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51
450
헬무트
450화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인가요.”
불편한 조우였다. 손이 저절로 검을 찾았다.
하지만 헬무트는 충동을 내리눌렀다. 자신을 두 번이나 파헤의 숲으로 보낸 대신관이 눈앞에 서 있었다.
대신관 레비나. 이미, 그녀가 그리했다는 것을 들었던 터.
그녀가 의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녀가 대신관 중에서 가장 청렴하며, 적어도 도덕적인 면에서는 흠 잡힐 구석 없이 바르게 살아왔다는 것도.
또한 신성 결계가 무너지면 그녀가 마왕에 맞서기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마왕이란 절대적인 적 앞에서 신전에 리노사가 필요하듯, 리노사에게도 신전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도.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를 말살하려고 한 자를 대하며 냉정할 수 있나?’
그게 그토록 쉬운가? 절대적인 선악을 넘어서, 그들의 신념은 수많은 이들의 삶을 파괴했다.
헬무트는 그중 하나였을 뿐이었고, 그들에게는 실패한 하나였을 뿐이다.
헬무트가 살아남았기에, 그들은 실패했다.
그조차 아쉬워할지도 모른다. 만전을 기했어야 했노라고.
책임을 물을 수 없고, 지난 일이며 사감으로 행한 일이 아니다.
말로는 아무렇지 않은 일 같고, 별것 아닌…… 세상에 존재하는, 조금은 안타까운 사연 중 하나로 들리리라.
그들을 용서하는 일이 가능한가. 그 질문에 마음속으로부터 답이 나왔다.
‘나는, 그럴 수 없어.’
심장에 검을 틀어박은 듯이 분명하다. 선인 중의 선인이라거나, 지독히 신심 깊은 자에게나 가능할 일.
아니면, 스스로 증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만큼 무른 성품이거나.
그러나 헬무트는 인내심이 깊었고 끈질겼다. 그는 증오조차도 놓아 버리지 못했다.
그 때문에 지금, 사납게 뒤틀리는 속을 참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다.
대개의 상황에 초연한 그라도, 자신을 말살하려 한 자를 용서할 만큼 너그럽지는 못했기에.
가슴 깊숙이 인이 박힌 분노는, 그가 당한 고통은.
그게 단지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사라질 수 있는가.
헬무트는 아무도 용서하지 않았다. 대공비도, 미하엘도. 그리고 대공마저도. 그저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에게 리노사가 필요했기에. 리노사를 차지하는 것이 그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그리고 그의 적들이 가장 바라지 않던 일이기에.
마르지 않은 장작이 끊임없이 불씨를 되살리고 있었다.
까마득히 긴 세월이 지나 그 모든 게 흐려지기 전까지는, 평온히 한자리에 마주할 수 없으리라.
잊기엔 그의 기억력이 너무도 좋았으니.
‘동료라니, 우습지.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 그 등을 칠 마음은 충만하다.
그들 역시도, 기회가 된다면 헬무트를 제거하고 싶겠지만.
“나를 증오하고 있군요.”
레비나는 뻔뻔스럽도록 담담히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녀 역시도 헬무트를 호의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루멘의 뜻은 옳았고, 그렇기에 그녀는 옳았다.
그런 자신을, 그런 신전을 헬무트가 증오한다는 것은 도리어 부당하게 여겨졌다.
심지어 그는 이미 신전의 군대를 쳐부수며 얼마간 복수하지 않았나.
루멘이란 이름 아래 정의를 수호한다는 신전의 입장에서는 주고받은 것을 넘어서서, 그들이 당하고도 덮어 주는 것처럼 여겨졌다.
마왕으로부터 세상을 수호해야 한다는 사명이 존재하기에.
‘그가 잃은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신전에서는 리노사와의 전쟁으로 잃은 피해를 복구하기 바쁘건만.
가해자는 피해자 앞에서 쉽게도 책임을 면한다.
