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71
470
헬무트
470화
바하렉은 놀랍게도 마차를 끄는 데 소질이 있었다.
그는 엘라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안정적으로 마차를 끌었다.
골렘도 마차 역할을 잘하는 건지 진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호랑이 마물이 끄는 마차에 타는 건 평생 한 번 겪기도 힘든 기묘한 체험이리라.
엘라가의 등 위에 올라타 위액을 쏟아내야 했던 4명의 인간은 달라진 상황에 체감이 컸다.
“아, 편하다.”
아스카가 중얼거렸다. 몸이 축축 늘어질 지경이다. 다른 이들도 말없이 표정으로 동의를 표했다.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차는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중앙 권역을 향해 나아갔다.
[이제 중앙 권역까지 하루의 반도 남지 않았어.]계속 거리를 재어 보던 바하렉이 우뚝 멈춰서서 말했다. 그의 영역이니 그가 가장 잘 알 터.
헬무트가 제의했다.
“그러면 적당한 곳에서 하룻밤은 쉬어 가는 게 좋겠군. 힘을 회복해야 할 테니까.”
조금 늦춰진다고 해서 마왕이 엄청나게 강해지지는 않으리라.
날이 컴컴해지고 있었다.
파헤의 숲에도 어김없이 밤은 찾아온다. 마왕의 영역에 쳐들어온 것치고는 평화롭게 시간을 보냈다.
도착한 즉시 달려드는 마물들을 맞상대해야 할 거라고 여겼건만, 일행의 반절에게 약간의 위기만 있었을 뿐이다.
그 위기에서 그리 치열한 사투를 벌인 건 아니지만, 힘의 소모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아스카와 시안, 대신관과 성기사. 그중에서도 가장 힘의 소모가 컸던 건 레비나였다.
단지, 성물을 가진 대신관의 신성력은 회복 속도가 빨랐기에 오래 쉬지 않아도 되었다. 수면은 좀 취해야겠지만.
힘과 체력을 회복하고 최상의 상태로 나아간다.
유서는 각자 이미 남기고 왔지만, 마지막으로 또 남길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지금뿐이었다.
마차는 나무 그늘이 드리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준비해 온 식량이 최후의 만찬처럼 꺼내져 차려졌다.
파헤의 숲에 진입한 이후부터 신경을 옥죄고 있었던 긴장감이 느슨해졌다. 다들 조용히 음식을 먹고 마시며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모두가 죽거나 일부가 죽거나. 그 죽음이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찾아오게 될지는 알지 못했다.
꾸역꾸역 배를 채워 넣으면서도 분위기는 고요했다. 불안감은 이 순간 가장 증대된다.
목적지를 앞에 둔 이 시간.
“아레아, 잠시.”
잠시 생각을 마친 하이케가 손짓으로 그녀를 불러냈다. 아레아는 자리에 일어서서 선뜻 그녀를 따랐다.
야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였다.
“무슨 일이에요?”
“상태는 어떤가 해서.”
“물론 상태는 좋아요. 나쁠 일도 없었으니까.”
아레아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말 그대로 진심이었다.
컨디션 관리는 완벽하게. 목표를 완수하고 살아 나갈 방법을 치열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몸과 마음을 맞춘다.
이미 한 번 파헤의 숲에서 살아 나왔다. 두 번을 못 할 건 뭐가 있겠는가.
아레아는 만약의 사태도 생각했다.
마왕을 상대로 이기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올 경우. 혹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경우.
‘헬무트와 던전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진다면 싸울 의미가 없으며, 자신이 죽고 나서 이루는 세계 평화는 의미가 없는 건 마찬가지다.
자신이 기준이긴 하되 헬무트도 자신과 비슷한 의미로 동급이었다. 자신이 죽어서도 안 됐지만, 헬무트가 죽어서도 안 됐다.
‘나머지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니까.
