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96
495화
“지시를!”
“일단 장벽부터 수복하도록. 우리가 대책을 강구한다.”
명령을 내린 헬무트가 시안에게 다가섰다.
장벽은 파헤의 숲에서 인간 세상으로 향하는 길목, 험난한 바위 산맥이 양쪽으로 우뚝 서 천혜의 성벽을 형성한 장소에 세워져 있었다.
그 가운데를 막아, 마물들을 인간 세상으로부터 차단하면서.
시안이 인상을 쓰며 외쳤다.
“제발 방법 좀 생각나라. 어떻게 하지? 아, 정말!”
저편에서 아레아가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이 장벽은 양옆에 바위산을 두고 있지. 양측을 무너뜨리면…… 장벽은 뻥 뚫린 거나 마찬가지가 돼.”
그 지형적인 이점 때문에 이곳을 대 마물 전선으로 선택한 게 아닌가.
마법사들이 수복하는 장벽보다는 단단하지만 상대적으로 취약한 바위 산맥을 뚫는 것이 더 가능성 높을 터.
다른 마물들을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지만, 바하렉은 달랐다.
“괜히 파헤의 숲의 지배자가 아니로군.”
콰지직!
그새 이쪽을 향해 날아드는 바위 하나를 갈라낸 헬무트가 말하자 시안이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면 장벽은 박살 날 수밖에 없어.”
마법사도 마력석도 많다. 하지만 마법사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고, 마물은 몇 날 꼬박 새워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강철같은 전사들이다.
방어에만 집중하면 그 후에는? 엉망이 된 장벽을 두고 저 어마어마한 마물 군단과 싸워야 한다. 마법사 없이, 신전과 검사들만으로.
과연 장벽을 지켜낼 수 있을지나 의문이다. 불 보듯이 뻔한 미래가 그려졌다.
그 미래를 다잡으려면 이쪽에서 나서야 한다.
“방법은 하나지.”
헬무트는 단박에 선언했다.
“우리가 진입해야 해. 포격을 저지하고, 바하렉을 때려잡아야지.”
아레아가 물었다.
“그때처럼?”
마왕을 잡으러 파헤의 숲에 진입했던 그때처럼.
“그때보다는 쉽겠지. 가지. 방어만 하다가 지치기 전에.”
이쪽을 움직이게 해놨으니 바하렉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터.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나서야만 한다. 적어도 저번보다는 쉬운 임무였다.
인원은 신속하게 구성되었다. 주로 검사들 위주로. 헬무트, 아레아, 아스카, 레반트, 루크 예거.
소박한 구성이 된 이유가 있었다. 대신관들을 비롯하여 아레아를 제외한 마법사들, 특히 시안은 장벽을 보호하기 위해서 남아야 한다.
장벽을 향한 공세는 그 잠깐 동안 여전히 격렬했고, 조금이라도 수복을 더디게 했다간 무너져내릴 게 분명했다.
또 어설픈 실력자는 저 마물 군단과 맞붙으면 그대로 갈기갈기 찢겨질 것이다.
일단 헬무트 일행이 진입하여 공세를 저지시키고 나면, 그때 후발 병력을 출격시키는 것이 옳았다.
바하렉의 계획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장벽을 붕괴시키는 것을 1순위로 삼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이쪽에서도 장벽을 지키는 병력을 함부로 운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샤를로트는 마물을 많이 상대해 보지 못했고, 저 안에서 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는 자신이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아쉬운 듯 납득했다.
“장벽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부디 모두 무사하시길.”
이그렐은 이번에도 발을 뺐다.
“내가 친한 인간들 정도는 지켜줄게.”
전장의 한가운데서도 얄밉기 그지없는 마물이다. 하지만 이그렐이 저쪽에 합류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시안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이럴 때 안티올은 어디에 있는 건지.”
대마법사 안티올은 연락이 닿지 않아 이번 전투에 합류하지 않았다.
애초에 협조적인 성격은 아니었으니 위기가 끝나자마자 자연스레 잠적해버리고 만 것이다.
