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95
494화
얼마 뒤 닫힌 문이 또 한 번 열렸다. 화려한 미모의 여인이 미소 지은 채 들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이그렐.”
“파헤의 숲에서 헤어진 이후로 처음이로군. 다들 이 몸이 반갑지?”
교차하는 시선들 속에 적의는 없었다. 강력한 마물이지만 그녀는 이미 아군이나 해를 끼치지 않을 무언가로 간주된 상태.
하지만 방심하지 않고 시안이 의심스레 물었다.
“당신은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잖아요? 그런데 어쩐 일로.”
“여전히 그럴 생각인데? 바하렉을 상대하는 건 인간들 일이지. 나는 구경할 거라고. 너희들도 내 구경거리. 놈의 습격 사실을 알려준 내게 그 정도의 자격은 있지 않겠어?”
뻔뻔스럽게 장벽 안쪽을 누비고 다니는 이 마물은 여전히 즉흥적이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그렐은 반가운 듯한 눈빛으로 일행을 쳐다보았다.
“다들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색다른 기분이야.”
파헤의 지배자로서건 마물로서건, 그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감정이다.
인간들과 엮이기를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주변을 슥 돌아본 이그렐이 이내 아레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보이지 않는 얼굴이 떠오르네. 이 허전한 기분은 뭐지? 인간이 내게 이런 걸 느끼게 할 줄은 몰랐어.”
하이케. 그 이름이 떠오른 순간 아레아의 표정이 움찔 굳어졌다.
“……시신도 남기지 않으셨지요.”
공간의 틈새에서 뭉개졌을 테니까. 레비나도 그랬다.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고는 하나 마음이 무거워지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작 레반트는 신념 어린 얼굴로 말했다.
“영광스러운 임무를 수행해내셨으니 루멘의 품에서 그 누구보다도 빛나실 거요.”
단호하게 내뱉는 말투에 슬픔은 이미 가시고 없었다.
“이 광신도 자식…….”
아스카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성기사에게 광신도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듯 어색했다.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가던 도중 레반트가 입을 열었다.
“대책을 떠올리기보다는 노닥거리기 위해서 모인 것 같군.”
파헤의 숲으로 향할 때와 같은 긴장감이 없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들은 이미 가능성이 매우 낮은 임무를 성공해냈기에 골치 아프기는 해도 위기라고는 할 수 없는 사태였다.
헬무트의 입가에 얼핏 웃음기가 피어올랐다. 그 본연의 기질에 가까운 호전적인 미소.
“그가 빨리 나타나 줬으면 좋겠군. 모처럼 지루하지 않게.”
“자신 있는 거 봐라. 난 하도 마물 소탕하며 다녔더니 이젠 좀 끝을 보고 싶은데.”
“이번 일이 끝나면.”
헬무트는 단언했다.
파헤의 숲 지배자의 패퇴는 마물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줄 것이다. 저 장벽을 넘었다간 어떻게 될지. 그것은 마성으로서 모든 마물들에게 각인되리라.
그렇다면 이전보다 이곳은 한층 평화로워질 것이다.
마물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분리되는 것이 맞았다. 때로는 그 선을 넘나드는 존재가 있을지라도.
* * *
그 시각, 선을 넘나드는 대표적인 존재는 맹렬히 달리고 있었다.
헬무트가 있을지 모르는 그곳, 장벽을 향하여. 동시에 그의 고향 파헤의 숲을 향하여. 작은 몸이지만 속도는 공기를 뚫는 소리가 들릴 만큼 빨랐다.
날쌔게 달리고 있던 엘라가가 문득 물었다.
[뮤트. 우리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거냐?]돌아온 것은 석연찮은 대답이었다.
[가까워지고 있다.] [얼마나?] [그건 모른다. 분발해 주길 바란다.] [내 등에 타서 편승하는 주제에 도움도 안 돼!]엘라가가 분통을 터뜨렸다. 안 그래도 작아진 상태, 방향은 잡았지만, 무성한 숲속에서 시야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고양이 몸이 유용한 건 건물 그득한 인간 세상에서뿐이다. 이 기생충 같은 녀석한테 화를 낸다고 해도 해결되는 일은 없다.
