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83
482
헬무트
482화
“하이케!”
아레아는 갑작스레 닫혀 버린 던전 입구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문을 닫아 버린 것은 하이케.
믿을 수 없었다. 언제 그토록 그녀가 희생적이었던가.
그러나 다음 순간, 던전이 온통 뒤흔들렸다.
쿠르릉!
하이케가 한 번 차단했음에도, 바깥이 붕괴하는 여파가 미치고 있었다.
아레아는 던전의 주인으로서 던전을 지탱하는 데 온 힘을 써야만 했다.
다행히 홀로 오래 버틸 필요는 없었다. 시안이 깨어났기 때문에.
“……으응? 어떻게 된 거지.”
눈을 뜬 그가 힘을 발휘하자 던전은 금세 안정화되었다. 그제야 비로소 모두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아레아는 주저앉은 채 바닥을 쳐다보았다. 하이케의 운명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녀를 위로한 것은 이번엔 헬무트 쪽이었다. 헬무트의 손이 아레아의 어깨 위에 올라앉았다.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말없이 공감을 나누었다.
헬무트는 엘라가를, 아레아는 하이케를 잃었다. 가장 어려운 목표를 이루었음에도, 그들이 치러야 했던 희생에 마음이 무거웠다.
상황을 눈치채고 가라앉았던 다른 이들은 곧 분위기를 회복했다.
단순하여 긍정적인 아스카와 루크 예거가 그랬다.
일단 목표를 달성하지 않았나. 그들은 마왕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했다.
“우리는 이제 용사로군.”
시안이 중얼거렸다. 용사 시안이라니, 그렇게 낯선 호칭은 처음 달아 본다.
“다 끝난 건가? 제발 끝이었으면.”
아스카가 속마음을 드러냈다.
루크 예거가 하하 웃었다.
“여태까진 속인 거였고, 나가 보면 마왕이 짠!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기사단장이라서 다행입니다.”
그런 재미 없고 재수 없는 농담을 하다니. 말단 기사였으면 눈칫밥 먹고 살았을 터.
아스카가 눈을 흘기자 루크 예거가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하자 금세 던전 안은 시끌벅적해졌다.
마음을 가다듬은 아레아가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바깥세상과의 연결 고리가 고장 났어. 복구하고 좌표를 잡아야 입구를 열 수 있어.”
인간 세상으로 향하는 입구를 열어야 할 것이다.
“얼마나 걸리는데?”
아스카가 물었다.
“글쎄. 나도 마력을 회복해야 하고……. 며칠 걸릴 테니, 쉬면서 당분간 던전에서 지내. 식량은 충분하니까.”
“오, 여기서 정령 소환된다.”
시안이 소환한 빛의 정령이 빙그르르 춤추며 허공을 맴돌았다. 그렇게 일행의 던전 탐사가 시작되었다.
“물건 부수지 마.”
그들을 초대할 생각이 없었던 던전 주인은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마력 회복에 들어갔다.
“여기 왜 이렇게 좋아?”
“오, 여기 이런 고급 소파가. 과연 아레아 님이로군.”
“부자네, 부자야!”
“……마법이라는 건 놀랍군.”
소란 속에서 헬무트는 그를 위해 마련된 전용 수련장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그 역시도, 그곳에서 비스를 회복해야 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신성 결계가 붕괴했다는 건, 파헤의 숲에 있던 그 수많은 마물이 인간 세상을 향해 쏟아져 나간다는 소리다.
빨리 회복하고 나서서, 놈들을 상대해야만 한다.
‘장벽은 괜찮겠지.’
조금은 버텨 줄 수 있으리라. 그 못 미더움이 상황을 급박하게 느끼게 했다.
헬무트는 잠자코 비스 수련법에 들어갔다.
* * *
장벽에서는 험난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생과 사가 오가는 전장.
거기 있는 인간들 모두가, 생전 처음으로 마물을 상대로 한 전쟁을 겪는 중이었다.
이것은 토벌이나 사냥 따위가 아니다.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캬아악! 키요오오오!
장벽을 향해 달려드는 마물의 울부짖음이 고막을 찢었다.
오금이 저릴 만큼 흉악한 형태와 크기를 갖춘 파헤의 숲의 마물들!
