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70
469
헬무트
469화
의기양양하게 결의를 모았던 세 권역의 지배자는 곧 로제타의 환을 집어삼키게 되었다.
아무리 떠들어 대도 약물에 의존해야 하는 초라한 신세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들이 마물인 한은.
“꼭 마약 중독 같은 느낌이야. 계속 먹어 줘야 하는 거.”
어디서 배운지 모를 단어를 들먹이며 이그렐이 인상을 찌푸렸다.
바하렉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왠지 이그렐의 분홍빛 머리카락이 그를 군침 돌게 하는 모양이다.
헬무트는 냉정히 말했다.
“이것 하나는 확실히 하지, 바하렉. 앞으로 인간을 먹지 않겠다고.”
루크 예거가 옆에서 움찔거렸다.
“인간을 먹지 않…… 인간을 먹는 마물이라는 소리인가!”
아까도 엘라가에게 인간을 안 먹느니 어쩌느니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던가.
팔마 기사단장에게는 토벌 대상 마물이었다. 그의 손이 검 손잡이에 올라섰다.
그건 레반트도 마찬가지였다.
파헤의 숲에 처음 온 인간들이 순식간에 그에게 적개심을 보임에도, 바하렉은 시큰둥했다.
[인간을 먹는 게 어때서. 파헤의 숲에서 그보다 더 부들부들한 고기가 없는데.] [정신 나간 놈을 원래대로 돌려놨으면 고마운 줄 알아. 어쨌든 안 먹을 거지?] [……뭐, 이 일이 끝날 때까지는. 그리고 여기에 있는 인간은 먹지 않겠다.]다 끝나고 나서, 제 영역에 침범하는 인간들은 이제까지처럼 잡아먹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마치 먹이가 입안으로 날아든 격이었다. 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싸운다지만, 이 일행 중에서도 사상자가 나올지 모른다.
죽은 인간은 먹어도 되는 거 아닌가. 바하렉은 마물답게 생각했다.
엘라가가 경고를 던졌다.
[끝나고 나서도 뒤통수치기 없기다. 그랬다간 내가 마왕이고 뭐고 네놈 명줄을 끊어 놓을 테니까.]권역의 지배자로서 의지를 모은 게 언제였냐는 듯, 불신이 들어찼다.
바하렉이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니까.] [넌 못 미더우니까 저만치 떨어져서 와.]바하렉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레아가 입을 열었다.
“인간이…… 이그렐까지 인간으로 치면 아홉이죠. 걸어서 중앙 권역까지 가려면 오랜 시간이 소요될 거예요.”
“칸트라를 괜히 보냈나. 좀 더 써먹을 것을.”
헬무트가 말했다. 사람 수가 많기는 많았다.
거북이의 거대한 등딱지는 많은 인원을 태우기에 딱이었다.
골렘이 태우고 난다고 해도 무리는 없겠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마기가 짙은 대기에서 골렘의 비행은 기존보다 마력도 월등히 더 많이 잡아먹었다.
그때는 파헤의 숲을 탈출하는 게 목적이라 마력석을 팍팍 쓰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마왕을 상대하는 입장이라 전력을 아껴야 한다.
그리고 공중에서 피격당해도 문제였다.
그때는 아래쪽에 엘라가가 있으니 공격당할 일은 없었는데, 중앙 권역에 가까워지면 그곳의 마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해 올 것이다.
마기 때문에 마물들이 근접하기까지 감지하기조차 쉽지 않고, 대포를 쏘듯 뭔가를 던져 오는 공격도 마주하면 난감하다.
이미 뿔뿔이 흩어져 본 시점에서, 일행이 갈리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엘라가와 바하렉, 마왕에게 휩쓸릴지 모르는 두 마물을 지속적으로 근처에 두고 신경 써 줘야 했다.
적어도 대신관은 그들 가까이에 있어야 했다.
헬무트가 바로 엘라가를 돌아봤다.
“일부는 엘라가가 등에 태우면 되지 않을까.”
이그렐은 일단 인간형을 유지하기로 했고, 식인 호랑이 바하렉 등 위에 올라타기에는 믿음이 없다.
