마성이 발달하면서 본능을 제어하게 되었지만, 본능이 주는 감은 오히려 더 발달했다.
‘그렇다면 마물인 내가 불길하게 느낄 이유가 있나? 신성 결계가 없어져서 나한테 나쁠 게 없잖아?’
인간에게는 위기겠지만, 파헤의 숲에서도 군림하던 이그렐에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잠시 대화가 소강상태에 이르자 대공이 헬무트를 향해 무겁게 입을 떼었다.
“……잠깐,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구나. 헬무트, 왜 네 고양이가, 아니 네 마물이 대신관하고도 싸운 거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도 그는 군주답게, 평정심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납득할 만한 대답은 들어야 했다.
헬무트는 할 말을 골랐다.
조금 난감한 기분이었으나,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이 김에 모두 설명하면 될 터.
대공은 잠자코 헬무트의 이야기를 들었다.
엘라가와 이그렐이 파헤의 숲에서 함께 나온 마물이며, 특히나 엘라가는 헬무트를 어린 시절부터 보호하며 길러 주었다는 것을.
두 마물 모두 사람을 잡아먹지 않으며, 오히려 우호적이라 다른 마물로부터 인간을 지켜 주기도 했다는 말도 강조했다.
물론, 이그렐은 딱히 인간에게 우호적인 편은 아니었으나 인간을 잡아먹지도 않았다.
“이 둘이 없었다면 파헤의 숲 밖으로 나오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여태까지, 그들이 사고를 친 적도 없고요.”
이그렐이 친 사고는 불가피했다.
대공이 날카롭게 꼬집었다.
“그렇다면 대신관과 싸웠다는 건 무슨 소리냐.”
“그건…….”
그것도 사고에 속하는 것 아닌가?
헬무트가 대답을 고르는 사이, 아레아가 냉큼 답했다.
“그건 작전이었어요. 헬무트도 모르고 있었어요.”
“작전이라……?”
대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리노사의 명운이 걸린 일이다. 그런데 어찌 멋대로 작전을 세우고 행하는가.”
“하겠다고 하면 말렸을 테지요. 그리고 성공하든 실패하든, 리노사와 무관한 사건이 되어 버릴 테니까요.”
“저 마물과 함께 신전을 습격하기라도 한 거냐?”
“정확히는, 습격한 건 엘라가뿐이지만요. 전 그냥 그를 옮겨 주고 데려왔을 뿐이에요.”
아레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엘라가의 존재를 감췄는지는, 대공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대공은 온전히 헬무트의 편이 아니었고, 강력한 마물을 부린다는 것은 헬무트가 어둠의 싹 보유자란 사실을 부각할 수 있기에.
이제까지 위험 요소를 헬무트의 ‘어둠의 싹’ 하나라고 여겼던 대공으로선 속은 느낌일 테지만.
최후의 순간이 아니면, 마물은 전력이 될 수 없다.
리노사는 신전에 검을 겨누었지만, 그럴 만한 명분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타락하고 부패한 신전이 먼저 트집을 잡아 리노사를 침략했기 때문에.
마물을 부려 내세운다면, 그것은 신전이 말한 것처럼 사악한 군대가 되어 버리는 꼴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었다니. 알았다면 대공은 허락지 않았으리라.
뒤에서 신전의 본진을 쳐서 그들을 퇴각시키는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해도.
대공은 아레아의 선택을 이해했다.
그러나 리노사의 군주의 뜻과 반하여 그녀의 선택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과거였다. 신전을 패퇴시킨 이 시점에서, 돌이킬 수 없게 그들은 한배를 탔다.
침몰하지 않는 한 목적지까지 이 배에서 내릴 수 없다.
또한, 대공이 헬무트를 탓할 입장은 못 되었다.
잠시 눈을 감은 대공은 제 안에서 정리를 마쳤다.
“헬무트.”
곧 대공이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예.”
“또 숨기는 게 있는 거냐?”
헬무트는 잠시 고민해 보았다.
하도 숨기는 데 익숙한 삶이라, 또 자신이 말하지 않은 중요한 게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만 했다.
“글쎄요, 딱히? 블랙호크와 연이 있다는 것 정도.”
“그렇다면 되었다.”
한시름 놓았다 싶더니, 새로운 근심이 닥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 근심은,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마법사 안티올은 언제쯤 결계가 무너질 시기를 산출해 낼 수 있지?”
하이케가 답했다.
“사흘이면 될 겁니다.”
“이 사실을, 먼저 타국에 알려야겠군.”
대공의 눈빛에 냉철함이 깃들었다. 그의 머리는 사태에 대처할 방법을 빠르게 모색하고 있었다.
