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5
44
헬무트
44화
3장 여행과 사건, 그리고 만남
발단은 거기서부터였다.
페이스 용병단과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났을 무렵, 헬무트는 어떤 마을에 들렸다.
돈도 충분하겠다 노숙 생활을 접고 여관에서 편히 쉴 참이었다. 침구가 딱딱한 편이라도 헬무트의 예전 잠자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편안했다.
음식과 함께 헬무트가 인간 세상에서 즐기는 몇 안 되는 호사였다.
헬무트는 저녁을 먹으러 여관 식당에 들어섰다. 어쩐지 식당에 사람이 별로 없다 싶더니, 한쪽에 유독 험악하게 생긴 남자 여섯 명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용병인가?’
그건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검을 다루는 자들이다. 발달한 근육과 물집 잡힌 손아귀, 허리에 찬 검.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고 있는 그들은 척 보기에도 거친 부류로 보였다.
헬무트는 신경을 끊고 메뉴판을 바라봤다. 어차피 메뉴를 봐도 모른다. 추천 메뉴라고 쓰여 있는 걸 지목하고 맥주를 하나 주문했다.
종업원도 저쪽 테이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낀 듯 눈치를 보며 음식을 내왔다.
헬무트는 검을 끄집어내 닦았다. 명검은 쉽게 상하지 않지만, 꾸준히 관리해 줘야 한다.
다리언이 매일 이 검을 닦고 있던 게 기억이 나서 대장간에서 기름 먹인 천도 샀다.
하지만 그 모습이 저쪽에 있는 자들의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저들끼리 뭔가를 지껄이며 웃던 그들 중 두 명이 헬무트에게 다가왔다.
“거기 꼬마, 좋은 검을 가지고 있는데?”
“한 번 이리 내 봐.”
“싫은데.”
딱 부러지는 거절이었다. 두 남자의 얼굴이 동시에 시뻘겋게 변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은 한 명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찍었다.
쾅! 지진이 난 듯 나무 테이블이 삐거덕거렸다.
“이 새끼가, 말귀 못 알아듣냐?”
“내놓으란 소리가 안 들려?”
‘이게 시비라는 거군.’
불필요한 무력 과시다. 겁준다고 해 봤자 자신은 겁먹지 않으니까. 무표정한 얼굴의 헬무트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싫다고 말했는데, 귀가 막혔나?”
“아니, 이 새끼가 근데!”
험악한 손아귀가 헬무트의 멱살을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뭔가에 손목이 턱 붙들렸다. 헬무트가 손목을 붙잡아 가볍게 제지한 것이다.
“하! 이게.”
남자는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자 안색이 바뀌었다. 그는 근육이 부풀 만큼 잔뜩 힘을 줬다.
하지만 그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꼭 바위 사이에 낀 것처럼.
‘이, 이게 무슨!’
상황이 이상하단 걸 감지한 다른 남자가 헬무트에게 주먹을 날렸다.
“이 새끼, 그 손 안 놔?”
무심코 검을 뽑아 들려던 헬무트는 찰나에 멈칫했다.
‘마을에서 살인하면 안 되는 거겠지?’
그랬다간 골치 아파질 수 있다. 용병 증서로 신분이 보증되긴 하지만 그게 살인까지 넘겨 주는 건 아니니까.
헬무트는 움켜쥔 손목을 옆으로 힘껏 끌어당겼다. 손을 놓자 바로 균형이 무너진 남자의 몸뚱이가 동료의 주먹을 받아 냈다.
퍽! 옆 테이블 위로 비틀거리며 쓰러진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어딜 때리는 거야? 아프잖아!”
“아니, 난 저 새끼한테 휘두른…….”
남자 한 명이 얼버무리면서 헬무트 쪽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에게 차마 덤벼들지 못했다.
저쪽에서도 뭔가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는지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헬무트는 시선을 움직여 그쪽과 이쪽, 한 패거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자들을 향해 내뱉었다.
“꺼져.”
검은 눈이 새카맣게 번뜩였다. 비스를 담은 살기가 일순, 강렬하게 폭사되었다.
살아 있는 존재라면 본능적으로 그 눈빛을 보고 공포심을 느끼리라.
주춤거리며 물러난 남자들이 제 동료들 쪽으로 후닥닥 달아났다. 나머지 네 명 모두 허리춤에 있는 검에 손을 가져간 상태. 하지만 섣불리 달려들 수 없는 분위기였다.
헬무트는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건 아랑곳하지 않고 다 닦은 검을 허리춤에 그대로 채워 넣었다.
‘주문이 늦는데.’
시선을 드니 저 한구석에 맥주잔을 든 채 얼어 있는 종업원이 보였다.
“음식은?”
