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84
483
헬무트
483화
비슷한 시각, 마물들은 하나둘씩 장벽 위로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점점 그 수가 늘고 있다. 방어선은 곧 뚫리리라.
그러나 놈들이 인간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그때, 빛이 번쩍였다.
“전격의 아리아!”
콰과광!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법에 직격당한 마물 몇 마리가 나가떨어졌다.
“잠시 검을 빌리지.”
쓰러진 기사에게서 검을 취한 레반트가 바로 마물에게로 달려들었다.
그간 힘을 회복한 그는 성검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강력한 성기사였다.
신성력을 실은 레반트의 검이 적들을 가차 없이 베어 넘겼다.
“레반트 님, 돌아오셨군요!”
신관들의 반가운 외침을 뒤로 하고서.
“타이밍 좋은데?”
이어 아스카가 장벽 위로 뛰어올랐다.
쩌저저적!
상처가 얼어붙은 마물은 그대로 장벽 아래로 떨어졌다.
주변을 둘러본 루크 예거도 마물을 향해 달려들며 쓰러진 기사에게 외쳤다.
“팔마 기사단원인가? 부상을 입었으면 물러나 있도록!”
“예, 기사단장님!”
시안은 장벽 아래에 섰다. 그가 땅으로 손을 뻗자, 파헤의 숲 쪽 바닥으로부터 나무 덩굴이 자라나 손상된 장벽을 감싸고 기어오르는 마물을 떨쳐 냈다.
공격 마법을 펼친 아레아의 손길이 배가 뚫린 채 쓰러진 용병에게 이르렀다.
순식간에 상처가 회복되었다. 용병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고맙습니다.”
“당신.”
아레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헬무트와 대회에서 싸운 적 있는, 꽤 유명한 용병이었다. 이름이…….
‘허턴이었지.’
허턴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새하얘진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리노사에서 의뢰를 받아왔는데, 이곳에서 삶이 끝나나 했습니다. 뭐, 싸우다가 죽는 것은 용병에게 퍽 어울리는 운명입니다만.”
험난한 일인 줄 알고도 의뢰를 승낙했지만, 내심 스스로의 노련함에 자신이 있었던 터.
이렇게 아찔한 상황까지 몰렸다가 가까스로 살아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레아가 냉담하게 대꾸했다.
“살았으니 더 싸우라는 뜻이겠지요. 물러나서 몸을 회복하세요.”
“예.”
이제 그들은 이곳을 지켜야 했다. 아레아는 장벽 반대편을 쳐다보았다.
헬무트가 오고 있었다.
‘나오자마자 또 시작이로군.’
그것도 때맞춰 급박한 상황에 도착했다. 장벽을 수호하는 것까지 마쳐야만 비로소 그들의 역할이 끝난다.
평온한 휴식은 그 이후에 누려도 늦지 않았다.
어느덧 장벽 위로 솟구친 헬무트가 그녀의 곁으로 내려앉았다.
“빨리 끝내자고.”
그의 말에 아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든 고난을 헤치고 비로소 돌아온 지금, 두려운 것이 없었다.
그들은 함께였다. 앞으로도 쭉.
* * *
신성 결계가 사라진 이후, 한 달이 지나서야 마물들의 공격이 멎었다.
수많은 마물이 스러지고 나서야 비로소 장벽을 넘을 수 없는 절대적인 무언가로 인식한 것이다.
잠시 공세가 멎은 것인지, 아니면 재차 밀려들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은 소강상태.
그것으로 제2차 마왕 전쟁이 종식되고 인간 세상은 안정을 찾아갔다.
신성 결계는 사라졌으나, 마물과 인간의 땅은 여전히 장벽을 경계로 갈렸다.
파헤의 숲은 여전히 미지의 땅이었고, 오래도록 그러하리라.
장벽에 관한 한, 비상시에 병력의 파견이 즉각 이루어지기로 협정을 맺었다. 각국에서는 병력을 보내 장벽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파헤의 숲에서 살아 돌아온 영웅들. 헬무트, 아레아, 시안, 아스카, 루크 예거, 레반트.
죽어 간 자와 살아 돌아온 자의 이름이 나뉘어 비석에 적혔다. 마왕을 물리친 용사로서.