리노사 홀로 막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이는 파헤의 숲과 국경을 가까이 하고 있는 국가들에 가장 와 닿는 문제이리라.
결계가 무너진다면 파헤의 숲에서 뛰쳐나온 마물들이 가장 가까이 있는 인간들부터 닥치는 대로 잡아먹을 테니까.
감각이 예민한 놈들은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인간이란 종을 말살시켜 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인간뿐만 아니라 파헤의 숲과는 달리 마기를 갖지 못해 약해 빠진 동식물. 그 모든 것을.
“마법사 협회에는 이미 전달이 되었을 겁니다. 그들을 공증 삼으시면 될 거예요. 신전의 공적인 저는, 내놓고 나설 수 없으니까요.”
단지, 대마법사인 하이케는 이런 사태에 있어서 중요한 전력이다.
그녀의 조력을 신전조차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몰랐다.
“사실을 알아 온 그대의 노고에 감사하오.”
대공은 치하의 말을 던졌다.
다행히 신전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제국과 바소르. 가장 군사력이 강한 두 나라와는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하이케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신전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겠지요. 그들만으로 틀어막을 문제는 아닐 테니까요.”
대공이 말을 받았다.
“그들이 타국에 도움을 구하는 상황이 만들어질지도 모르겠군.”
바로 엊그제 전쟁을 치른 사이가 아니던가. 퍽 기이한 구도가 되어 버릴 거다.
엘라가가 중얼거렸다.
[누군 죽을 고비를 거쳐 신성 결계를 넘었는데, 녀석들은 날로 넘겠네.]“죽을 고비는 내가 거쳤지.”
이그렐이 코웃음 쳤다. 고소 공포증을 겪던 엘라가는 별 도움이 못 되지 않았던가.
[뭐, 어쨌든 마물에 대해서는 사실 걱정할 게 없을지도 몰라.]엘라가가 태연하게 말했다. 인간들과 달리, 그는 마물에 대해 조금의 걱정도 없었다.
어차피 제가 앞발로 툭 치면 날아가는 나약한 놈들 아닌가.
“파헤의 숲에서도 빌빌 기던 녀석들이 새삼 우리에게 덤벼들…….”
말하던 이그렐이 머뭇거렸다.
“멍청한 녀석들이고 인간 고기가 널려 있으니 참지 못하고 덤벼들지도 모르겠네.”
게다가 파헤의 숲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만약 그 느낌대로라면, 신성 결계가 풀리고 난 뒤, 뛰쳐나온 마물들은 그들이 통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파헤의 숲에 남아 있는 두 마리의 영역 지배자.
바하렉과 칸트라는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한 번 더 파헤의 숲에 가 봐야겠어.”
이그렐이 내뱉자, 엘라가가 호응했다.
[그래, 나도.]“……그거 나를 타고 가겠다는 소리는 아니지?”
[왜 아니겠어?]“누구 마음대로!”
아옹다옹하는 그들 사이로 아레아가 끼어들었다.
“이럴 게 아니라, 저와 헬무트와 함께 가는 게 좋겠어요. 시안도.”
직접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터였다.
대충 각자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닥이 잡혔다.
모두가 자리를 파하여 방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나가려던 엘라가가 난데없이 대공을 돌아봤다.
[네가 헬무트의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아비로구나.]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었던 대공은 갑자기 날아온 말에 움찔했다.
제국의 황제라 한들 리노사 대공을 이처럼 노골적으로 비난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상대는 마물이었다. 그것도 홀로 신전을 쳐부술 만큼 강력한 마물.
“……그렇소만.”
[네가 버린 자식을 내가 주워다 길렀다.]“고맙소.”
어쩐지 영혼 없게 들리는 소리였다.
[내가 잘 길러 놨더니 날로 가로챌 셈이냐?]“양육비를 원한다면 주겠소.”
대공은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자신의 상황이 낯선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엘라가가 꼬리를 세웠다.
[마물이 돈을 어디다 써?]“이미 성에서 무전취식하고 있지 않소. 헬무트에게 손님이 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건만.”
그것도 반드시 알려야 할 종류의 손님이다.
대공은 떨쳐 내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듯 빠르게 내뱉었다.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이 뭐요.”
참으로 직설적이다. 하지만 일리 있는 경고기도 했다.
대공은 잠시 후, 언짢은 듯이 답했다.
“그러시오. 하지만 단언컨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요.”
[그럼 잘됐고.]시원하게 할 말 다 한 뒤, 방을 나서는 엘라가의 뒤통수에 대고 대공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리고 고맙다고 말한 것은, 진심이었소.”
엘라가는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