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94
493화
아스카와 샤를로트는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각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어색하게 눈빛을 나누었다. 아니, 어색해하는 것은 한 명뿐이었다.
“오랜만이지?”
“예, 그렇군요. 그간 잘 지내셨는지.”
샤를로트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사르르 내려와 얼굴 한쪽을 덮으며 미소가 비쳤다.
아스카는 그 작은 변화에 숨을 들이켰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레아에게는 둔감하더라도 샤를로트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잘 지냈지. 너는 어때.”
“리노사는 작은 나라라 마물의 출몰에도 그리 영향받지 않아 어려움 없이 지낼 만했습니다. 선배는 그간 제국 신민들의 안전을 위해 많은 임무를 수행하신 걸로 압니다.”
“아, 뭐. 그랬지. 좀 바쁘기는 했어.”
아스카는 그걸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제 입술과 머리통을 때리고 싶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떻게 이렇게도 할 말이 없단 말인가.
“뭐야? 이 어색한 분위기는.”
시안이 다가와 아스카의 어깨를 툭 쳤다. 그는 아스카와 달리 샤를로트에게 편안하게 말을 건넸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군요, 리노사 대공녀.”
“저도 그렇습니다.”
샤를로트가 가볍게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냈다.
“일단은 이동하도록 하지요.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그것으로 짧은 대화는 마무리 지어졌다. 아스카는 평온해 보이는 샤를로트의 얼굴을 힐끔댔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앞서가는 샤를로트를 두고 시안이 아스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고맙지?”
“……그래, 아주 고맙다.”
“충고 하나 하자면,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말을 잘하지 못하니까 생각을 좀 해두는 게 좋겠어. 작전을 짜듯이.”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너나 잘해.”
“잘할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시안은 콧방귀를 끼고 냉큼 걸어 나갔다. 그러고 보면 이 중에서 가장 인간인 것은 시안인데 유달리 그만 소식이 없었다.
아카데미에서의 그 수많은 친분을 두고도. 엄청나게 예쁜 아레아와 하이케, 이그렐의 인간 모습을 보고도 신기할 정도로 태연하지 않았던가.
아스카는 시안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저 녀석, 냉정하네.”
샤를로트한테도 전혀 끌리지 않는 것 보면 그런 게 틀림없다며 아스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쪽의 가정도 떠올릴 수 있었지만, 늘 붙어 다녔던 그의 입장에선 상당히 소름 돋는 의심을 품어야만 한다.
아스카는 그 경우를 자연스레 의식에서 배제했다.
‘그래, 시안 녀석이야 알아서 하겠지. 내가 문제야.’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며 아스카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 * *
“오랜만이야, 샤를로트.”
헬무트는 샤를로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뒤이어 한 마디 덧붙였다.
“그간 수고했다.”
“예, 건강히 지내신 듯하니 기쁩니다.”
헬무트는 샤를로트에게 후계자의 권한을 위임하고 떠났다.
리노사가 별반 위기를 겪은 적이 없었으므로 샤를로트는 헬무트에게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그가 온전히 자유로워지기를 바랐기에.
하지만 헬무트는 그동안에도 나름의 활약상을 보였다.
“휴가를 즐기시기를 바랐는데 일이 공교롭게 되었군요.”
“리노사에서 공무를 처리하는 것보다는 나았겠지. 네게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샤를로트의 눈동자가 살짝 크게 뜨여졌다.
“많이 변하셨군요.”
그가 그런 말을 그토록 편안하게 던지게 될 줄은 몰랐다. 어딘지 느슨해진 표정이 눈에 띄었다.
“알다시피 나는 늘 고삐를 꽉 쥐고 살았으니까.”
이제는 그럴 필요 없었다. 위기가 산적해 있더라도 어둠의 싹이 사라진 그는 평범한 인간이 되었으니까.
헬무트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이 실렸다. 그에게 자라난 인간성은 샤를로트의 것과 비슷한 색채를 띠었다.
선천적인 기질. 그 때문에 이 남매가 아카데미에서부터 서로에게 이끌린 것이리라.
이어 아레아와 샤를로트도 짤막하게 몇 마디 인사를 나누었다. 그 후 아레아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설명을 시작했다.
“바하렉이……. 그가 잠잠한 것이 이상하다 했어요.”
샤를로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남은 파헤의 숲의 지배자들을 떠올려볼 때 그가 가장 인간에게 적대적이었다. 공동의 적이 사라졌으니 적으로 돌아섰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아레아가 설명을 이어갔다.
“장벽의 마법 결계를 최대한 강화해 놨어. 하지만 바하렉이 파헤의 숲의 모든 마물들을 이끌고 온다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지.”
“그렇게까지 대단한 수의 마물들이 밀려올까요?”
“우리가 중앙에 이르기까지 상대했던 놈들을 생각해 봐. 파헤의 숲은 넓고 천 년이란 세월이 그 안에 응축되어 있어. 그보다 덜하진 않을 거라고 가정해야 해.”
시안이 입을 열었다.
“그래, 요샌 좀 뜸해졌지만 내가 지키고 있을 때도 마물들의 공세가 만만찮았거든. 녀석들도 점점 더 똑똑해지는 것 같아.”
마기의 영향을 받는 마물들은 일반 짐승보다 지능이 높다.
동족들이 쓰러져나가는 꼴을 보면서 그들도 배우는 게 있었을 것이다.
그런 놈들이 파헤의 지배자가 이끄는 군대로서 밀려온다면 확실히 위기는 위기일 것이다.
바하렉은 마성을 가진 마물. 얼마나 지능적으로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여하간 장벽을 끼고 맞서 싸우면 놈들을 모조리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와중에 장벽을 넘어가 뿔뿔이 흩어지는 마물들이 생긴다면 큰 문제였다.
