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50
449
헬무트
449화
헬무트 일행은 회담이 끝난 후, 제국으로 출발했다.
대공이 전갈을 보낸 직후, 샤를로트가 그들에게 회담의 결과에 대해서 간략하게 전달했다.
“순조롭게……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신전의 협조하에 우리는 이번 일의 대책을 논의할 겁니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회담에서요.”
샤를로트의 미묘한 뉘앙스로부터 과정이 그리 평탄치는 않았다는 게 읽혔다.
어쨌든 일시적인 동맹은 성립되었다.
원수처럼 싸웠던 사이니 불편하겠지만, 그들은 하나로써 마왕에게 대응해야 했다.
세계의 명운이 걸린 일에 예외는 없다.
그들은 이제부터 운명 공동체였다.
제국은 그 구심점이자 중재자 역할을 할 것이다.
그 소규모의 회담이 종료된 직후, 각국으로 바로 사절이 출발했다.
신전 역시도 각지의 신전을 통해 일련의 사태를 알리고 회담을 위한 준비를 돕기로 했다.
두 달. 세계를 멸할 만한 힘을 가진 존재에 대처하기에는 촉박한 시간이었다.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헬무트 일행은 라토나에서 제도로 향하는 이동 마법진을 이용했다.
이동 마법진으로부터 황궁까지는 마차로 이동한다.
황실에서 보내 준 특별 마차에 올라탄 헬무트는 문득 거리를 쳐다보았다.
오후였다.
풍요롭고 번화한 거리는 적당히 북적였다.
창 너머로 헬무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평화라는 단어와 지극히 가까워, 위험도 위협도 모르고 살아가는 제도의 사람들.
헬무트가 겪었던 처절한 삶과는 완전히 괴리된 일상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일상도, 신성 결계의 봉인이 풀리면 박살 나리라.
파헤의 걸신들린 마물들이 이곳 제도까지 닥치는 데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을 것이다.
그 전에, 수많은 크고 작은 마을의 인간들을 몰살하면서.
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인간은 발전했으나 마왕에 대응하는 데는 오히려 무뎌졌다.
현실에서의 작고 큰 위협을 두고 전설 속의 존재를 의식하며 살아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마왕을 향해 그간 칼을 갈고 닦은 것은 오로지 신전뿐이었다.
하지만 루멘으로부터 힘을 받는 그들은, 당연히도 한계가 있었다.
아레아는 신성 결계가 붕괴하면, 루멘의 의지가 흩어져 신성력의 수급이 더뎌지리라 예상했다.
“성기사들은 신성력의 회복 방식이 비스와 유사하여 상대적으로 쓸 만하겠지만, 신관들은 사실상 마력의 회복이 더딘 마법사나 다름없어서 한계가 있을 거야.”
“괜찮아, 대신해서 내가 있으니.”
시안은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이미 리노사 인근에 시험 삼아 로제타 밭 하나를 만들어 놓은 터였다.
몸집이 큰 엘라가에게 열흘의 시간을 줘도, 혼자 먹다간 위장이 터질 만큼 많은 로제타를 획득했다.
아레아는 그를 불쾌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말하기도 싫다는 태도다.
하지만 시안은 아레아를 약 올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연약한 아레아는 뒤에 있어. 이 차석이 앞장서서 싸울 테니까.”
이제는 제가 더 강하다고 하는 소리다. 아레아의 눈치를 본 헬무트가 슬쩍 나섰다.
“그렇다면 나도 뒤에 있지. 잘됐네.”
“헬무트, 넌 좀 끼지 마. 나도 좀 거들먹거려 보자. 쟤는 맨날 그러고 살았잖아.”
아레아한테 맺힌 게 있었는지, 시안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아레아로부터 싸늘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말해 두겠지만, 천 년 전에도 대지의 정령은 앞장서서 싸웠어. 천 년 전에 비해서 전력이 더해지진 않았을 거야. 그런데 거기서 함께 싸웠던 루멘의 힘만 약화된 상태라는 거지.”