엘라가는 화를 누르며 물었다.
[그럼 근처에 인간 마을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냐?]인간 마을에는 지도라는 게 있으니 위치를 가늠하기 수월할 터.
뮤트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초감각을 동원하는 듯이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이내 말했다.
[마침 인근에 꽤 큰 인간 마을이 있다.] [좋아, 그리로 향하지.]얼마 후 엘라가는 수월하게 큼직한 규모의 인간 마을에 들어섰다.
이리저리 오가며 말을 나누는 인간들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이상하게도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도 인간들에게 익숙해졌군.’
[좋아, 지도를 찾아보는 거다.]엘라가는 지도란 게 어디에 있을지 고심했다.
‘아마 서점이라는 곳에 지도가 있었지?’
아니면 여관이라든가. 보통 여행자들이 묵는 숙소에 그런 게 있었던 것 같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엘라가는 마을을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발을 놀렸다. 총총거리며 걷는 새하얀 고양이는 사람들의 눈에 띄기에 충분한 존재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엘라가를 향해 모여들었다. 호기심과 호의가 섞인 눈빛들.
“응? 웬 하얀 고양이가.”
“집고양이 같은데, 왜 이런 곳에 있지? 누가 버린 건가.”
“털이 깨끗한데?”
“정말 예쁘다.”
“우리 집에 가자!”
“배고프지? 맛있는 거 줄게!”
엘라가는 뻗어오는 손길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장벽을 두고 있는 것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포위망이었다.
결국 붙들려 어떤 소녀의 품에 달랑 안긴 엘라가는 불만스레 소리를 냈다.
“냐아아아옹!”
“옳지, 착하다!”
누군가의 집으로 납치당하면서 엘라가는 당황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이 인간들이.’
하지만 인간들의 따뜻한 손길이 나쁘지 않은 건 사실이다.
엘라가는 모처럼 인간들의 사랑을 한껏 받으며 소박한 환영회를 맞이할 수 있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왔다는 느낌을 한껏 느낄 수 있는 환영회였다.
* * *
“크아아아앙!”
사나운 포효가 허공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파헤의 숲을 뒤흔들기에 족한 거칠고 위력적인 파동.
그리고 그곳에 마물들조차 공포스럽게 느끼는 존재, 파헤의 숲 서쪽의 지배자가 있었다.
바하렉이 씨익 웃었다. 그가 자랑하는 송곳니가 허공에 드러나며 섬뜩한 빛을 발했다.
‘이만하면 충분할까.’
바하렉은 파헤의 숲의 마물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으며 인간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를 마쳤다. 수많은 마물들이 장벽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인간들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준비 기간이 길었다.
하지만 피식자의 세상을 탐하는 것은 포식자의 본능이다. 가로막힌 장벽은 도전의 대상일 뿐.
진작에 죽은 나호에 이어 중앙 권역의 지배자가 사라지고 이그렐과 바하렉도 휴면에 들어간 그때, 파헤의 숲에는 일순 권역도 경계도 사라진 상태였다.
마물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웠다. 그간 무료했던 마물들은 신성 결계가 풀리자 홀린 듯이 인간 세상으로 향했다. 본능적으로.
그 본능은 바하렉에게도 있었다.
[인간의 영역이라…….]바하렉의 눈빛이 기이하게 번뜩였다. 이제 영역 확장에 나설 시간이었다.
“크아아아아앙!”
또 한 번의 포효가 대기를 가른 직후 온 마물들이 움직였다. 바하렉 역시도 달리기 시작했다. 장벽을 향하여.
그것이 그들의 본능이었다.
* * *
“온다.”
아레아가 가장 먼저 그 말을 꺼냈을 뿐이지, 모두가 비슷하게 느끼고 있었다.
바닥으로부터 전해지는 진동. 밀려오는 숨 막히는 마기. 이그렐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비딱하게 말했다.