놈들의 발톱에 스치기만 해도 빈사 상태에 이를 정도로 그 위력이 어마어마했다.
“오! 맙소사, 저 크기를 봐!”
“저쪽이다! 장벽 위로 뛰어올랐어!”
“막아라! 뚫리면 안 된다!”
신성 결계가 무너진 지 일주일 후, 공격이 시작되었다.
한 마리씩 나타나 얼쩡거리다가, 장벽에 달려들어 쓰러져 간 것도 잠시. 순식간에 수가 불었다.
협동 공격을 하는 놈들은 아니나, 제각기 달려드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그 하나하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마물들. 인간 세상에서 그만한 마물이 나타났다면, 그 일대는 위험지역으로 선포되었을 것이다.
마물들이 뿜어내는 마기가 장벽을 삭아 내리게 할 정도다.
마법사들이며 신관들이 끊임없이 복구하고 있었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헬무트 일행이 처치한 놈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장벽은 견고했으나, 밀려오는 마물의 공세는 상상 이상이었다.
놈들은 결국 견고한 장벽에서 빈틈을 찾아냈다. 기어이 발톱을 박아 넣고 장벽 위까지도 기어올라, 길게 포효했다.
크아아앙!
저 너머에서 탐스러운 인간 고기 냄새가 난다.
이 위의 거추장스러운 인간들은 무시하면 그만.
“또 올라온다! 일단 진입을 저지해!”
“아니, 저놈을 먼저 잡아야 한다!”
“장벽 아래로 떨궈!”
장벽 위로 올라탄 마물이 기사의 머리를 물어뜯고 우적우적 씹었다.
뇌수와 피가 장벽 위로 무참히 흩뿌려졌다.
그러나 인간 고기에 심취한 놈에게, 신성 마법이 떨어졌다.
캬오오오!
놈은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장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누군가가 질린 듯이 말했다.
“인간 고기 맛을 봤으니, 더 적극적으로 나오겠어.”
잠시 공세가 잦아든 사이 시신을 수습했다.
피비린내를 풍겼다간 마물을 더욱 자극할 뿐이다. 가장 가까운 동료들조차 슬픔에 잠기지 못했다.
모두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여기에 모인 인간들이 정예가 아니었다면 제대로 싸우지조차 못했으리라.
마물은 낮이고 밤이고 끊임없이 공격을 퍼붓는데, 인간의 수는 한정적이다.
교대로 싸우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놈들은 장벽을 파괴하며 기어올랐고, 마법사들은 장벽을 보수하며 결계를 쳤다.
그러나 방어선은 흔들리고 있었다.
약아빠진 한 녀석이 공세가 몰린 틈을 타, 장벽을 건너뛰고 안으로 진입했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몇몇이 급히 뒤를 쫓았다.
“절대 놓치면 안 돼!”
“마을 병사로는 막아설 수가 없다! 한 놈조차도!”
거의 모든 그럴 듯한 전력이 장벽으로 집중된 터. 나머지는 제 나라의 수도를 지키고 있었다.
이런 변방의 마을까지 병력이 미치지 못한다. 한 마리 마물이 마을 하나를 몰살시킬 수 있다.
그러니 한 놈도 들여보내선 안 됐다.
추적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숲속으로 들어간 마물은 조급하게 저를 쫓는 인간들을 역으로 쳐서 잡아먹었다.
파헤의 숲에서 살아온 마물이다. 숲은 놈에게 유리한 전장이었다.
허겁지겁 뒤를 쫓는 이들을 역으로 잡아먹는 발상이 자연스러울 만큼.
파헤의 숲에서 마물이 언제 인간에게 쫓겨 본 적 있던가.
놈은 그저 기다리고 있었던 것뿐이다. 인간들이 먹기 좋게 기어들어 오기를.
“빌어먹을 다람쥐 자식.”
홀로 남은 용병이 욕설을 지껄였다. 긴장감으로 온몸에 땀이 죽죽 흘렀다.
실제 다람쥐가 보았다면 기겁하고 도망갈 만큼 흉악한 형상이기는 해도, 마물은 다람쥐와 유사했다.
