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47
446
헬무트
446화
헬무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숙명을 받아들였다. 힘을 가진 자에게는 의무가 따른다.
특히나 그 힘을 가지게 된 근간에 어둠이 있을 때는.
그것이 그의 원죄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쩔 수 없이 타고난 죄.
세상에 배척당했을지라도 자신을 버린 그 세상을 지키기 위하여 헬무트는 최전선에서 싸워야 할 것이다.
그저 강하다는 이유로.
그러나 세상이 그를 버렸어도,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준 이들이 있었다.
파헤의 숲이 봉인에서 풀려나는 순간, 위험에 처하는 것이 세상이라면 그 세상에 있는 이들도 위험에 처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게 헬무트가 싸워야 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함께할 동료들도 있었다. 가장 든든한 건, 역시 이 아레아다.
“제국에서 어떻게 이야기가 될지 궁금하네. 그쪽의 결과에 따라서 우리도 제국으로 출발해야 할 거야.”
대공이 어련히 잘 이야기하겠느냐만은, 헬무트가 보기에 대공은 협상가라 하기에는 강직했다.
하지만 그는 희망적으로 답했다.
“신전으로선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테지.”
그들은 자신들을 패퇴시킴으로써 전력을 입증해 보인 리노사도 끌어들이고 싶을 거다.
마왕이란 단어 앞에 절박해질 신전을 고대하는 수밖에.
헬무트가 아레아를 빤히 쳐다봤다.
알 수 없는 빛이 깃든 눈빛이었다.
“왜?”
“……로제타의 뿌리, 내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헬무트는 그것이 마물에게 각성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에게도, 이그렐과 같은 현상이 일어날지 모르니, 그게 필요할 수 있다고.
아레아의 마법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마왕의 지배력을 경계하는 것이다.
아레아도 자신의 마법이 어둠의 싹을 완전히 봉인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마법은 애초에 마왕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를 고려치 않고 만들어졌기에.
아레아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있어서 나쁠 건 없지. 안 그래도 챙겨 뒀어. 내가 환으로 만들어서 줄게.”
“나는 이미…… 파헤의 숲에서 폭주한 적이 있어.”
헬무트는 담담하게 토로했다. 아레아도 이미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다.
“아무리 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배신을 견뎌 내기는 쉽지 않지. 게다가 너는, 배신당하면 네가 죽을 걸 알면서도 믿었잖아.”
그 믿음은 애정 위에 세워졌다.
믿음의 모래성이 무너져 내리고 애정은 흩어져 과거의 것으로 남았지만, 애정이 남긴 상처는 그의 안에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깊숙이 인이 박힌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저 흐려지기만 할 뿐.
마왕이 그 흐려진 상처를 생생하고도 적나라하게, 그의 심장 속에서 되살린다면.
어둠의 싹에게 한때 그것이 헬무트를 어떻게 지배했는지 일깨워 준다면.
육체적으로 싸워서 지지 않을 상대라도, 내부로부터 공격해 오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한 번이라도 내가 무너졌다는 게 문제야.”
그때의 헬무트와 지금의 헬무트는 다르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인간이었다. 한 번 무너져 보았기에, 다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레아는 부드러운 어조로 답했다.
“너를 무너트릴 수 있다면 그건 나겠지. 하지만 나는 널 배신하지 않아.”
“네가 배신할 거라 생각한 적 없어. 하지만 만약 네가 다친다면?”
배신 못지않게 소중한 것에 대한 상실은 깊은 타격을 준다.
아레아는 전투 경험이 적은 것치고는, 싸움에 능숙한 마법사였다.
하지만 파헤의 숲의 마물들을 상대로 하는 것은 대마법사조차도 쉽지 않으리라.
또한 헬무트에게도.
검성의 경지에 이르고도, 누군가를 지킬 만큼 강하다 장담할 수 없더니,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세상을 구하는 전쟁이라도 그녀를 잃고 이긴다면 의미가 없다.
아레아는 헬무트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신비로운 이채를 띤 보랏빛 눈동자.
“내가 안전한 곳에 있길 바라?”
“그래.”
“그거 우연이네. 나도 그렇거든.”
아레아가 환히 웃었다.
“네 말대로 넌 폭주할지 모르니 안전한 데 가둬 두고 나 혼자 싸우고 싶어. 누군가는 싸워야 할 테고, 난 싸울 수 있을 만큼 강하니까.”
위기이기만, 그녀에게는 기회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이제까지 쌓아 올린 마법의 결과물들을 모조리 쏟아 낼, 흔치 않은 기회.
이 상황을 가장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 그녀였다.
“아레아.”
“그런데, 나도 원하는 대로 할 수는 없지. 그러니.”
아레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함께 싸우자. 나는 죽지 않고, 너도 죽지 않을 거고, 우리는 이길 거야.”
마법사에게는 마물에게 있는 본능이나 검사의 육감 같은 건 없다.
그저 무수한 변수 속에서 낳아진 결과만이 존재할 뿐.
아레아가 아는 해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헬무트도, 그런 것 같았다.
“내가 틀렸어.”
“뭐가?”
헬무트는 순순히 실토했다.
“은연중에 널 지켜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봐.”
과거에 그랬던 적이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신전의 병력과 맞서 싸웠던 그 전투에서.
아레아는 무력하게 의식을 잃고 있었고, 헬무트는 정체를 드러낼 위험을 무릅쓰고서 싸웠다.
“그것도 우연이네.”
아레아는 소리 내어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녀는 배신당해 파헤의 숲에 갇힌 공주님을 구한 용사가 된 기분이었다며 덧붙였다.
헬무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난 왕자야.”
대공왕의 자식이니 따지고 보면 그렇다.
