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59
458
헬무트
458화
“아스카 님, 찾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아스카가 어디론가 불려가고, 누군가 민감한 화제를 던졌다.
“아, 그러고 보니 아레아. 아니, 아레아 님도 여자라면서요.”
아레아는 평민이지만, 현재 헬무트의 약혼녀로 알려져 있다.
그녀 정도의 마법사면 어느 나라에서나 작위를 받을 수 있기에, 신분이 유의미하지 않다.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 질문에는, 헬무트도 잠시 생각해 봐야 했다.
“짐작하고는 있었지.”
중성이라든가, 특수한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니 알았다고 하기는 좀 그랬다.
그의 짐작을 아레아가 확인시켜 준 이후에야 그도 알았으니까.
“같이 방도 썼잖아요.”
“설마, 그때부터 이미 연애를……!”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 아레아는 원래, 누구하고도 친하게 지내지 않았으니.”
비난의 여지가 많은 상황이었다.
그럴 만한 사정은 있었던 데다가, 학우들하고도 외따로이 놀았던 그녀일지라도.
“그 아레아가 여자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어쨌거나…….”
일제히 헬무트를 향해 부럽다는 눈길을 보냈다.
“행운이시로군요. 예쁜데 엄청 강한 마법사잖습니까.”
반응이 의외였다. 정말로 긍정적인 해석이다.
지나간 일이라 그런 건가. 아니면…….
‘하긴, 검술 학부 녀석들은 예쁘면 다 됐다고 생각하는 녀석들이었지.’
지독히도 단순한 기준이었다.
“어쨌든 오늘은 연회를 즐기자구!”
“먹고 마시다 죽는 거야!”
회포를 푸는 것도 잠시, 검술 학부 출신 녀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술을 퍼먹기 시작했다.
당장 내일 떠나는 헬무트는 예외였다.
‘이 녀석들에게 장벽을 맡겨도 좋은가.’
신기할 정도로 변함없는 녀석들이다. 헬무트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슬쩍 자리를 떴다.
연회장 문 쪽에 이를 무렵 불쑥, 어디론가 사라졌던 아레아가 나타났다.
그녀 역시도, 아카데미 시절 학우들에게 시달리다 온 모양이었다.
“마법사들이 자꾸 귀찮게 해서 말이지.”
“네가 여자라는 걸 이제야 알아서?”
그들도 졸업한 이래로 아레아에 대해서 소문만 들었을 뿐, 마주한 건 오늘이 처음이리라.
6년간 아카데미 생활을 하는 내내 여자가 남자라고 속이고 다녔다.
마법 학부 녀석들은 더욱 체감이 클 터였다.
기만이라면 기만이니 경악하고, 혹은 분개할 만도 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레아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그들은 그런 건 신경 안 써.”
“그래, 아레아 님은 아름다우신 아레아 님이시니까.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댄다. 저 녀석들은 아레아가 사실은 고양이라도 상관없을 거야. 아름답기만 하다면.”
시안이 나타나 비꼬는 소리를 냈다.
마법사들이라서 그런지. 일반인의 상식과는 반응이 다르다.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엘라가가 말을 이었다.
[고양이라면 많은 게 상관없어지지.]핀트가 어긋난 소리였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아레아가 물었다.
“즐길 만큼은 즐겼어?”
이제 보니 여기 아카데미 출신들이 있다고 회포를 풀라며 자리를 비켜 준 모양이다.
헬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만큼 낯설어졌지만, 재미있었어.”
마음이 편안했다.
아카데미 시절 학우들은 놀랍도록 헬무트한테 호의적이었다.
그는 어둠의 싹이라는 걸 가지고 있는데 꺼림칙하지도 않은가.
헬무트의 질문에 아레아는 간단하게 답을 냈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믿게 되지. 그들은 너를 겪어 봤잖아.”
단 1년이지만, 헬무트의 존재는 인상적이었다.
