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498
497화
벽 전체가 지진 난 듯이 흔들렸다. 어마어마한 파동이 사방으로 번지며 대기를 온통 진동시켰다.
방 안에서 잠시 낮잠을 자고 있던 이그렐은 눈을 부릅떴다.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서 그녀의 남다르게 화려한 머리카락을 더럽히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어떤 녀석이?”
인간들을 돕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건 마물답지 않은 짓이니까.
‘하지만 날 건드리면 경우가 다르지?’
감히 내가 있는데 소란을 피우다니. 모순된 생각을 하면서 이그렐은 바로 처소를 빠져나와 계단으로 향했다.
주변은 소음과 흙먼지로 가득했고, 인간들은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일대의 혼란이다.
장벽 위에 올라섰을 때 이그렐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렸다.
장벽 아래 산산이 조각난 바위 파편이 가득 쌓여 있었고, 충돌과 파괴의 여운이 물씬 느껴졌다.
“이…… 이그렐, 여긴 무슨 일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널브러져 있던 시안이 바로 경계심을 드러냈다. 힘을 소진한 이 시점에서 그녀까지 딴맘을 먹으면 끝장이다.
이그렐은 그를 힐끗 본 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너무 시끄러워서 화가 나잖아.”
“예?”
“낮잠을 자려고 했었는데.”
“그, 그렇군요…….”
시안의 표정이 어색해지려는 찰나, 이그렐이 냉큼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절대,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그렐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마기를 개방했다. 장벽 위로 치솟듯이 빛이 번졌다.
콰지직! 다음 순간, 그곳에는 색색이 화려한 날개를 가진 거대한 새가 한 마리 서 있었다.
“이그렐?”
갑자기 등장한 마물에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다행히 이그렐이 처음 출현했을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어,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하늘 위의 것들은 내게 맡겨 둬.]역시 인간들은 자신의 도움을 빌려야 하는 존재. 도통 알아서 뭔가를 하질 못한다.
이그렐은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상공으로 쏜살같이 쏘아져 올라갔다.
[어리석은 것들. 너희들의 주인이 누구냐?]이그렐을 본 순간 파르르 떨리는 날개. 비행형 마물들은 자신들의 불경함을 깨닫고 등을 돌려 도망쳤다.
이런 곳에서, 남쪽 권역의 지배자라니!
이그렐은 독수리에게 쫓기는 철새처럼 우수수 흩어져 달아나는 놈들을 느긋하게 쫓았다. 그러나 그 속도만큼은 비상하게 빨랐다.
응징의 시간이었다.
* * *
장벽 쪽에서 예상했던 충돌이 일어나며 익숙한 마기가 솟구쳤다. 바하렉은 비행형 마물들이 자신의 지배력에서 벗어나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애초에 비행형인 놈들은 이그렐의 지배력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
[이그렐 녀석, 안 나선다더니…….]당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파헤의 숲의 지배자씩이나 되는 녀석들이 대체 왜 인간의 편에 선단 말인가.
엘라가도 그랬고 이그렐마저도. 겁쟁이 거북이 녀석은 북해에 처박혀서 나올 생각 안 한다지만, 죽은 나호였다면 자신의 편에 섰을 텐데. 아쉬운 순간이다.
‘어디까지 끼어들진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다음 수를 써야겠군.’
바하렉은 그답지 않게 차곡차곡 계획을 쌓고 있었다. 한때 파헤의 숲에 등장했던 마왕의 영향으로 자라난 마성이 그를 성장시켰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장벽을 지키는 가장 큰 힘은…… 소진되었을 테지.’
대지의 정령이니, 자연의 힘이니 뭐니 하지만 그 힘을 다루는 것은 인간.
인간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다. 바하렉은 그 한계를 노렸다. 그리고 때가 된 것 같다.
바하렉이 등장하여 지배력을 강화한 직후, 헬무트 일행은 주변을 둘러싼 마물들의 미칠 듯한 공세에 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어마어마한 충돌이 발생한 장벽 쪽으로 신경이 갈 수밖에 없는 데다가 바하렉은 달려들어도 자리를 피하면 그만일 거리를 딱 유지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라고 해서 딱히 파헤의 숲의 마물들에 대한 동지 의식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약자가 강자에게 복종하는 건 당연한 일. 바하렉에게 마물들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하다. 그래도 헛되이 소진해버릴 수는 없겠지만.