허겁지겁 달려온 종업원이 얼른 맥주잔을 그의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고, 곧 나옵니다.”
당장 시비 걸 생각은 없어 보인다. 헬무트는 험상궂은 남자들 쪽을 훑어보고 시선을 거두었다. 느긋하게 식사를 즐길 셈이었다.
*
세상엔 어딜 가나 무력을 과시하는 불량한 집단이 있기 마련이다. 치안이 소홀해지는 외곽 지역일수록 그런 자들이 기승을 부렸다.
두 배다른 왕자가 계승권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키넨 왕국의 정세는 혼란했다. 그 때문에 이런 곳까지는 치안의 신경이 미치지 못했다.
용병 길드에 정식으로 등재된 적은 없지만, 검깨나 쓰는 자들. 남을 약탈해서 먹고 사는 하급 잡배들. 그들은 도적이나 암흑 조직, 혹은 귀족들이나 상회와도 비밀리에 연결되어 있어서, 골치 아픈 자들이었다.
그들은 정식 용병을 고용할 입장이 안되는 상인이나 작은 마을을 수탈하며 제 잇속을 채웠다.
그런 그들도 웬만하면 정식 용병에게는 시비를 걸지 않았다. 용병 길드나 용병단을 상대하게 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가 열네 살 소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허름한 옷차림과 대조되는 좋은 검. 단련된 체구도 아닌, 귀족가의 자제로 보이는 곱상한 외모.
피부가 거칠고 엉망인 용병들과 달리 눈처럼 새하얀 얼굴을 가진 소년이라면 어수룩한 귀족 도련님이 분장하고 나돌아다니는 거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었다.
헬무트가 방으로 사라진 뒤 애꿎은 종업원은 거친 손님들에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하고 있었다.
“그 새끼가 정말 용병이 맞아?”
“네, 네 확실해요. 방을 얻을 때 용병 증서를 보여 줬다니까요.”
“3급 용병이라고?”
“네, 네.”
이런 시골 여관에 있는 종업원이 용병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종업원은 헬무트가 ‘페이스 용병단’ 소속이라는 것까진 눈여겨보지 못했다.
그걸 기억했다면 상황이 좀 달랐을 것이다. 평판 높은 용병단은 그 용병단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평범한 3급 용병이 아님을 증명하니까.
“시발, 3급 용병이면 뭐 어때! 애새끼 한 놈인데.”
“그 새끼, 눈빛이 살벌하던데?”
“그 눈빛도 지금은 훅 갔을 거야. 그 새끼 맥주도 다섯 잔이나 마셨잖아.”
“취기가 올라와서 알딸딸하고 눈이 감길 때지.”
“그래, 조금 있으면 푹 잠들겠지.”
“눈도 못 뜰걸?”
여섯 명의 남자들 사이에 의미심장한 시선이 오갔다. 질 낮은 자들일수록 더욱 나쁜 짓에 끈질기기 마련이었다.
이대로 물러나는 굴욕을 감수할 생각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잘난 듯이 이쪽을 노려보던 얼굴을 발아래 무릎 꿇려야 시원할 것 같다.
가진 걸 탈탈 털어서 엉엉 울며 도망치게 해야 속이 후련해질 것이다.
한 남자가 종업원한테 손짓했다.
“야, 인마, 여분의 키는 있지? 가져와.”
“그, 그건.”
손님의 방을 알려 주는 것도 모자라 열쇠를 건네는 건 엄연히 안될 일이다.
하지만 돌덩이만 한 주먹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걸 보자 저항할 마음이 싹 사라진다.
“이 새끼가? 싸게싸게 안 움직여?”
“코딱지만 한 여관에서 일하는 주제에 인생 한번 고달파지고 싶냐?”
먼 법보다는 가까운 주먹이 더 무서운 법. 결국 종업원은 겁에 질린 얼굴로 열쇠를 가져와 내밀었다.
두어 시간 후, 사내들은 움직였다. 종업원을 앞세워 소리를 죽이고 계단을 걸어 올라가 문 앞에 섰다. 소리를 죽인 채로 종업원을 겁박했다.
“빨리 문 열어! 이 새끼야.”
혹시 안에서 눈치채면 종업원을 방패막이로 삼을 셈이었다. 울상이 된 종업원은 열쇠로 문을 땄다.
달칵. 미세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커튼이 내려진 방안은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컴컴했다.
종업원은 후닥닥 뒤로 빠졌다. 한 남자가 도망치려는 종업원 뒷덜미를 붙잡았다.
“어딜 가, 넌 여기 가만히 있어!”
사람을 불러오면 곤란해진다. 그 사이 나머지는 일렬로 좁은 방안에 몸을 밀어 넣고 있었다.