그것도 좋은 쪽으로.
진실이 밝혀지면 모두가 자신에게 등 돌리고, 적개심을 품을 줄로만 알았건만.
상황이 정리된 이후이기는 하나, 받아들여지는 게 빨랐다.
이는 단순히 헬무트가 힘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인간 세상에 나와 증명한 거였다. 자신은 인간이라고.
“헬무트는 헬무트지.”
시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이내 투덜거렸다.
“이곳까지 와서도 차석 소릴 듣게 되다니. 진짜 짜증 나. 대지의 정령도 힘을 물려줄 거면 빨리 좀 물려줄 것이지.”
그랬으면 아레아를 제치는 일도 가능했을 거다.
아레아는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들이 연회장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뒤늦게 아스카가 돌아왔다.
시안이 가장 먼저 그를 아는 척했다.
“여어, 아스카. 왜 이제야 와?”
“아버지한테 불려 갔다 왔어.”
아스카의 표정은 어딘지 어두웠다.
“걱정 많이 하시겠다. 넌 유일한 후계자잖아.”
“유일한 건 아니야. 실은…….”
어머니가 동생을 가지셨단다.
그 말을 듣자 시안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오, 축하할 일 아니야?”
“이 나이에 동생이라니.”
아스카는 그 단어가 낯선 눈치였다.
“동생을 가지신 지 이제 석 달이거든. 그러니까 임신 초기라서 그간 말씀을 안 하셨는데, 그때 내가 파헤의 숲에 간다고 해서 알게 된 거지. 충격을 받고 실신도 하셨어.”
아스카의 어두운 얼굴에는 그간의 사연이 담겨 있었다.
그가 파헤의 숲 진입 인원의 마지막으로 선정되기까지 짧지만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고 했다.
황태자의 지지가 있다고 해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일단 타국에서 반발이 컸다.
마지막 인원을 자기네 사람으로 하기엔 실력적인 자격도 충족하기 어렵고, 인재를 잃을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에서 차지하도록 하기에는 배가 아팠다.
역사에 남을 영웅을 배출할 기회.
이해타산을 따질 일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제국에서는 회담을 주재하고 이번 장벽을 건설하면서 국고를 열고 막대한 비용을 썼다.
그러니 제국에서는 그 마지막 남은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었다. 강력하게.
그런데 적임자가 아스카라는 게 문제였다.
파르네세 대공과 대공비는 반대하던 상황.
하지만 그들도 명분이 있는 상황에서 아스카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대신 아스카는 파르네세 대공과 거래를 해야만 했다.
“돌아온다면, 너는 내 후계자로서 제국에서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 더 이상 유보 같은 건 없다. 알겠느냐?”
간절히도 사지로 가고 싶었던 아스카는 일단 던지고 봤다.
“예, 그렇게 할게요.”
파르네세 대공비는 울며 말렸지만, 결국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이 안 좋았건만, 난데없이 동생이 생긴다니.
떨떠름하면서도 안도감이 들었다.
시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동생이 있으니, 널 보내 주신 게 아닐까?”
대지의 정령도 있는 데다가 동생도 둘이나 있다. 상대적으로 시안은 별로 반대랄 걸 당하지 않았다.
파르네세 대공이라면 아스카를 자식으로서도 아끼지만, 그도 제국의 황족이다.
자신의 후계 걱정이 더 우선일 테니, 아스카가 독자였다면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이군, 내가 죽어도 그 녀석이 있어서.”
흔쾌히 말은 했지만, 아스카도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본 모양이었다.
“안 죽게 내가 지켜 주지.”
시안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아스카는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지키긴 누굴 지켜. 네 앞가림이나 해. 넌 겁이 많잖아.”
“이중에서만 그런 거지. 마법검은 좀 쓸 만해?”
“아아…… 뭐, 그렇지.”
종합 무투회에서 마법검을 든 괴상한 놈과 싸워 본 아스카였다.
