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80
479
헬무트
479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용서를 말함이 아니었다. 그는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왜 그녀가 그런 말을 이제야 하는지, 알 것 같았기에.
‘당신이 그래도 내 어머니보다는 낫군.’
그녀는 대신관으로서 헌신하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이 파헤의 숲까지 뛰어들었다.
어머니는 그저 대공의 어머니로서 권세를 누릴 미래만을 잃었을 뿐이다.
레비나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신전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수많은 시급하고도 중대한 순간마다 많은 이들이 발길을 붙잡겠지요. 여러 가지 명목으로.”
신전은 막강한 명분과 세상을 지킨 공로로 인간들의 머리 꼭대기에 우뚝 서서 그들을 이끌었다.
신전은 거역할 수 없는 절대였으나 그들도 인간이었기에 타락하고 부패했다.
그리하여 난관을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마왕을 물리쳤다는 공로를 안고 돌아가면, 그들의 잘못은 묻히리라.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사태는 그들에게 이로웠다. 잘 해결되기만 한다면.
그러므로 레비나는 사과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과하고 있었다.
마음속에, 털끝만큼이라도 남은 것이 있다면 털어 낼 유일한 기회였다.
“많은 이유에 귀를 기울이고 희망적인 가능성에 걸며 타협하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지키는 일도 더욱 힘겨워지겠지요. 하여 신전은 늘 옳아야 합니다.”
덤덤히 말하는 레비나의 얼굴에 미묘한 떨림이 일었다. 헬무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마왕이 사라지면 신전의 큰 명분이 사라질 테지.”
“앞으로의 길을 어떻게 걸어갈진, 새로운 이들의 몫이겠지요.”
신성 결계라는 가시적인 기적이 사라진 세계에서, 신전은 수많은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레비나의 역할은 여기까지.
마침내 준비가 끝났다.
검은 기둥이 흐릿해지다가 팍 꺼졌다. 마기의 공급이 끊겼다.
마왕의 시선이 아래로 움직였다. 천공으로부터 붉은 눈이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코앞까지 닥친 인간들을!
그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하나는…… 과연 인간인가?
마왕의 힘을 안고 있는 자가 움직였다.
“내가 먼저.”
헬무트는 골렘의 머리끝에 올라섰다.
기이이잉.
어마어마한 압력이 그들을 짓눌렀다.
하이케와 아레아는 온 마력을 쏟아 부어 보호 결계를 지탱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새는 그대로 추락하여 바닥까지 고꾸라지리라.
헬무트는 그 결계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마왕이 신성 결계로부터 이쪽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신성 결계를 등지고 거대한 구름 같은 몸을 송두리째 내려, 적들을 공격할 요량으로.
저 높은 천공으로부터 강림하는 어둠의 의지.
사악하고 흉포하며 파괴적인, 그 모든 형상이 담긴 심연이 허공으로부터 붉은 눈을 빛냈다.
실로 마왕이라고 불릴 만한 모습.
누구도 그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 알려 주지 않았다. 헬무트는 단지 검을 빼 들었다.
저것을 벤다. 모든 힘을 다해서.
전신의 비스가 한곳으로 응집되었다. 헬무트의 검에 비스가 피어올랐다.
흡사 영혼의 불길 같은 비스는 잿빛이었다.
마왕의 눈길에 봉인이 부서져 내렸다. 희미한 마기가 마왕과 공명하듯 그의 검이 일렁였다.
또한, 어둠의 싹도.
어둠의 싹은 마왕에게 조종당하듯 꿈틀거렸다. 그러나 이내 그 미약한 반항은 비스에 압도당했다.
비스는 검사의 정신. 헬무트의 경지를 오롯이 담아낸 비스는, 오직 그의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전부를 통제할 만큼 강력했다.
‘단번에 가른다.’
자신이 길을 열고, 레비나가 최후의 일격을 가하리라.
헬무트는 검을 뒤로 물렸다.
마왕이 짐승 같은 이빨을 드러냈다. 붉은 눈이 찰나처럼 번뜩였다.
[헬무트.]헬무트는 움찔거렸다. 그 목소리……. 어딘지 낯익었다.
그 순간, 헬무트의 시야를 어둠이 가득 메웠다.
이지러지던 시야에 이내 하나의 상이 잡혔다.
헬무트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한때 태산처럼 무겁게 느껴졌던 남자였다.
[지금 내게 검을 들이미는 것이냐?]낮은 목소리가 엄중하게 그를 꾸짖었다.
초상화로도 남지 않은 다리언의 얼굴, 그 목소리. 그대로의 모습.
마치, 헬무트의 기억을 그대로 빼어다 새겨 놓은 것처럼.
[파헤의 숲에서 죽은 자의 영혼은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나는 네 스승이다!]다리언은 헬무트를 마치, 호소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다.
나를 벨 참이냐? 그렇게 묻는 눈빛.
그러나 흔들리기는커녕 오히려 소름이 일어 정신이 깨어났다.
마왕은 착각하고 있었다. 다리언은 어떤 순간에서도 동정심에 호소하여 자신을 굽힐 자가 아니건만.
거기에 혹한다면 검성 다리언을 욕되게 하는 것이리라.
‘고맙군.’
그를 다시 보게 해 줘서. 헬무트는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그의 모든 경지를 담아서.
단 한 번이면 족했다.
그의 비스가 대기를 가르고, 이내 앞선 공간 자체를 베어 내렸다.
콰지지직!
환각이 무너지자 목전에 이른 마왕이 보였다.
위력을 다해, 보호 결계를 부수며 밀려온 마왕의 모습이.
그리고 한가운데, 기다란 실선이 생겨났다. 절벽이 동강 난 듯이 거대한 상흔이 마왕을 둘로 갈랐다.
끼에에에에!