장벽을 지켜내더라도 인간 세상이 초토화된다면 그건 실패나 다름없다. 하지만 어떻게 공격해 들어올지 모르는 마물을 상대로 전략이라는 걸 짜는 것도 큰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역할은 방어. 성공을 전제로 두고 최소한의 대가만을 치르도록 해야 한다.
아레아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전력을 보강하는 거겠지. 그래서 너희들을 부른 거고. 다행히 장벽 안쪽의 마물들은 그간 소탕 작전을 거쳐서 많이 제거되었어. 각국에서 정예를 보낸다고 해도 구멍이 뚫리진 않을 거야. 웬 흑마법사 녀석이 또 사고 치지 않는다면.”
신성 결계가 단시간에 무너진 것치고는 인간들의 공조 체계는 꽤나 굳건히 작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중대한 역할을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악명 높았던 신전이었다.
신전은 가장 많은 전력을 장벽을 지키는 데 보내두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들도 마법사나 검사들과 접하면서 폐쇄적인 기질을 제법 벗어냈다.
그렇다고 한들 특유의 선민의식과 우월감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인간들 위에 군림하여 지배하고자 하는 욕심은 상당히 덜어냈다.
그 변화에는 많은 요인이 있었다. 신전에 적대적이면서도 협력하여 함께 싸웠던 인간들, 대표적으로 제국과 바소르.
루멘의 안배에 따라 구원받은 뒤 희생을 택했던 마물 엘라가나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신전의 공적 하이케, 그들의 미담은 심지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결국 신전의 높으신 분들은 루멘의 뜻은 높은 곳에서 이루어지므로 그 아래 물길에서는 그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니 굳이 세세하고 엄격하게 단속할 필요 없다는 편의적이고 귀납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여하간 다행히도, 인류의 위기와 맞서며 생각보다 신전과의 공존은 수월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인원을 교대시키면서 장벽을 떠나갔던 신전의 주요 인물도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왔다.
헬무트 일행이 막 대응책을 논의하고 있던 그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공기부터 달라지는 강렬한 신성력의 존재감이 찌를 듯이 퍼져나갔다.
“모두, 오랜만이오.”
딱딱한 말투. 친근감 없는 목소리. 하지만 모두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면서 낯설지 않은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비록 적이었더라도 함께 목숨 걸고 싸웠던 동료이기 때문이리라.
아스카가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여전히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녀석이야.”
눈부시도록 흰 갑주를 입은 레반트가 한쪽 눈썹을 밀어 올렸다.
“칭찬으로 듣겠소. 그리고 나의 신분과 지위에 걸맞게 예를 갖춰주기를. 나는 이곳에 신전을 대표하는 대신관으로서 왔소.”
“언제 대신관이 되었지?”
“대신관의 수가 급감하였으니 누군가는 그 자리를 채워야 하지. 더 이상 내가 수면 아래에 존재할 이유가 없잖소. 마땅히 내가 있어야 할 자리요.”
이미 레반트가 누구인지는 온 사방에 소문이 난 터였다.
성검의 주인. 루멘의 검. 그리고 파헤의 숲에서 마왕을 퇴치하는 데 공헌한 영웅.
레비나를 대신하는 대신관으로서 신도들 앞에 내세워질 누군가로서 그가 적합했다.
외견에서부터 어딜 보나 루멘의 현신 같은 분위기를 풍기니까. 게다가 눈에 띄는 미남이라 전시 효과가 상당했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신전의 새 얼굴로서 모습을 비친 덕분에 한창 타격을 받았던 신전의 세는 다시 회복세를 타고 있었다.
그건 이제껏 할 일 없이 다른 나라들을 괴롭히다가 전문 분야인 마물 사냥에서 활약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앉지. 이번에도 함께 싸워야 할 테니.”
헬무트와 레반트는 잠시 일별하곤 서로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들에게 어울리는 거리감이었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인물은 루크 예거였다. 그는 특유의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다들 오랜만입니다.”
“루크 예거.”
헬무트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반트를 대할 때와는 달리, 반기는 분위기가 거의 모두에게서 풍겼다.
“다들 잘 지냈습니까? 헬무트, 더 강해진 것 같군. 유감이야.”
그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헬무트는 가볍게 맞잡았다.
“유감이라니. 강해졌으니 좋은 거 아닙니까.”
“바소르는 별다를 게 없지요. 마물이야 늘 들끓었으니까. 딱히 더 많아진 것도 모르겠더군요.”
“마법사협회에서 가져다준 파헤의 숲 마물의 예측 분포도에 의하면 대부분의 마물이 바소르 쪽을 기피하더군요.”
시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루크 예거가 미소를 지었다.
“바소르가 딱히 살기 좋은 환경은 아니지. 인간이든 마물에게든.”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난 인간이든 마물이든 자연히 강해지게 되어 있다.
이제는 퇴치당한 스콜피온도 강력한 마물이었듯이 바소르의 토종 마물들은 파헤의 숲 마물들과 비해 약하다고 할 수 없었다.
심지어 토종 마물한테 쫓겨 파헤의 숲 마물이 달아나거나 잡아 먹히는 경우도 발생했다.
사막이란 환경은 파헤의 숲 못지않게 혹독하기에 사막에 특화된 토종 마물들은 그들의 터전에서는 특히나 상대하기 까다롭다.
루크 예거가 덧붙였다.
“파헤의 숲 마물들도 숲 출신이니까 굳이 덥고 험난한 사막으로 오고 싶어하지 않을 테지.”
안락한 것을 추구하는 건 마물이나 인간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검성의 핏줄에 이끌리듯 바소르로 돌아온 루크 예거는 편한 길을 택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범상한 자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