람피오네가 물려주어 이제 완전히 아레아의 것이 된 마법 던전은 세상과 분리된 아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파헤의 숲에서는 아공간에 진입하기 힘들지만, 방법을 고안해 놨다.
안으로 들어가 바깥과 연결을 끊는다면, 강제적인 수단으로밖에 침범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마법사의 던전은 철저히 마법사의 영역. 침입자를 상대로 맞서 싸우기에 유용했다.
그들이 패배하여 지상이 마왕에게 점령당할 경우 생이 끝날 때까지 던전에 갇혀 살아야 하니까, 되도록 선택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다.
아레아는 그것을 마지막 선택지로 남겨 뒀다.
하이케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래.”
그녀는 불쑥 내뱉었다.
“네 부모의 일은, 미안했다.”
아레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새삼스럽군요. 게다가 당신의 자식이기도 하잖아요.”
네 부모라니. 하이케가 씁쓸하게 말했다.
“나는 내 자식을 제대로 돌본 적이 없어. 그런 주제에 새삼 부모된 입장을 들먹이는 게 가당한 일이겠니.”
“뭐, 됐어요. 당신도 일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겠죠. 알고 있어요.”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가슴으로는 갈 데 모를 감정이 남아 있었을지라도.
하지만 세월이 차츰 감정을 삭여 줬다. 아레아가 분노를 발해야 할 대상은 하이케가 아니었으며, 갚아 줘야 할 대상도 하이케가 아니었다.
그 대상에게조차도 죄를 물을 수 없건만.
과거를 과거로 묻어 두기로 하기까지는 많은 생각과 명분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레아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눈앞에 대신관과 성기사를 두고도 태연할 수 있는 그녀가 하이케를 새삼 탓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과 별개로 하이케와는 성격이 안 맞아.’
하이케는 자신의 스승이었다. 그거면 족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몰라, 말해 둬야겠다 싶었단다.”
“유언장은 남기고 왔잖아요. 어차피 내가 아니면 열어 볼 수도 없게 해 놨지만.”
하이케가 유언을 남길 만한 상대는 아레아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아레아도 죽으면 유언장의 내용은 영영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된다.
하이케가 당부하듯 말했다.
“너는 살아서 돌아갈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만들 거고요. 그런데 그건……. 당신 자신에게 장담해야 하지 않나요?”
아레아의 의문은 당연했다. 대마법사인 하이케 쪽이 아레아보다 목숨을 건질 확률이 높을 테니까.
그러나 하이케는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아레아는 냉담하게 잘라 말했다.
“날 살리기 위해 목숨 바친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말아 주기를. 난 더 이상 죽은 사람을 등에 업고 살아가고 싶지 않거든요.”
“물론, 그럴 거란다.”
하이케는 웃었다. 석연찮은 기분 속에서 대화는 끝났다.
바하렉이 인간들과 동떨어진 저쪽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반면, 이그렐과 엘라가는 인간들 곁에 있었다. 그 대비가 묘했다.
인간 모습의 이그렐은 아예 중앙에 떡하니 앉아서 모닥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모닥불을 피워 보며 신기해하는 그녀에게는 아무 근심 걱정이 없어 보였다.
엘라가는 헬무트 옆에 있었다. 늘 거기가 그의 자리였던 것처럼. 헬무트는 엘라가의 푹신한 털에 등을 기댔다.
“여전히 털은 풍성하군.”
[마물에게 탈모는 없다.]대머리가 부러워할 소리를 하면서 엘라가가 빤히 헬무트를 내려다봤다.
역시 자신에게 친숙한 존재가 영향을 미치는 건지. 그의 정신은 어느 때보다도 멀쩡했다.
아무리 로제타의 환을 잔뜩 먹었다지만, 이 상태면 마왕에게 정신을 빼앗길까 우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엘라가가 뚱하니 물었다.
[왜, 옛날 생각나냐?]어린 시절, 헬무트는 엘라가의 털에 이렇게 폭 파묻혀서 잤다.