기괴한 소리와 함께 반 토막 난 마왕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뒤틀렸다.
그제야 압력이 사라져 가까스로 골렘을 지탱하고 있던 아레아와 하이케가 한숨을 돌렸다.
헬무트는 사뿐히 뒤로 물러났다. 다음은 그녀의 차례였다.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레비나의 걸음이 움직였다.
그녀의 몸에는 이미, 환한 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양손에 자리한 것은 루멘의 성물.
성물을 매개로, 모든 힘을 쏟아부어 마왕을 사른다.
반 토막 난 마왕이 성난 마기를 내뿜었다. 놈은 무력화되었지만, 죽지는 않는다.
마계가 열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회복될 것이다. 지금이 기회였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만들어 내 여기까지 이른 기회.
그리고 이제는 레비나의 차례다.
레비나가 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루멘이시여.”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마왕이 아니었다.
그 너머, 마왕이 등진 천공에, 루멘의 본신인 신성 결계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루멘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 평생을 섬겨 왔던 신이다. 그 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대신관에게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리라.
레비나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점점 더 그녀의 몸에서 쏟아져나오는 빛이 환해지고 있었다. 마치 태양이 하나 더 뜬 것 같았다. 환해지다 못해 눈이 부셨다.
그녀는 스스로 태양이 되어 빛의 근원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것은 신체마저 태우는 발화. 그야말로 모든 신성력을 쏟아 부어서.
그아아아!
마왕이 발작하듯 기괴한 소리를 내며 그녀를 밀쳐내려 들었다.
하지만 신성력은 마기의 천적. 마왕의 힘은 그녀에게 닿으며 그대로 소멸되었다.
그리고 이윽고 충돌. 빛이 어둠을 사르는 장엄함이었다.
마치 세상의 탄생을 보는 듯한 압도적인 빛이 시야를 장악했다.
눈이 멀 것 같은 광휘였다. 아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오오오오!
단말마를 내지른 채, 검은 연기와 함께 마왕의 몸이 흩어졌다.
연기와 같은 마기의 자락조차도 다시금 기능하기 시작한 신성 결계에 의해 짓눌려 소멸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소임을 다한 레비나의 몸도 그대로 빛 속에서 녹아 사라졌다.
남은 것은, 허공을 떠도는 빛의 먼지뿐.
대신관으로 살았으되 잠시 인간이었고, 최후는 대신관으로 맞이했다.
그래, 그녀는 잠시나마 인간이고 싶었던 것이리라. 삶의 마지막에서.
공중을 휘도는 빛은 이내 점멸하며 하나로 응축했다. 그리고 마지막 어둠을 사른 찰나 뒤, 폭발했다.
구우웅!
소리는 대단치 않았으나, 엄청난 돌풍이 일었다.
쿠궁!
그 파장에 힘을 잃은 그대로 새의 몸뚱이가 아래로 꺾였다. 타격을 입은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일순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그와 함께 상공은 완벽하게 힘의 진공 상태에 이르렀다. 그것은 곧 마법 효과의 상실.
문제는, 그들이 드높은 상공에 떠 있었다는 사실이다.
기이이이이이!
파공음과 함께 기능이 정지한 새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제히 까마득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작은 운석처럼.
헬무트는 바람의 저항을 받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느새 골렘에게서 떨어져 나간 그는 허공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기껏 마왕을 처치했건만, 추락사를 당할 위기라니.
그러나 헬무트는 걱정하지 않았다. 비록 그의 힘은 다했으나, 남은 힘이 있었기에.
“헬무트!”
외마디 소리와 함께 아레아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래로 떨어지면서, 힘의 진공 상태에서 벗어나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의 손이 상공에서 강하게 겹쳐졌다.
헬무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그러나 아레아가 당혹한 기색으로 외쳤다.
“마법이 잘 안 써져!”
그녀에게서 그토록 초조한 표정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위쪽에서 마력을 소진한 그녀였다.
파헤의 숲에서는 원래 마법을 쓰기 어려운 데다가, 대기마저 혼란해졌다. 추락하면서 마법을 쓰기는 또 오죽 어려운가.
급속도로 땅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막은 얼얼하고 피부의 연약한 부분은 모두 칼날 같은 바람이 파고든다. 눈을 뜨기조차 어려운 속도.
쿠구구구궁!
먼저 추락한 골렘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바닥에 흙먼지를 일으켰다.
그 파동에 위로 모래 폭풍이 치달았다.
다행히, 아레아는 마법을 펼치는 데 성공했다. 헬무트와 아레아의 속도는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의 충격이 영향을 준 듯이, 마법의 효과는 미약했다.
이대로면 충돌한다. 큰 부상을 피할 수 없으리라.
“조심해!”
헬무트가 외치면서 아레아를 감싸 안았다. 본능적이기도, 계산적이기도 한 움직임.
몸은 제가 튼튼하고, 아레아가 멀쩡하다면 마법으로 회복시켜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뒤늦게 떠올랐고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의 몸은 충돌 직전에 둥실 떠올라 이내 내려앉았다.
“내가 이래 봬도 대마법사란다.”
허공에서 서서히 내려서며 하이케가 싱긋 웃었다. 그들 다 함께 사뿐히 착지했다.
아레아가 입을 열었다. 그녀답지 않게 겸연쩍은 눈치였다.
“하이케.”
“아주 주변 신경 쓰지 않고 저희들끼리 잘도 붙어 있구나. 걱정할 필요 없겠어.”
그 소리에 두 사람 모두 할 말이 없었다. 둘 다 일순 하이케의 존재를 잊고 있었기에.
여하간 그들은 성공했다. 비록 네 사람이었다가, 이제는 셋이었지만.
마지막으로, 하나의 관문이 남아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움직였다. 마계의 입구가 있는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