‘이제 2단계다.’
바하렉은 배속으로부터 마기를 끌어모아 포효를 떨쳤다.
[크와아아아앙!]공포심을 이끌어 내는 포학한 호랑이의 울부짖음이 온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것은 마치 주문과 같았다. 공격을 알리는 주문!
바하렉의 군대는 3개로 나뉘었다. 하나는 하늘 위에, 하나는 이곳에,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이런, 느껴져?”
아레아가 헬무트를 쳐다보았다. 헬무트는 마물 셋을 동시에 처치하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바하렉, 무슨 짓을 하는 거지?”
헬무트는 강했다. 여기 있는 마물들과 바하렉을 잡을 수 있을 만큼. 하지만 제약이 있었다. 지켜야 할 것도 있었다.
바하렉에게 달려들 기회를 몇 번 엿보았지만, 그렇게 하면 전차를 지키는 한 축이 무너지게 된다.
그가 빠지고 나서 마물들의 미칠 듯한 공세를 버텨낼 수 있는 건 레반트뿐이다. 그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 터.
그런데 지금 이것은. 바하렉의 포효와 함께, 저편에서 파도 같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숨죽이고 있던 것들이 일제히 몰려가고 있었다. 장벽이 아닌, 장벽 옆에 우뚝 서 있는 바위 절벽을 향해서!
어마어마한 도약 능력과 근력을 가진 마물에게 결코 넘을 수 없는 장벽은 아니었다.
이제까지 놈들은 본능적으로 인간들이 가득한 장벽을 향해 움직였을 뿐이다. 사냥감을 탐하는 마물의 본능대로.
그리고 여기, 본능을 넘어서는 명령이 떨어졌다. 바하렉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것이 승리를 위한 것임을 어떤 마물도 의심하지 않았다.
바하렉은 그들에게 자유와 인간의 피와 살을 안겨줄 것이다.
아레아가 경고했다.
“시안의 기운이 흐려졌어. 그 혼자서는 막을 수 없어. 이대로면 장벽이 뚫릴 거야.”
헬무트는 이런 방식의 싸움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앞에 나서서 싸우면 그가 남겨두고 온 것들은 늘 온전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못했다. 상대의 숨겨둔 수는 그가 생각한 것보다 강력했다.
결정해야 할 시간이다. 바하렉에게 집중할지, 아니면 돌아가 지킬지.
그런데 이변이 벌어졌다.
* * *
[여긴가?]엘라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을에서 귀여움을 듬뿍 받던 것도 잠시, 그는 다시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붙들려간 집에서 지도를 보고 위치를 파악한 터. 파헤의 숲이 거대한 검은 영역으로 그려진 지도에는 보기 좋게 현재 마을의 위치까지 잘 표시되어 있었다.
지도를 본 엘라가는 인간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창문으로 탈출했다.
‘운이 좋았어.’
거대한 표범으로 한달음에 달려갈 거리를 고양이로 수없이 발을 놀리며 달리고 있자니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헬무트를 빨리 만나서 본모습을 찾아야 했다.
낮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엘라가는 계속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슬슬 목적지에 다다랐다 싶은 시점에 문득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피부에서 일어서는 소름. 마계에서는 결코 느껴본 적 없던 그것.
[신성력이잖아!] [당연한 일이다. 마물을 상대하는 데 신전이 최전선에 서야 할 것 아닌가. 맞게 왔다는 뜻이지.]엘라가는 인상을 찌푸렸다. 여전히 신성력은 질색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그립지 않군. 오랜만에 접하니 구토할 것처럼 불쾌해.] [그건 그냥 계속 뛰어서 그런 거다. 거의 다 온 것 같다.] [그래, 알려줘서 참 고맙다. 쓸모없는 녀석아!]얼마 가지 않아 뮤트가 입을 열었다.
[대기가 혼란하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나 보군.]엘라가 역시도 혼란하게 뒤얽힌 기운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보통 전투가 아니다.