지독하게 날쌘 움직임. 놈은 나무와 나무를 옮겨 타며 선발대를 잡아먹었다.
벌써 동료들은 모두 물려 갔다. 살아남은 것은 그뿐이다.
그러나 그도 곧 동료들의 뒤를 따르게 되리라.
너무도 서두른 게 패착이었다.
‘나도 여기까진가.’
절대적인 강적 앞에는 그의 경험도 실력도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절망이 잠식하려던 두 눈에 곧 굳은 의지가 피어올랐다. 아니, 포기하기엔 이르다.
살고자 하면 살 구멍은 나오는 법. 곧 지원 병력이 도착할 것이다.
숲의 입구와 가까워졌다. 놈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배부르게 인간 고기를 먹은 터. 포기한 걸까?
……아니, 그럴 리가.
그림자가 먼저 드리웠다. 용병은 본능적으로 검을 들었다.
콱! 우당탕!
손아귀에 강한 충격이 일었다. 검을 놓치고 그대로 나가떨어지면서 용병은 죽음을 예감했다.
그러나 그때.
촤아아아!
그림자의 머리가 반으로 갈리는 모습이 바닥에 비쳤다.
독한 피비린내가 공기 중에 피어올랐다. 용병은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왜 혼자 있지?”
창백한 흰 피부에 눈과 머리는 밤이 드리운 듯이 검었다.
그자가 단 일 검에 마물의 머리를 도려낸 것이다.
“동료들을 잃고 퇴각하던 중이었습니다.”
용병은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는 눈앞의 이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만한 무용이라면.
“당신은 혹시.”
그 순간, 저편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거기 괜찮은 거야?”
“마물은 잡았나?”
우르르 몰려오는 수십 명의 용병들. 그들은 마물을 베어 낸 이의 모습을 확인하고 멈칫거렸다.
“헬무트! 아니…… 헬무트 님?”
페이스 용병단의 타냐였다. 그녀는 경악과 놀람 서린 얼굴로 그, 헬무트를 쳐다보았다. 모두가 그러했다.
그의 소문을 페이스 용병단에서도 익히 들었다. 그들 모두가 헬무트를 기억하고 있었다.
생명의 은인을 그리 쉽게 잊을 리 없으니까.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파헤의 숲으로 떠난 그들이 임무에 성공했다는 것은 알았다.
모두가 파헤의 숲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었기에.
그러나 이어 파헤의 숲 중앙에서 발생된 강력한 공간 왜곡.
숲 중앙 인근이 온통 초토화되었다. 거기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거기로 향한 이들이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기다리는 이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헬무트가 여기에 있었다.
“타냐.”
헬무트는 놀란 듯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녀뿐만 아니라 페이스 용병단의 사람들도.
함께 임무를 수행했던 타냐의 오빠 퓌엔, 마로스, 션, 베른, 우터.
5년여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낯설어졌으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과 유사한 얼굴들.
처음 파헤의 숲에서 나와 희망에 젖었던 그때의 아릿한 향수가 살아났다.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여기에서 나타난 거죠?”
“이 근처에서 게이트가 열렸으니까.”
조금 전, 아레아가 던전의 입구를 여는 데 성공했다. 이 근방이었다.
헬무트는 이곳에 마물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이쪽으로 왔고 나머지는 곧장 장벽으로 향했다.
떠났을 때 이상으로 강력하고도 온전한 전력이었다. 그들은 큰 힘이 되리라.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도 남을 만큼.
“목숨을 구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용병의 얼굴을 헬무트는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누군가와 닮았기 때문에.
“에단 쿠드로?”
“……제 아버지이십니다.”
에단의 아들이 용병 일을 하고 있었던가. 놀라운 우연이었다.
다리언이 에단을, 헬무트가 그의 아들을 구했다. 역사가 반복되고 있었다.
헬무트는 잠시 뒤에 내뱉었다.
“에단에겐 나도 빚이 있으니. 감사는 아버지에게 하도록.”
말을 마친 헬무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잡담할 시간이 없어. 장벽으로 향하지.”
한동안은 전쟁이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아직 수많은 일들이 헬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매듭짓고 나면, 뒤를 돌아볼 여유가 생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