엘라가가 가장 적합한 상대.
“그랬다간 엘라가에 탄 인원만큼 전력 손실이 있을 거야.”
아스카가 엄중한 얼굴로 경고했다. 그의 얼굴에는 진짜 싫다는 기색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건 시안이나 레비나, 레반트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지옥을 경험한 그들이었다.
엘라가가 투덜거렸다.
[나도 태우기 싫어. 저 녀석들 배가 불렀다니까. 기껏 편하게 여기까지 와 놓고.]“빠르기는 했지요. 그냥 골렘에 타자고.”
아스카가 골렘을 향해 턱짓했다.
그때 아레아가 검지로 턱을 짚었다. 보랏빛 눈동자에 광채가 일었다.
“좋은 생각이 있는데.”
그녀는 그대로 골렘을 변형시켰다. 새 형상으로 착지해 있던 골렘에게서 빛이 일었다.
이윽고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4개의 바퀴가 달린 마차였다.
좌석 위치가 높고 위는 뻥 뚫려 있는 형태.
마차가 움직이려면 동력이 필요하다. 여긴 말은 없지만, 대체할 만한 존재는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엘라가와 바하렉에게 쏠렸다. 아레아는 아공간에서 기다란 줄을 꺼내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아주 튼튼한 마차가 되지. 바하렉도 믿을 수 있고, 일행이 다 함께 움직일 수 있어서 좋고. 만족스러운 방안이죠.”
바하렉과 엘라가가 동시에 소리를 높였다.
[누가 만족한다는 거냐!] [우리가 인간이 기르는 가축인 줄 알아? 누굴 묶어 놓고 마차를 끌게 하겠다고!]생각만 해도 굴욕적인 일이었다. 특히나 바하렉의 반발이 컸다.
[마왕이고 뭐고, 호랑이가 마차 끄는 거 본 적 있냐!] [표범은 마차 끄는 줄 알아? 나도 싫어!]“어쩔 수 없잖아. 그렇다고 새가 마차를 끌 수는 없으니까.”
이그렐이 얄밉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본체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녀가 마차를 끄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차라리 인간들을 싣고 날아가면 모를까.
이미 이그렐도, 엘라가도 인간을 태워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마차를 끄는 건 좀 다른 문제였다. 본격적인 가축화라고 할까.
심지어 그들은 보통 마물도 아니고, 자그마치 권역의 지배자씩이나 되는 마물이지 않은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마왕을 물리칠 수는 없어.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지.”
헬무트가 투정 부리지 말라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때 엘라가가 눈을 빛냈다.
[가만, 그런데 마차를 끄는 건 한 마리면 족하지 않나?]고작 열 명가량의 인간이 타는 마차다. 굳이 바하렉과 제가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마차를 끌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랬다간 오히려 서로가 방해만 될 뿐이다. 한 마리로도 충분히 속력을 낼 수 있다.
그러자 바하렉이 움찔거렸다.
[인간들과 친한 건 네 녀석이잖아, 엘라가!] [그렇지. 하지만 내가 네 녀석보다 더 강하지.]파헤의 숲에서는 강한 자가 곧 법이었다. 하지만 바하렉은 굴하지 않았다.
[강한 게 문제가 아니라, 적임자가 누구냐의 문제겠지! 나는 인간들을 등에 태워 본 적조차 없어! 마차 같은 건 끌 수 없다.]아무튼 못 한다. 경험도 재능도 없다. 바하렉은 그렇게 주장했다.
[네가 적임자라는 단어도 알고, 생각보다 멍청하진 않네.]엘라가는 진심으로 놀란 눈을 해 보였다.
[누굴 무식한 줄 알아! 이 하얀 고양이가!] [그래, 이 풀 뜯어 먹는 고양이야. 네 녀석은 나한테 은혜를 입었지. 첫 번째로, 자그마치 내게 덤볐는데도 두 번이나 살려 줬고.]엘라가의 눈이 번뜩였다.