장벽에서 발생한 충돌이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거기서 느껴지는 마기는 미미했다.
헬무트 일행의 전투가 충돌의 여파에 가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알아. 이건 대지의 정령인가? 헬무트 친구 녀석이 거기에 있나 보군.] [그 녀석의 이름은 시안이다.]뮤트가 친절하게 알려주자 엘라가는 콧방귀를 끼었다.
[다른 인간 따위 알 게 뭐야, 헬무트 여자친구 이름만 알고 있으면 됐지. 아레아라는 이름이었지? 그 녀석들, 짝짓기하며 잘 지내고 있으려나?]지치도록 달려 무거워진 발걸음이 살아났다. 드디어 재회의 시간인가. 마계로 갔다가 마계에서 다시 인간계로. 정말 기나긴 여정이었다. 하지만 엘라가는 돌아왔다.
‘이 정도는 되어야 가장 강한 마물이라는 거지.’
파헤의 숲에서만 가장 강한 마물도 아니고, 이제는 마계에서 가장 강한 마물이다. 정신체나 다름없는 마왕은 자연스레 번외로 두었다.
뿌듯해하며 달리던 엘라가의 시야에 높게 치솟은 바위산이 잡혔다. 삐끗하면 추락할 듯한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이었다.
[좋아, 저긴가? 뭔가 높군.]조금 측면으로 접근하여 절묘하게 바위 절벽이 가리고 있었기에 장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서 올라가자.] [독촉하지 마, 이 녀석아. 내가 올라가지, 네가 올라가냐?]뮤트라는 덤이 가져다주는 유일한 장점은 지루하지 않다는 것뿐이다. 엘라가는 부지런히 끝도 없는 절벽을 기어올랐다.
마물인 그로서도 지칠 수밖에 없는 강행군이었다. 그 강행군의 방점은 바로 이 절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 보였다.
엘라가는 마침내 절벽 위에 우뚝 섰다. 그리고 보았다.
[뭐야, 이 산이 아니네.]절벽 저편에 붙어 있는 인간의 구조물을 본 순간 맥이 탁 풀렸다. 대체 왜 이 고생을 하면서 여길 기어올랐단 말인가.
엘라가는 자연스레 뮤트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이 자식아, 어서 올라가자면서! 일부러 날 고생시킨 거냐?] [오해다. 나도 이럴 줄은 몰랐다.] [오해면 다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는 없는 거냐?] [화낼 것 없다. 목적지에는 다 왔으니. 저기가 장벽이지 않나.] [그래, 저기로 가면 헬무트를 만날 수 있다, 이거지? 어, 근데.]엘라가의 시선이 문득 움직였다. 무수한 마기의 점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장벽이 아닌, 그가 서 있는 바로 이 바위산을 향해서!
[이 녀석들은 뭐냐.]뮤트가 이번에는 바르게 답을 냈다.
[측면으로 우회하여 장벽을 공략할 모양이군. 서쪽 권역의 지배자 바하렉의 지배력이 느껴진다.]잠시 뒤 느닷없이 펼쳐진 사태를 파악해낸 엘라가가 혀를 찼다.
[바하렉 녀석,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어떻게 할 거지?] [어떻게 하긴? 이것들이 감히 내가 있는 곳으로 몰려와? 본때를 보여줘야지!]엘라가의 두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바하렉의 지배를 받는 마물들은 충실히 절벽을 타고 꼭대기까지 기어올랐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마침내 꼭대기에 발을 디뎠을 때, 그들은 목격했다. 한입에 물어 죽일 만한 자그마한 하얀 고양이를.
하지만 본능이 짓누르듯이 그들을 멈춰 세웠다. 죽음과 공포의 감각. 마물이라면 결코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캬아아아앙!]이내 날카로운 울음이 대기를 찢듯이 울려 퍼졌다. 비록 목소리는 가냘팠지만, 거기에 담긴 무시무시한 마기는 몰려오던 마물들을 멈춰 세우고 그 정신까지 꿰뚫었다.
바하렉의 지배력이 떨쳐 졌다. 그리고 새로운 지배력이 그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파헤의 숲의 지배자, 엘라가의 귀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