시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신해서 마법사들이 있잖아?”
“그래, 마법사들.”
아레아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분명히 자신도 중요한 전력이라는 것처럼.
“그리고 분명히 말해 두지만 난 널 특별히 무시한 적이 없어. 네가 나한테 자격지심을 가졌던 거지. 그리고 지금, 예상치 못하게 힘이 생겼다고 해서 졸렬한 방식으로 표출하고 있지.”
사실이다. 아레아는 모두를 무시했지, 시안을 특별 대우하여 무시한 게 아니었다.
과감한 어휘 선택에 시안이 말을 더듬었다.
“조, 졸렬…….”
아레아가 차가운 미소와 함께 치명타를 날렸다.
“그래서 네가 학창 시절에 인기가 없었던 거야. 너처럼 소심한 녀석을 누가 좋아하겠어?”
연타로 얻어맞은 시안이 입만 뻥긋거렸다.
헬무트는 이 공격으로 아레아 역시도 소심하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에야 시안이 이를 갈며 내뱉었다.
“너, 이……! 아레아, 정말 못됐어, 넌!”
“알았으면 그만 시비 걸어.”
아레아의 일침을 마지막으로 살벌한 침묵이 마차 안에 내려앉았다.
시안은 씨근거리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헬무트는 마차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어쨌거나 결론이 났으니 또 붙진 않을 터였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아레아 성질을 알면서 적당히 했어야지.’
시안의 잘못이다. 헬무트는 간단히 결론 내렸다.
마차 안에서 무슨 대화가 이뤄지건 관심 없는 듯 창밖을 구경하고 있던 엘라가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야, 그런데 신전 놈들이 나 알아보는 거 아니야?]이그렐은 몸에 난 상처와 손상된 깃털을 회복할 때까지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없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해 있으면, 본신은 그대로 정체되어 회복이 멎는다.
그렇기에 이그렐은 하이케를 따라 그녀의 은신처로 향했다.
하지만 엘라가는 고양이 모습으로 여기까지 함께 왔다.
“가까이 가면 대신관은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아레아가 답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요? 그들도 짐작은 하고 있을 텐데.”
딱 신전이 빈 시기에 마물이 쳐들어왔다면, 리노사와 관계가 있을 거라고 연결 짓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내가 걔들 집을 부쉈잖아. 날 보면 열 받아서 회담이고 뭐고 파투 내는 거 아니야?]“손상은 복구하면 그만이지만,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죠. 사람은 죽이지 않으셨잖아요.”
아마도. 아레아가 뒤를 따르면서 지켜본 바로는, 엘라가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들을 후려쳐서 쓰러트리고 바로 자리를 떴다.
죽지 않을 만큼의, 그러나 전투 불능이 될 정도의 타격이었다.
엘라가가 의도적으로 봐준 게 아니라 습관이었다.
그는 이미 어린 헬무트를 비롯하여 인간들을 돌봐 준 적이 있기에.
자연스레 인간을 상대할 때는 몸에 힘을 빼게 되는 것이다.
그의 자비가 신전과 손을 잡게 된 지금, 좋은 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컸다.
엘라가가 아무리 마물이라 한들 원수와는 타협할 수 없어도 적과는 타협할 수 있는 법이니.
엘라가가 투덜거렸다.
[인간들은 너무 약해.]그 약한 인간들을, 신전 것들이라고 해서 마구 죽일 수는 없었다.
그건 동물을 좋아하는 인간이 동물을 학대할 수는 없는 것과 비슷한 심리였다.
엘라가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애완동물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헬무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들은 이미 엘라가의 힘을 봤어. 정체를 알아본대도, 어쩔 수 없겠지.”
당장 대신관 전원을 동원한다고 해도, 엘라가를 상대할 수 없을 터.
그런 엘라가가 적극적으로 돕는다고 하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아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도 회담이 얼마간 진행된 후에 밝히는 게 좋을 거야. 그들에게 우리의 발견에 대해서도 알려 줘야지.”