피해자가 강인하며, 그들 앞에서 번듯한 모습을 보일수록 더더욱.
리노사의 후계자로서 눈앞에 선 헬무트는, 날 때부터 그렇게 살아온 양 당당한 귀공자였다.
그 너머의 고통도 절망도, 가해자의 무사안일한 시각에서는 손쉽게 가려지고 만다.
보이지 않으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눈 돌리는 것은 그토록 편하기에.
그러나 어디 대신관만이 그러할까.
그저 인간이 그러한 것을.
다리언은 그걸 알기에, 파헤의 숲에서 죽음을 맞는 것을 택하지 않았던가.
그가 나와 마주해야 할 것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그토록 추악하다는 것을 알기에.
헬무트가 그 감정을 곱씹지 않고 삼키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에 대해 검증하고 싶어 한다고 들었습니다.”
드디어, 이제야.
그전까지는 죽여 없애려고 날뛰어 놓고, 패배한 다음에야 이러는 것도 참으로 우스운 일.
“꼭 필요한 절차입니다.”
헬무트는 부인할 수 없이 강했다. 그가 전력이 된다면, 큰 보탬이 되리라.
그에게 죽어 간 신관들과 성기사들을 생각하면, 레비나도 감정을 추스르려 노력해야 했다.
“가슴에 손을 얹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어둠의 싹이 어떻게 봉인되었는지 제대로 확인할 수 있으니.
그때 갑자기, 옆에서 아레아가 나섰다.
“허튼수작을 부리면 당신은 여기서 죽습니다.”
헬무트도 놀랄 만큼 서슬 퍼런 목소리였다.
전투 능력은 대신관보다 마법사가 낫다.
그리고 아레아는, 대마법사의 경지까지 고작 한 발짝만이 남은 마법사다.
“당신의 얼굴…… 알 것 같군요.”
안다. 대마법사 하이케의 손녀. 살아남은 그녀의 혈육. 신전과 어떤 은원 관계에 있는지까지도 전부 다.
신전과 적대 관계인 이들이 함께라니. 그것도 하나같이 신전으로서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강자들.
레비나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봉인만 확인할 겁니다. 나는 대신관이고, 내 말을 어기지 않습니다.”
“어서 하시지요. 다만…… 내가 검을 쥐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헬무트는 차분한 투로 경고했다.
확인에 많은 신성력이 소모되지는 않는다.
만약 그녀가 헬무트를 공격하려고 신성력을 끌어 올리려는, 티끌만 한 기미라도 보인다면 단숨에 베어 낼 것이다.
“그럼 확인하겠습니다.”
대신관으로서 언제 그런 위협을 들어 보았겠는가.
하지만 그간의 충격이, 오히려 그녀를 무디게 만들었다.
대신관 레비나는 조심스레 헬무트의 가슴께에 손을 가져갔다.
그 즉시 대신관의 통찰력이 살과 뼈를 넘어, 그 안에 있는 봉인을 꿰뚫듯이 관찰했다.
레비나는 잠시 후 조용히 손을 거두었다.
마법사가 아닌 그녀로서는 그 정교한 봉인이 얼마나 강력한지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어둠의 싹은 반응하지 않는 것 같군요.”
마기는 천적인 신성력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대신관은 신성력 덩어리인 존재.
이토록 가까이까지 접근하여 직접 살피기까지 했는데 잠잠하다면, 거의 완전히 외부와 차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질 근거가 생겼다.
만약의 사태에는, 리노사와의 관계를 생각하여 그를 제거할 수는 없더라도, 배제해야겠다고 생각한 터였다.
‘그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은, 그를 포용하라는 루멘의 뜻이겠지.’
대신관 레비나는 어렵사리, 이제까지 적용했던 원칙과 신념을 넘어서 헬무트를 함께 싸울 동맹으로서 받아들였다.