여전히 사방은 귀가 먹어버릴 것 같은 소음과 고함으로 가득했다. 포격과 그걸 수복하는 과정의 반복이다.
빠른 결단만이 이 혼돈에서 그들을 벗어나게 해줄 수 있었다.
“준비는 끝났나?”
헬무트가 묻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그 호랑이 녀석한테 본때를 보여주자고.”
아스카가 씨익 웃었다. 아레아가 불러낸 골렘이 끝이 송곳처럼 뾰족한 전차로 변신한 채 장벽 한가운데에 안착해 있었다. 모두가 일제히 그 위로 올라탔다.
아스카가 투덜거렸다.
“탑승감이 안 좋을 것 같아.”
“엘라가보다는 좋을 테지.”
헬무트는 문득 그 이름을 내뱉고 흠칫 놀랐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그 이름은 헬무트에게 가시 같은 존재였다. 때때로 아프게 찔러 드는 가시.
“그거야 그렇겠지. 그보다 나쁠 수 있을까.”
아스카의 대답이 헬무트에게 현실을 일깨웠다. 지금은 눈앞의 바하렉부터 생각할 때다.
“셋 세면 출발한다, 다들 꽉 붙잡아!”
아레아의 경고와 함께, 다들 손을 뻗어 전차를 굳건히 붙잡았다.
셋, 둘, 하나! 셈이 끝남과 동시에 전차가 그대로 움직여, 미끄러지는 듯이 장벽을 타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바로 옆에 포격 중인 바위가 스치듯이 틀어박혔다. 콰광!
“살벌하기는.”
“조심해, 혀 깨문다.”
쿠궁! 아레아의 경고에 이어 묵직한 소음을 내며 전차가 바닥에 안착했다.
장벽 인근에는 마물이 없다. 포격이 이어지는 동안 놈들은 저 멀리서 간을 보고 있을 뿐이다. 이쪽이 지치기를 고대하면서.
“놈들의 포격이 얼마나 정교한지 알아볼까?”
아레아는 전차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바로 전차는 땅을 박차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정면으로. 바하렉이 도사리고 있을 바로 그곳을 향하여!
거리가 좁혀지는 만큼 자욱한 마기가 피부를 찔렀다. 이것은 파헤의 숲의 마기가 아닌, 마물들이 가진 본연의 마기.
흉악하게 이쪽을 향해 눈을 번뜩이는 포식자의 기운이다.
하지만 누가 포식자인지는 맞대면해봐야 알 일. 그때도 그랬다. 과거의 그 모든 순간에 파헤의 숲에서 헬무트는 사냥감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는 늘 놈들에게 알려주었다.
자신은 포식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사냥감이라는 것을.
“놈들의 본능은 인간이 자신들보다 강할 수 있다는 것을 몰라.”
파헤의 숲에서 인간은 사냥감이었고, 그 절대적인 법칙은 마물들의 몸속 깊숙한 곳에 본능으로 새겨져 있었다.
어둠의 싹을 가진, 반 마물이었던 헬무트라도 그 본능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헬무트 일행은 여기서 마물들에게 확실히 알려줘야 했다. 인간도 포식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을 뼈와 피에 새겨주어야만 그들의 본능도 자각하게 되리라. 그들이 인간에게 피식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오늘부로 놈들도 달리 생각하게 되겠지.”
아레아의 호응에 헬무트가 다시 맞받았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지만.”
“진지하게 응하지. 방심은 금물이니.”
레반트가 지적하자 루크 예거가 피식 웃었다.
“다들 자신만만한데. 활약을 기대해 봐도 좋겠지?”
어느덧 전차는 마물 군단을 가까이 앞두고 있었다.
마물들은 앞에 결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일정 선을 넘지 못하며 으르렁거리고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 많은 마물들이 절대복종할 정도면 바하렉의 지배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이리라.
바하렉은 그 너머 어디서 숨죽이고 있는지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에 분명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놈을 찾아야 한다.
아레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곧 충돌한다!”