신전의 공적 하이케와 대신관 레비나의 이름이 나란히 있는 모습이 묘했다.
이그렐의 종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파헤의 숲 어딘가에서 살아 있으리라 여겨질 뿐.
다른 두 지배자, 칸트라와 바하렉 또한 그러했다.
길고 험난한 싸움이었다. 그 끝에서 헬무트 일행은 흩어져 제자리로 돌아갔다.
모국에서 견제받든, 아니면 대우받든 앞길은 어떨지 몰랐지만, 그들은 영웅이었다.
세상을 구한 영웅으로서, 영예를 안고 돌아가 각자의 삶으로 나아갈 차례였다.
제각기 앞으로 향하는 궤적을 그리다 보면 분명히, 언젠가 한 번은 교차하게 되리라.
한 번, 혹은 그 이상.
새로운 빛이 내리고 있었다. 캄캄한 새벽을 거치고 맞이한 눈부신 아침이었다.
에필로그
이제 막 스무 살을 맞이한 청년, 핀은 일 년 전 오랜 꿈의 첫 발짝을 내디뎠다.
용병단에서 일한 돈을 모아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자신만의 가게를 차린 것이다.
음식과 술을 파는 작은 선술집을 열며 그는 스스로 포부를 밝혔다.
‘이 가게를 키워서 제도에 황족까지 드나드는 큰 레스토랑을 차릴 거야!’
막상 장사는 쉽지 않았다.
솜씨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작은 도시의 구석진 곳에 위치한 선술집이다. 손님의 눈에 띄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페이스 용병단원들이 종종 들르고, 오가는 상단에 소문이 나면서 손님이 늘고, 슬슬 마을에 단골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던 중 어떤 날이었다.
노을이 내릴 무렵, 핀은 가게를 열었다.
어제 들른 상행도 떠났고, 당분간은 한산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손님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핀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손님은 머리까지 눌러쓴 두건을 슥 벗어 내렸다.
그를 본 순간 핀은 화들짝 놀랐다.
“어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핀이 손가락을 쳐들었다.
낯익은 인물이었다. 지독하게 잘생긴 얼굴도 그러했지만, 그 분위기. 암흑처럼 짙은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
단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식당을 차리면 오라고 했지.”
그제야 핀은 그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헬……무트?”
“맞아.”
핀은 그리 기억력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줄곧 간직해 온 기억이 있었다.
자신에게 새로운 꿈을 갖게 해준 친구. 5년 전의 그 헬무트가 여기에 있었다.
“여기에는 어떻게…….”
“타냐에게 들었어. 여행 도중에 들렀지.”
헬무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핀의 앞쪽 자리에 태연스레 앉았다.
핀은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살폈다.
검은 망토 아래로 감춰진 고급스러운 옷차림이 눈에 띄었다. 헬무트는 대단한 실력의 검사이니, 작위를 받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복장이…… 그새 귀족이 된 거? 아니 귀족이 된 겁니까.”
페이스 용병단에서 떠나온 지 1년이었다.
간혹 페이스 용병단원들이 들르는 터라, 연락은 이어지고 있었지만, 용병이 아니기에 소식에는 어두웠다.
게다가 그들은 요즘 핀의 선술집을 찾지 않았다. 다들 파헤의 숲 최전선으로 떠났다고 하던가.
“귀족이 되었지. 하지만…… 여기는 헬무트로서 온 것이니 신경 쓸 필요 없어.”
헬무트는 선술집 안쪽을 슥 훑었다.
5년 전의 핀은, 용병과는 어울리지 않는 겁 많은 소년이었다.
작지만 공언한 대로 그의 가게를 차린 걸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완벽하게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간 두 사람의 인생이 추억을 넘어 이곳에서 교차되었다.
핀이 웃으며 팔뚝을 걷어붙였다. 용병과는 다르게 잡일로 단련된 팔뚝이 불끈거렸다.
“좋아, 모처럼 온 것이니 내가 솜씨를 발휘해 보지! 기대하라고!”
그가 주방으로 사라지고 난 뒤, 누군가가 선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진녹색 로브를 입은 아름다운 은발의 마법사, 아레아는 자연스레 헬무트 맞은편에 앉았다.
“음식은 시켰어?”
“주방장이 솜씨를 발휘하겠다더군.”