가슴이 그렇게 느끼지 못할지라도 머리로 인식하고 따른다.
“봉인이 강력하다는 것은 확인했으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마지막 절차였다.
동맹이나 친교를 나눌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은 명확했기에, 레비나의 목소리도 사무적으로 흘렀다.
“리노사의 후계자에게는 리노사를 지킬 이유가 있지요. 그러나 당신은 어둠의 싹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선하고 악하고와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대신관 레비나는 똑바로 눈을 맞추며 물었다.
“마왕은 마물을 지배합니다. 만약의 상황에서 봉인이 무너진다면, 당신의 의지가 강하다 한들, 견딜 수 있겠습니까?”
절대적으로 깨지지 않는 마법 같은 건 없다.
강력한 마기의 공격을 받는다면, 봉인은 무너질 것이다.
레비나는 그 만약에 대해서 대답을 듣고자 했다.
헬무트의 답은 간명했다.
“물론.”
짧지만 확신이 묻어나는 음성.
검성으로서의 자존심을 넘어서서, 그것이 생존을 뜻하기에. 그는 항상 살아남아 승리해 왔기에.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의외의 인물이 나섰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시안이었다.
그는 숨길 생각 없이, 고스란히 전신의 마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반적인 마법사의 마력과는 다른 속성의 힘.
대신관 레비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로드릴이로군요. 그린카나에 있는 로드릴은 여성이라 들었는데…….”
“최근에 대지의 정령을 승계받은 시안이라고 합니다. 헬무트의 친구지요.”
시안이 당당하게 말하며 헬무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늘 뒤로 슬쩍 발뺌하고 있는 인상이 강한 그인지라, 의외의 모습이었다.
“대지의 정령도 그를 수용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나요?”
루멘의 뜻만을 받들며, 대지의 정령에도 호의적이지 않은 오만한 신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지의 정령의 힘만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 역시도 신이나 다름없는 힘을 가진 존재이며, 천 년 전의 마왕 전쟁에서 함께 싸워 주었기에.
“헬무트는 이미 그린카나에서 대지의 정령과 조우했습니다. 대지의 정령은 그에게 이변에 대해서 이미 예고했지요. 대지의 정령은 어둠의 싹을 극복한 헬무트가 마왕과 맞서 싸울 용사라고 판단한 겁니다!”
시안의 말은 단호했다.
루멘의 신탁같이, 대지의 정령이 로드릴에게 내리는 뜻은 인간의 말처럼 명확하지 않다. 해석하기 나름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시안의 해석이다. 그는 새로운 로드릴이므로,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였다.
하지만 처음 듣는 헬무트나 아레아는 내심 떨떠름했다.
용사라니, 헬무트와 그토록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던가.
레비나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보였다.
“……그렇게까지나.”
“또한 대지의 정령은 마왕의 의지가 마기를 가진 존재를 제어하는 것을 막아 낼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주머니에서 로제타의 뿌리를 꺼낸 시안은 준비했던 것처럼 그 효능에 대해서 술술 설명했다.
약을 파는 듯한 말투였다.
“이미 실험이 이뤄지고 있고, 만족스러운 결과가 산출되는 중입니다. 곧 자세한 보고서가 만들어질 겁니다.”
그가 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대마법사들이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믿을 만했다.
대신관 레비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보다 한결 긍정적인 기색이었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이것으로 더는, 신전은 이 사실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공식적인 면담은 그걸로 끝이 났다.
대신관 레비나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 등을 돌렸다.
자리를 떠나는 그녀의 등 뒤에 대고 차가운 목소리가 꽂혔다.
“당신들은 용서를 빌지조차 않는군.”
아레아의 눈빛은 잠잠하나 싸늘했다.
원한이라면, 부모를 잃은 그녀 역시도 만만치 않은 터.
레비나의 발이 잠시 멈추어 섰다.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다할 뿐이지요.”
이내 그녀는 조용히 그 장소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