그 순간만큼은 누구나 숨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쿠가가강! 격렬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마법으로 강화된 전차는 창날처럼 단단해서, 맞부딪힌 마물을 꿰뚫으며 으깨다시피 치고 지나갔다.
전차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지만, 속도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개떼처럼 달려들었다. 전차 위에 서 있는 인간들을 향해서!
“좌측은 나와 아스카가, 우측은 나머지 둘이 맡지. 후방까지 책임진다.”
헬무트는 자연스레 전차를 반분하며 검을 휘둘렀다. 말을 내뱉는 동안에도 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청백색 섬광이 마물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고도의 수련으로 이루어진 그의 검에는 아무리 단단한 몸체도, 그 몸을 지키는 마기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좋아.”
레반트가 전차의 우측 후방으로 이동했다.
마기를 사르는 것은 신성력. 상성과 실력이 고스란히 담긴 그의 검은 변함 없이 위력적이었다.
그의 검에 닿을 때마다 마물들의 살과 뼈는 산에 맞은 것처럼 녹아 사라졌다.
아스카의 마법검도 그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효과적이었다. 무기의 위력을 비는 것도 실력이라는 데 아스카도 어느 순간부터 동의하고 있었다.
“천하의 팔마 기사단장을 나머지 취급하다니.”
루크 예거가 웃으며 우측 전방에 자리했다. 순식간에 위치가 잡혔다. 네 명이서 전차의 좌우, 앞뒤에 자리했다.
후방이 더 까다롭기에 상대적으로 강한 헬무트와 레반트가 각각 후방까지 책임지는 것이다.
그리고 전차를 지키며 전방을 보좌하는 건 아레아의 역할이었다. 그녀의 역할은 하나 더 있었다.
“바하렉을 찾아야겠어.”
놈을 찾아야 이 싸움이 끝난다.
“독수리의 눈.”
주문과 함께 시야가 높아졌다. 아레아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끝도 없이 운집한 마물들 틈바구니를 샅샅이 훑었다.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거지? 이만한 마물들에게 지배력을 펼치려면 분명히 근방일 터.
여기 모인 마물들의 수는 그들이 지난날 마왕에게 이르기까지 만났던 마물들의 수보다 적지 않았다. 지난한 싸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적극적으로 싸워야만 장벽을 향한 공세를 늦출 수 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뒤이어 벌어진 상황은 예상과는 달랐다. 쉬이이잉!
고막을 온통 울리는 파공음과 함께 그림자가 그들 위로 드리웠다. 점점이 흩어진 먹구름처럼 수많은, 그러나 새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들.
“뭐지?”
싸우는 와중에도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목격했다. 저 높은 곳 하늘에서 장벽을 향해 쇄도해가는 수많은 비행형 마물들을!
카가강! 아스카가 저를 향해 달려드는 마물을 쳐내면서 물었다.
“분명, 비행형 마물은 수가 많지 않다고 했잖아?”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는 거겠지. 파헤의 숲에서 다 긁어모으면.”
아레아는 대답하면서 비행형 마물들의 수를 얼추 헤아렸다. 족히 수백을 넘어서 천에 가까운 숫자다.
“그렇게까지 했다는 거야? 그 바하렉이?”
그 성질 더러운 호랑이 놈이 그 정도로 철저했던가. 인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것 같군. 남은 사람들이 막아낼 수 있을지.”
헬무트가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하지만 그의 미간은 한껏 좁혀져 있었다. 그들이 이곳으로 쳐들어오면서 포격은 잦아들었다. 하지만 위에서 떨어지는 건 어떨까?
비행형 마물들은 하나같이 발아래에 큼직한 바윗돌을 들고 있었다. 높은 상공에서 떨어뜨리는 바위는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진다.
시안이 있으니 얼마간 막아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대지의 정령사인 그라도 운석이 떨어지는 듯한 충돌 속에서 장벽을 계속 지키기란 힘들 터.
위기는 새로운 방식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답은 하나였다. 바하렉을 해치워야 한다. 가급적 빠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