그때는 그자가 얍삽하고 정도가 아닌 수단을 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현실로 돌아오자, 마음이 달라졌다.
‘돈으로 처발라도 실력은 실력이랬지.’
아스카는 엄청난 돈을 처바른 국보급의 검을 손에 넣은 터였다.
아레아도 감탄할 만한 아티팩트 중의 아티팩트.
앞으로 검에 의존하여 발전이 없다면 문제겠지만, 일단 당장 강해지는 게 급선무였다.
아스카는 그간 검의 사용법을 완전히 숙지했다.
“내일이야. 들어가서 쉬자고.”
잠자코 듣고 있던 헬무트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 밤. 생각을 정리하고, 각자의 각오를 다지며 내일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무겁고도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들은 둘씩 흩어졌다. 헬무트와 아레아는 함께였다.
돌아오니 누군가가 숙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연회는 즐기셨는지.”
샤를로트였다.
아레아는 슥 그녀를 보고 고개를 까닥하며 인사했다.
둘이서 하려는 이야기가 있다는 걸 짐작한 터였다.
“난 이만 들어가 볼게.”
“예, 편안히 쉬십시오.”
샤를로트는 헬무트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지.”
“그렇게 어렵게 말할 거 없어.”
그들은 혈육이니까.
헬무트와 샤를로트는, 장벽 위로 올라갔다. 아까 전 점검차 찾았던 그 장소였다.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그 때문에 새카만 밤하늘에는 별들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도 빛나는 희망은 있는 것처럼.
그것이 헬무트의 삶이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별을 좇으며 살아왔다.
때로는 구름이 드리우더라도, 하늘에 별이 있는 것이 당연하듯이 그는 어둠 속을 걸었다.
결국 그 별에 닿았다 싶은 순간, 새로운 어둠이 내렸다.
하지만 파헤의 숲이란 어둠 속에서도, 그는 빛을 움켜쥘 것이다.
그의 운이 이미 다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막막함은 들지 않았다.
두 번 파헤의 숲에서 살아 나왔는데, 세 번은 못 할까.
일행 중 이번 임무에 가장 낙관적인 사람은 헬무트였다.
마물은 물론, 엘라가.
“다시 그곳으로 가시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샤를로트가 서두를 열었다.
헬무트는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나도 몰랐지.”
“대공 전하와 이야기를 마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하늘을 응시하던 헬무트의 시선이 샤를로트에게로 꽂혔다.
묵직하고도 강렬한 시선이었다.
“내가 만약 죽는다면, 네가 리노사의 후계자다. 나는 그 자리를 미하엘에게 줄 생각이 없어.”
대공이나 샤를로트가 어떻게 느끼든 그를 죽이고 가는 것이 편했으리라.
이미 신전도 헬무트가 위험한 존재가 아님을 보증하지 않았던가.
더는 자신의 도덕성을 입증할 필요 없는 헬무트였다.
하지만 미하엘은 약은 녀석이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리노사에서, 헬무트는 미하엘과 마주했다.
“한 번은 허용한다고 했었죠, 예전에.”
바소르에서였나. 헬무트는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다.
그건 만약, 그가 헬무트에게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봐주거나, 도움을 요청하면 들어주겠다는 뜻.
그 이후로 헬무트는 미하엘에게 또다시 빚을 지기도 했다.
미하엘이 검성의 검을 알아본 대장장이를 죽여, 입을 막아 주었으니까.
“너는 그걸로 덮을 수 있는 죄를 넘어섰어.”
그러니 떠나기 전 벌레를 없애 달라거나 하는 말은 들어주지 않을 거다.
대신해서 헬무트는 약을 좀 넉넉하게 줬다. 그가 혹시, 돌아오지 못하게 될 상황을 고려해서.
미하엘도 그간 제 남은 삶을 정리할 수 있도록.
“그런가요? 그래도 이 부탁은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미하엘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헬무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