몽둥이를 든 선두의 남자가 다짜고짜 가차 없이 침대를 내리찍었다. 퍽! 어디든 제대로 맞으면 뼈가 나갈 강도였다.
“아니?”
감촉이 이상했다. 이불 덮인 빈 침대를 가격한 듯한 감각.
그때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덜컹. 열린 문으로 새어들던 불빛도 사라져 완벽한 암흑이 내려앉았다.
다섯 명의 남자는 그렇게 좁은 방안에 고립되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이 새끼 어딨어!”
“이 쥐새끼 같은 놈! 어서 잡아!”
남자들은 어둠 속에서 마구잡이로 손을 내저으며 외쳤다. 하지만 그 손에 걸리는 건 서로의 몸뚱이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작은 신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딱! 딱! 따닥! 쇠막대기에 후려 맞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사내들의 몸 구석구석을 가격했다.
명치를 찔러 드는 통증에 침을 토하며 몸을 수그린다. 맞은 다리에선 부러지는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남자들은 누가 자신을 치는 건지도 모르는 채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저으며 비명을 질렀다.
“으악! 어디야!”
“창문을 열어!”
누군가 커튼을 걷고 바깥의 빛으로 시야를 확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빨리, 그는 뭔가를 봤다.
어둠 속에서 섬광을 본 것 같았다. 암흑을 집어삼키는 듯한 새카만 동공에 비친 살의.
와장창! 커튼과 함께 창문을 넘은 몸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바닥과 육신이 맞닿는 묵직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쿵! 족히 뼈 한 군데 이상 부러졌을 것이다.
깨부숴진 창 너머로 바깥의 불빛이 새어 들어오며 방안의 풍경을 비췄다. 혼절하거나 쓰러져 신음을 흘리는 이들로 온통 쑥대밭이었다.
헬무트는 그 광경을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으윽.”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긁는 팔목을 헬무트가 발로 콱 짓밟았다.
신음은 바로 비명으로 변해 고막을 때렸다. 소리를 지르는 턱을 걷어차자 곧 잠잠해졌다.
헬무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푹신한 침구가 마음에 들어, 오래간만에 편히 쉬려는 차에 들이닥친 불청객.
어떻게 대우해 줘야 할까?
답은 빠르게 나왔다. 검을 뽑아 들 상대조차도 아니었다.
어둠에 친숙한 헬무트에겐 그들의 움직임이 낱낱이 눈에 들어왔다. 살의를 제어하며 검집으로 두들겨 팬 건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깨어 있는 놈을 기절할 때까지 고통스럽게 만들어 주고 밖으로 나오자 하얗게 질린 종업원이 방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그가 헬무트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소, 손님 도망가세요!”
헬무트는 한쪽 눈썹을 들며 물었다.
“내가 왜 도망가.”
이렇게 약해빠진 녀석들 상대로, 도망쳐야 할 이유가 있나?
“저 사람들, 블랙 호크 소속이에요. 절 붙잡고 있던 사람이 도망갔으니 분명히 동료들을 끌고 올 거라고요! 빨리 마을을 떠나야 돼요!”
헬무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블랙 호크가 뭔데.”
“그, 그 암흑가를 주름잡는다는 도적 집단이요! 저자들도 거기 소속이에요. 자기들 패거리를 이끌고 보복하러 올 거라고요!”
“…….”
헬무트는 잠시 생각했다. 그 패거리를 해치우면 점점 더 위에 있는 사람들이 올까? 점점 더 강한 자들이 오게 되는 걸까.
‘그건 좀 흥미로운데.’
“엄청나게 집요한 자들이에요!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우, 우리 여관이 쑥대밭이.”
결국 본심을 토로한 종업원이 머리를 싸맸다. 도적 패거리가 여관으로 쳐들어오는 상황을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여관에서 일하는 자신이 왜 이런 수난을 당해야 하는가.
남자들이 나타난 직후 그에게 여관을 맡긴다며 슥 사라진 주인이 원망스러웠다.
‘귀찮아지겠군.’
사실 여관이 어떻게 되건 상관없었지만, 헬무트는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추적당하는 게 위협이 되어서가 아니다. 단지 이런 일로 주목받는 게 곤란할 뿐. 갈 곳이 있기도 하니까.
“좋아, 떠나지.”
헬무트는 방 한쪽으로 가서 주섬주섬 짐을 챙겨 들었다. 그는 쓰러진 자들을 지목하며 말했다.
“여관비는 저자들 앞으로 달아둬.”
편안한 하룻밤이 날아갔다. 헬무트는 그것으로 남자들을 제 방까지 안내한 종업원의 잘못을 관대하게 눈감아주기로 했다.
강자의 협박에 굴종하는 건 약자의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