“아, 그래? 그, 처음 사귄 친구라던 그 사람이지?”
“맞아.”
아레아가 생긋 웃었다.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마주 보았다.
그들은 여행 중이었다. 휴가 중이기도 했다.
시급한 일들을 모두 처리하고 나자, 리노사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거기서 헬무트는 후계자로서의 길을 걸어갈 터.
리노사 대공은 유예를 요청한 헬무트에게 흔쾌히 자유를 내주었다.
‘너는 네 할 몫을 훌륭히 완수했다. 1년을 줄 테니, 충분히 쉬고 돌아오거라. 혹은……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그 말은, 헬무트가 리노사의 후계자이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 아니었다.
만약 원하지 않는다면, 떠나서 자유롭게 살아도 좋다는 뜻이었다.
헬무트는 더 이상 어둠의 싹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제약은 사라졌다.
이제는 굳이 리노사라는 무기와 명분을 내세울 필요도 없었다.
그는 세상을 구한 영웅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불현듯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바덴으로 오면서 잠시나마 자유로웠던 시간. 그 시간이 퍼뜩 생각났다.
기회였다. 모든 것을 놓고,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다닐 기회.
헬무트는 주어진 1년을 마음껏 누리기로 했다. 당연한 듯이 아레아가 함께였다.
아레아가 물었다.
“다음에는 어디로 가지?”
“글쎄, 지도를 한번 볼까.”
“이렇게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파헤의 숲으로 가 버릴지도 모르겠어.”
“가게 되면 가 보지. 그쪽은 어떻게 되었을지도 궁금하군.”
“아예 대륙을 건너가 볼까? 바다를 건너서…….”
“그것도 괜찮지.”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는, 천천히 의논해 볼 셈이었다.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수많은 가능성.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길이었으니까.
물론, 수련도 멈추지 않을 참이다.
마왕을 물리친 이후, 헬무트는 검사로서 또다시 성장을 이루었다.
자신이 검사로서 어디까지 이를 수 있을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언젠가 헬무트는, 엘라가를 뛰어넘으리라. 그의 기억 속에 마지막으로 남은 엘라가를.
그렇게 되면, 헬무트는 누구도 제칠 필요 없는 정점에 올라서게 된다. 그는 그 정점을 그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고되고 지난한 길일지라도, 이미 수 없는 시간 걸어온 길이니 어려움은 없으리라.
“자, 따끈따끈한 요리가 나왔습…… 으악!”
아레아의 모습을 본 핀이 귀신에 홀린 듯이 비명을 질렀다.
그릇을 엎지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그릇을 테이블에 얹어 놓으며 물었다.
“누, 누구시지?”
“내 약혼녀.”
“아레아라고 해요.”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는 아레아를 향해, 핀은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피, 핀입니다.”
그는 바로 헬무트를 향해 묘한 눈빛을 보였다. 어디서 이런 약혼녀를.
그것만으로 헬무트의 성공을 가늠하는 핀의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이 오갔다.
그는 곧 등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갔다.
“식사를 마저 내오겠습니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다시금 대화가 도란도란 이어졌다.
가까운 미래부터 먼 미래까지 이야기하는, 포근하고 따뜻한 시간이었다.
해가 완전히 지고 선술집을 둘러싼 어둠이 차츰 짙어졌다.
그 안식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선술집의 불빛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조차 밝게 느껴지듯이 그렇게.
그것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헬무트가 기어코 움켜쥔 빛이었다.
후기
이것으로 헬무트 2부가 끝이 났습니다. 아직 외전이 남았지만, 여기서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헬무트의 연재를 시작한 지 어느덧 2년의 시간이 흘렀군요.
언젠가 3부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질지도 모르니 ‘완결!’이라고 확정 짓지는 않을 테지만, 제가 구상한 본편은 여기서 끝입니다.
지난 2년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마감한 지금, 감회가 무척 새롭습니다.
처음으로 거의 500편에 달하는 장편을 쓰다 보니, 힘에 부칠 때도 있었지만 결국 무사히 끝맺음하게 되어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듯 절망 속에서 희망을 거머쥐고, 상실이 있기에 그 자리에 채워지는 것의 가치를 알고, 밑바닥에서 새로이 거듭나는.
슬픔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기쁨이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간 긴 여정에 함께해 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