아레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봤다.
“그거 농담이라고 한 말이야?”
“농담 아냐.”
당당히 말하는 그에게, 아레아는 주저 없이 면박을 주었다.
“차라리 농담인 게 나을 뻔했어.”
“…….”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지킬 거야. 어느 한쪽이 지켜 준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돼.”
둘 다 주도적이고, 자신의 강함에 자부심이 있다.
평생을 스스로 책임져 왔기에 자연스럽게 상대를 등 뒤에 놓으려 한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 없었다. 나란히 싸우는 방법도 있으니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헬무트는 중얼거렸다.
사실 그는 나란히 서는 것보다 지켜 주는 게 좋았다. 그런 의미로 마초적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의 곁에 있는 게 아레아인 것을.
그 역시도 그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대공으로부터의 전갈이 도착했다.
제국으로의 호출이었다.
* * *
“어떻게 리노사 대공이 이 자리에 있습니까.”
대신관 로믈로가 분노를 떠올렸다.
신전이 입은 손실을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이 자리를 파하고 싶었다.
“저들은 어둠의 힘에 굴복한 자들입니다! 이번 사태에 대해 함께 논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대신관은 말을 삼가십시오. 패자답게 꼬리를 내려야 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샤를로트가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가져가며 싸늘하게 일갈했다.
날이 갈수록 패기가 늘어 가는 그녀였다.
멀찍이서 그녀의 모습을 본 아스카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황태자도 움찔거린 건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차분하게 회담을 이끌었다.
“비록 각자가 회담을 청하였으나, 어느 하나 미룰 수 없이 사태가 위급하다고 보아 함께 경청키로 했습니다. 양측 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닙니까.”
“비슷한 이야기라니요?”
대신관 레비나가 물었다.
그녀 역시도, 오랜 세월 믿음직한 동료로서 지내 온 대신관 아가토를 잃고, 그를 살해한 자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속이 말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저들을 공격하고 싶건만.
그러나 이곳은 제국이고, 제국은 리노사에게 기울어 있다.
당면한 위기 때문에라도, 지금은 참아야 했다. 제국의 협조를 구해야 했기에.
‘또한 저들의 도움 역시도…….’
치욕적으로 느껴지는 현실 속에서 레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황태자가 말을 이었다.
“리노사에서도 신성 결계에서 일어나는 이변에 대해서 논의코자 한다고 했습니다.”
“신전이 태만하여, 최근까지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것도 알고 있소.”
리노사 대공의 말이 나직이 신전 측을 직격했다.
신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레비나는 노기를 띤 얼굴로 소리쳤다.
“당신의 후계자라는 자가, 신성 결계의 붕괴를 초래했습니다. 그 때문에 인간 세상은 위험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태만했다면, 원흉은 당신들 쪽에 있어요!”
“원흉은 바소르에 술수를 써 검성을 파헤의 숲에 보낸 그쪽이겠지요. 검성이 헬무트에게 검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그는 파헤의 숲을 나오지 못했을 테니까.”
샤를로트가 차갑게 지적했다.
늘 정중하고 예의 바른 그녀가 그토록 공격적으로 나오는 것도 색다른 모습이었다.
말다툼이 격앙되기 전에, 황태자가 그들을 중재시켰다.
“지금은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대비를 해야 할 때이지요. 그걸 논의하고자 모인 것이 아닙니까.”
대신관 레비나는 가까스로 분노를 억눌렀다.
신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자들이라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물며 대신관인 그녀로서는, 고귀한 루멘의 대리자로 살아오면서 이 같은 비난을 받아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이미 저쪽으로부터도 들었다 하니, 본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성 결계는 두 달 내로 붕괴될 겁니다. 그러면 최소한 파헤의 숲에 존재하는 마물들이 모조리 인간 세상을 향해 쏟아져 나올 겁니다.”
황태자가 반문했다.
“최소한이라는 건?”
“거기서 그치면 좋겠지만, 만약 마왕이 부활한다면.”
잠시 멈추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레비나가 말을 이었다.
“마물은 그 하나하나가 맹수와 같아, 원래대로라면 잘 뭉치지 않으나 예외가 있지요. 마성을 가진 강력한 마물의 지배를 받을 때. 마왕의 지배는 그보다 더 강력합니다. 마물들은 본능마저 제압당한 채 꼭두각시처럼 충실하게, 몸이 산산조각 나 숨이 끊기는 순간까지 마왕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마기를 가진 모든 존재에게 마왕이 미치는 영향력은, 루멘의 신도들에게 루멘이 미치는 영향력 못지않았다.
“마왕의 지배를 받는다면 그들은 뭉쳐 군대를 이룹니다. 천 년 전에도 그리했듯이.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인간의 전략을 구사하는 마물과 싸우게 될 겁니다.”
샤를로트가 물었다.
“마왕은 인간이 아닌데 어째서지요?”
“마왕은 배우고 학습하는 이지와 마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이미 인간과 싸워 보았기에. 천 년 전에도 그랬었으니까요.”
레비나는 무겁게 내뱉었다. 그녀의 눈빛에 숨길 수 없이 피어오른 감정은, 절망에 가까운 막막함이었다.
또한 두려움이었다. 너무나 강한 적을 맞상대하고 있기에.
“이것이 신전에서 간직하고 있던, 천 년 전 마왕 전쟁의 기억입니다.”
그녀가 품에서 수정구를 꺼내어 들어 보였다.
이미 그것을, 그녀는 낱낱이 들여다본 후였다.
한없이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황태자가 말했다.
“우리에게도 보여 주시지요.”
그리고 수정구에 기록된 천 년 전의 기억이 끌어 올려져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