로제타의 뿌리.
마기로부터 각성 효과가 있는 그것. 마물에게는 효력이 입증되었지만, 인간에게도 그만한 효능이 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가공을 거쳐서 수면제로 쓰이는 것이지만, 가공을 거치지 않은 날것으로는 각성 효과가 있다는 것.”
“특히 마기로부터 말이지.”
헬무트가 아레아의 말을 받았다.
“마법사들은 때때로 유혹에 휘둘리지. 마력은 마기와 다른 힘이지만, 바로 옆에 있는 힘이야. 그렇기에…… 마왕의 앞에 서면, 어떤 이들은 그 유혹에 넘어갈지도 몰라.”
마왕이 봉인되어 있을 때도 흑마법사는 종종 출몰한다.
신성 결계가 무너져 내리면서 마왕의 힘이 세상에 미치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도 서서히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지 몰랐다.
그러면 더 많은 마법사들이 유혹당할 것이고, 그중에서 넘어가는 이들도 있으리라.
흑마법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불사다.
대마법사도 피해 갈 수 없는 죽음을 피해 가게 해 주는 영원한 생명.
마법사는 마법을 통해 한계를 뛰어넘어 저 위를 바라보고자 한다.
수명이라는 제약을 뛰어넘게 해 주는 힘을 미끼로 노골적으로 유혹해 온다면, 어떤 이들은 경계를 넘어 버릴지도 몰랐다.
로제타의 뿌리가 그들의 정신을 지켜 줄 것이다.
어느덧 그들이 탄 마차는 황궁의 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어렴풋이 신성력의 기운이 느껴진다.
대신관들이 그 안에 있었다. 그야말로 적과의 동침.
얼마 전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건만, 아이러니하게도 공동의 적이 그들을 한자리에 놓았다.
아레아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곧 바글바글해지겠어.”
마왕과 맞서 싸울 만한 모든 인간 국가의 사절들이 이곳 제국 황궁에 방문할 테니까.
“익숙한 얼굴들을 볼 수 있겠군.”
헬무트가 불현듯 중얼거렸다.
그는 리노사의 후계자로 선포되자마자 리노사로 향했다.
제국에는 옛 그레타 아카데미 시절 학우들이 많다. 제국 출신이라면 제국에서 기사로 헌신하고 있을 터.
그들과 대면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낯설었다.
그새 기분이 풀린 시안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익숙한 얼굴? 그 말은 좀 맞지 않는걸. 넌 검술 학부잖아.”
“그게 왜?”
“검술 학부 녀석들 졸업할 때쯤 되면 덩치가 엄청나진다고. 그때 좀 귀엽던 녀석들도, 완전 우락부락해져 있을걸. 말 섞기도 싫을 거다.”
“아스카는 그렇지 않던데?”
“그 녀석은 워낙 곱상했으니까 성장해도 그 정도인 거지. 다른 녀석들은 어릴 적에도 그 모양이었는데 크면 오죽하겠어.”
검술 학부 녀석들은 확실히 소년기만 되어도 귀여운 맛이 없어서, 부모 입장에서는 키우는 재미가 덜할 것 같았다.
헬무트의 입가에 설핏 웃음이 서렸다. 그는 검 손잡이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다들 실력은 많이 늘었겠지?”
“그럭저럭? 네 눈높이에는 턱없이 미달하겠지만.”
그렇게 말한 시안이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렸다.
“옛 그레타 아카데미 학우들과 함께 죽음의 전장에서 마왕에 맞서 싸운다! 그것도 나름 멋있네.”
“멋보다는 삶을 챙겨야지.”
아레아의 핀잔과 동시에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 문이 곧바로 열렸다.
헬무트는 먼저 내려서며, 아레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자.”
이곳에서 이제부터 역사가 다시 시작된다.
되살아난 재앙을 맞이하여. 천 년 전에, 미처 종결짓지 못한 싸움을, 이번에야말로.
패배한다는 것은 곧, 세상의 멸망을 뜻하기에.
그들은 승리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