[두 번째로 내가 정신이 나간 네 녀석을 제정신으로 돌려놔 줬지. 그대로 내버려 뒀으면 마왕이 어떻게 되든 쭉 미쳐 있었을 게 아니냐?]정신병이 낫기는 힘들다. 엘라가는 그 힘든 걸 가볍게 해내 줬다. 바하렉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그, 그건 그렇지만…….] [네가 인간이냐? 체면 따지게. 중앙 권역까지만 하자고.]엘라가는 그렇게 바하렉에게 떠넘기고 헬무트에게 다가가 붙었다.
[으으…….]차마 그러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바하렉은 마왕과 싸우기로 한 것을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멋들어지게 쾅 붙는 줄 알았는데, 인간들이나 실어 나르는 짐말이나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그렐이 얄밉게 사실적인 위로를 꺼냈다.
“바하렉, 네가 이해해. 엘라가는 난폭해서 아무 생각 없이 뛰다가 마차를 부숴 먹고도 남을 테니까.”
“그럼 결론 난 거지?”
헬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레아 쪽을 돌아보았다. 아레아는 줄을 가져다가 바하렉의 몸에 안장을 설치했다.
진짜 말이 아니니 고삐나 굴레 같은 걸 설치하진 않을 터였다.
그랬다간 바하렉의 적이 마왕이 아니라 그녀가 될 테니까.
바하렉은 충혈된 눈으로 못내 제 몸에 마차를 연결하는 걸 받아들였다.
표정에서 극도의 인내가 느껴졌다.
설치는 금방 끝났고, 한 명 한 명 마차 위에 올라탔다.
개중 가장 인간적인 루크 예거가 마차에 올라타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닥치고 올라타!]잔뜩 성이 난 바하렉에게는 먹히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완전히 합류한 일행은 중앙 권역을 향해 출발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서쪽 권역과 북쪽 권역의 경계 근처.
힘차게 바퀴가 굴러가는 속도를 보건대, 며칠씩 걸리진 않으리라.
신성 결계는 여전히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서둘렀다. 중앙 권역에서 무엇이 그들을 맞을지 알지 못한 채로.
* * *
장벽이 세워지고 끝이 아니었다.
헬무트 일행이 신성 결계에 진입한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바깥에서는 경악스러운 사태가 연달아 터졌다.
통째로 잿더미가 된 마을에서, 시체의 언덕을 등지고 선 흑마법사가 광소하며 외쳤다.
“어둠의 힘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법사 협회에 정식 등록된 평범한 마법사였다.
하지만 실험적인 성향이 위험하다고 여겨져 암암리에 주시당하던 자이기도 했다.
마법사 협회에서는 그가 흑마법을 사용하자마자 바로 토벌대를 보냈다.
문제는, 그런 자가 혼자가 아니라는 거다. 하나를 토벌할라치면, 또 다른 이가 나타났다.
“이는 진정한 마법이다. 우리는 어둠의 힘을 통해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어찌 마법에 제약이 있겠는가! 마법사 협회는 신전처럼 우리를 억압하고 있다!”
마법사 협회에서 위험 분자로 판명한 이들 중 꽤 많은 수가 흑마법사로 변질됐다.
강력한 유혹이 그들을 휩쓸어 간 듯이.
그들을 토벌하느라 마법사 협회건 신전이건 각국의 기사단이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거기다가 미처 신전이 신경 쓰지 못한 사이, 어둠의 싹을 보유한 이들이 아주 어린 나이부터 각성하기 시작했다.
검을 배운 자만큼 위험하지는 않지만, 갓난아이가 제 부모의 목을 조를 만큼 위험하고도 강력했다.
수많은 흑마법사의 등장과 어둠의 싹 보유자의 각성.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장벽에 방어 체계를 구축하느라 힘을 쏟던 이들은 느닷없이 닥친 그들과 맞서야만 했다.
평화에 젖어 있던 인간 세상은 내부로부터 혼돈에 빠졌고, 그 혼돈은 화마가 되어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혼돈의 근원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덮어 꺼뜨린다고 해도 다시금 살아날 불씨였다.
위험에 처한 세상을 구하는 것은 용사의 몫이다. 이제 모든 것은 헬무트 일행의 손에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