뜨거운 몸과 복슬복슬한 털에 기대어 있을 때면, 숲의 냉기도 그를 침범하지 못했다.
엘라가와 함께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삶도 있었다. 그 삶은 헬무트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 옛날이 그립진 않은데.”
[그렇겠지. 그때 넌 약했으니까. 지금도 약하지만.]헬무트의 눈썹이 슬며시 위로 들렸다.
“마왕을 퇴치하고 나면, 그놈의 약하단 소리는 하지 않기로 하지.”
용사씩이나 되고 나서도 약하단 구박을 듣는 건 억울하지 않은가.
하지만 엘라가는 슬쩍 말을 돌렸다.
[마왕을 퇴치하고 나면, 너도 자유로워지겠군.]결국 헬무트를 계속 구박하고 싶은가 보다. 헬무트는 무심하게 말했다.
“모르지. 신성 결계는 사라질 테니. 어둠의 싹을 가진 자를 더 이상 파헤의 숲으로는 보낼 수 없겠지만.”
대신해서 싹 다 제거하려고 할 수도. 마왕을 물리쳤으니 마기를 가진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하자고 나올 수 있었다.
마계의 문을 닫고 마왕을 물리치더라도, 잔존하는 마기를 말살하기까지는 긴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여하간 헬무트에게 앞으로 순탄한 삶이 보장되리란 법은 없었다. 그가 비록 용사가 되더라도.
“이제는 상관없어.”
힘으로 관철하면 그만. 이번 일로 헬무트는 스스로 명분을 얻게 된다. 그것은 힘을 휘두를 수 있는 명분이었다.
“일이 다 끝나면 엘라가는 어떻게 할 거야?”
그의 영역에 남아 있어도 좋겠지만, 따라와도 좋다.
평생 파헤의 숲에서 산 엘라가이니, 장소를 바꾸어 사는 것도 괜찮다.
고양이 형태로 변해 있는 것도 즐기는 듯하니까.
리노사가 아니더라도 수잔과 세라가 있는 바덴도 좋은 선택지가 될 것이다.
엘라가는 잠잠한 눈빛으로 헬무트를 내려다보았다.
[글쎄다. 일단 마왕인지 뭔지를 물리치고 나서 생각할 일이겠지.]인간 세상 탐방은 그로서도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다시 누릴 수 있을까.
엘라가가 헬무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천 년 전 그때. 파헤의 숲이 생성될 시기에. 그 당시의 기억이, 최근에 문득 떠올랐다.
까마득히 오래된 기억. 그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으니까. 헬무트보다도 약한 새끼 표범이었던 때가.
‘마왕이든 루멘이든 남의 무의식에 수작질을 부리는 건 마찬가지라는 말이지.’
그 때문에 엘라가는, 자신이 무얼 할 수 있고 무얼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마물이면서도 그가 인간에게 우호적이었던 건 그 무의식의 영향이었을지도.
아무래도 좋다. 엘라가는 진영을 정했으니까. 그는 싸울 준비도 결심도 되어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 사이, 하이케와 대화를 마친 아레아가 다가왔다.
헬무트 옆에 털썩 주저앉은 그녀는 엘라가의 몸에 기대기 전 물었다.
“몸은 자주 씻는 거지요?”
[……마기가 불순물을 튕겨 내거든? 내가 더러운 꼴 본 적 있냐.]“그럼 됐고요.”
제게로 기대 오는 얄미운 머리통을 엘라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봤다.
그래도 제가 길러 낸 첫 인간을 맡아 줄 녀석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성격은 그렇다 쳐도 예쁘고 강하니까.
헬무트와 아레아가 조금씩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이 밤이 지나면, 여기 있는 모두가 결전을 맞이하게 되리라.
시안과 아스카, 루크 예거 역시도 자기들끼리 우애를 다지다가 어느샌가 잠들었다.
비록 장소는 파헤의 숲이지만, 휴식만큼은 포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