“때가 되었군. 바하렉 녀석이 언제까지 인내하나 했어.”
시안이 물었다.
“당신은 어쩔 건가요.”
“구경할 건데? 웬 눈먼 녀석이 날 공격하면 그 녀석 정도는 잡아주지.”
“정말 도움이 안 돼. 전 장벽을 먼저 살피러 가볼 테니, 다들 준비가 되면 오죠.”
어떤 식으로 진영을 갖출지는 이미 논의가 끝난 상태. 이제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기만 하면 되었다.
마왕도 때려잡았는데, 마물들이 아무리 많이 몰려온다고 한들 문제겠는가.
다들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바하렉, 권역의 지배자라지만 단 한 놈이다. 결국 그 한 놈을 때려잡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쿠우웅!
거대한 바위가 날아들어 장벽을 강타한 순간, 지진이 난 듯 장벽이 흔들렸다.
심지어 포격은 연달아 이어졌다. 쿠우우웅! 쿠우웅! 쿠웅! 사방에서 소음이 비산했다. 병사며 기사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장벽 위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고막이 얼얼하고 땅이 흔들리니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 와중에 장벽을 수복하는 것은 마법사들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공세가 너무 거셌다.
“이 녀석들…….”
무너진 장벽을 수복하며 시안이 깨달은 듯이 외쳤다.
“공성전을 흉내 내고 있어. 마치 인간처럼!”
아레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호랑이 녀석이 그렇게 똑똑해 보이진 않았는데.”
헬무트가 추측을 꺼냈다.
“다른 마물들이 장벽 앞에서 어떻게 쓰러져갔는지는 알고 있었을 테지. 놈들의 마성은 지식을 공유하니까.”
“무엇을 준비하느라 뜸을 들이는가 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군.”
아스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위가 날아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마기를 우글거리는 마물들 너머 그 어디선가에서 포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저걸 뚫고 저지하러 가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저 짓을 계속할까?”
아스카의 질문에 시안이 마력을 집중하며 대꾸했다.
“글쎄, 가져온 바위가 떨어질 때까지?”
그 순간, 한 마법사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위다!”
포물선을 그리면서 떨어지는 바위가 검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순간 하나의 형체가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콰지직!
푸른 실선이 허공을 난도질했다. 조각조각 갈라진 바위가 장벽 너머로 흩어져 떨어져 내렸다.
탁!
장벽 위로 내려선 헬무트가 뒤를 돌아봤다.
“위로 오는 건 내가 막아보지. 마법사들은 장벽 재건에 집중해.”
일단은 방어가 급선무다. 방어하지 않으면 싸우기도 전에 이 장벽 위의 기사들과 병사들부터가 짓뭉개질 테니까.
모두가 바하렉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느꼈다. 무식하게 달려들 거라고 생각했지 바하렉이 이런 수법을 쓸 줄은 몰랐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칸트라의 영역에서도 그랬듯이 마물들도 도구를 쓸 줄 알았다. 그것을 활용하는 것뿐이다.
서쪽 권역의 지배자라는 지휘관을 두었기에 조직적으로 행동하면서.
바하렉을 잡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공격이 시작된 이 시점에서,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한동안 쏟아지던 포격은 어느 순간 조금 잦아들었다. 아니, 방향을 바꾸었다.
“조심해!”
“맙소사, 절벽이 무너지고 있어!”
쿠르르르릉!
장벽과 연결된 절벽이 무너져 장벽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장벽 끝 쪽에 있던 인원들은 황급히 대피하고 마법사들이 그 잔해를 장벽 아래로 떨어냈다.
재빨리 그쪽으로 이동한 시안이 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
“산 쪽으로 바위가 날아들더니, 절벽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쉼 없이 마력을 쏟아낸 마법사가 창백한 얼굴로 보고했다.
“장벽과는 달리 장벽과 이어진 절벽 쪽은 마법 방어가 취약해서…… 수복이 안 됩니다.”
그 순간, 시안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