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5
4
헬무트
4화
‘상처가 있으면 나도 중독될 테지.’
파헤의 숲에서 살아와 어느 정도 면역력이 생겼다지만, 독액이 상처를 통해서 스며들면 물속에서 의식을 잃을지도 몰랐다. 신중히 행동해야 한다.
헬무트는 제 몸을 꼼꼼히 살폈다. 얕은 생채기 정도는 금방 아무는 몸이다.
아까 전 물고기의 공격을 피하느라 돌바닥에 살짝 스친 살갗도 이미 아물었다.
‘좋아.’
일단 덩굴에 칼집을 내어 독액이 잘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헬무트는 먼저 한 무더기의 덩굴을 물에 집어 던졌다. 물살이 고였다가 흘러가는 대목이었다.
물고기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입을 벌려 호흡하는 놈들에겐 즉효였다. 약해진 척 연기할 지능은 없는 놈들이다.
‘제대로 먹히는 것 같군.’
수중 생물이니 꽃 덩굴의 독에 면역이 별로 없을 것이다. 마비된 채 물 위로 둥실거리며 떠다니는 놈은 곧 죽을 것 같았다.
헬무트는 남은 덩굴을 들고 천천히 물속에 발을 들였다. 물은 금세 허리춤까지 찼다.
움찔거리면서도 마비된 물고기들은 눈만 부라릴 뿐 덤벼들지 못했다.
헬무트는 차분하게 놈들을 주시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목 아래까지 물에 잠기자 헬무트는 덩굴을 옆구리에 낀 채 헤엄쳤다. 자연스럽게 몸이 물에 떴다.
이대로라면 순조롭게 건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건너편에 가까워져 얕아지는 지점에서, 무심코 내디딘 발이 훅 미끄러졌다.
-첨벙!
요란한 소리가 나며 물밑으로 무너질 뻔한 헬무트가 다른 발을 콱 디뎠다.
물컹. 소름 돋는 감각이었다.
헬무트는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바닥이 갈라지며 새하얀 이빨이 아가리를 쩍 벌렸다. 마치 잠에서 깨어났는데 눈앞에 별식이 떨어졌단 듯이.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들어갔다.
헬무트는 다급히 자신이 가진 잘린 덩굴 더미를 아래로 쳐넣으며 물장구를 쳤다. 허우적거리면서 물가로 향했다.
그러나 독액도 통하지 않는지 덩굴을 우물거려 씹어 삼킨 놈이 순식간에 몸을 일으켰다.
-쏴아아아!
거센 물살이 헬무트를 물 위에 뜬 나뭇잎처럼 흔들었다. 간신히 버텨, 고꾸라지지 않았다.
등 뒤에서 파도처럼 덮쳐드는 물살에 전신이 뻣뻣하게 굳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풍덩!
운석처럼 떨어진 묵직한 무언가가 수면을 강타했다. 엄청난 물세례가 헬무트를 후려쳤다. 헬무트는 바로 뭍으로 나가떨어졌다.
“헉!”
충격에 잠깐 의식이 하얗게 사라졌다. 물 위로 떨어진 거대한 형체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어후, 시원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헬무트가 독액 섞인 물을 입 밖으로 퉤퉤 뱉어냈다. 찌릿한 몸을 고쳐 세우며 헬무트는 미심쩍게 중얼거렸다.
“엘라가?”
전신에 흉흉한 마기가 피어오르는 거대한 표범이었다. 그 몸에서 풍기는 짙은 마기에 기절하다시피 한 물고기들이 깨어나, 화들짝 놀라며 흩어졌다.
-뭘 봐? 난 목욕하러 온 거야. 목욕!
엘라가의 꼬리가 수면을 팡! 후려쳤다. 그 정도 수위에 엘라가의 몸이 잠길 일은 없다. 헬무트가 허우적거렸던 계곡은 얕은 샘처럼 보였다.
발밑을 내려다본 엘라가가 입꼬리를 쭉 찢었다.
-처음 보는 물고기인데? 맛있게 생겼네.
그가 물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뿌연 물보라 같은 것이 일었다. 곧 초록빛 수면이 검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다시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엘라가가 쩝쩝거리며 입 주위를 핥았다.
-맛이 괜찮구만.
곧 어슬렁거리면서 다가오는 엘라가를 보며 헬무트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정말로, 죽을 뻔했다.
경직된 몸이 스르르 풀렸다. 전신이 후드려 맞은 듯 욱신거린다. 헬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라가.”
‘지켜보고 있었구나.’
살짝 감동에 잠기려던 순간, 엘라가가 초를 쳤다.
-넌 어째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냐.
‘이렇게 허약하고 모자란 것이 있는지 참 딱하다’고 말하는 듯한 눈빛. 으스댐이 묻어났다.
-뭐해? 갈 길 가지 않고.
거대한 표범이 툭 등을 떠밀었다. 살짝 밀었는데도 쓰러질 뻔한 헬무트가 미간을 모았다. 고맙다고 말하려던 마음이 쓱 사그라졌다.
‘도와줄 거면 진작 나타나지.’
엘라가를 타고 건넜으면 좀 쉬웠을 텐데. 헬무트는 아쉬워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말했다간 엘라가가 이젠 자길 탈것으로 아느냐며 화를 낼 게 뻔했다.
“먼저 갈게.”
손을 휘저어 보인 헬무트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자리를 떠났다.
-이거 지금 따라오란 거야?
코웃음을 훅 친 엘라가도 곧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다시 상류를 따라 올라가 표식을 남겨 둔 건너편에 이르렀다. 노골적으로 모습을 보이진 않았지만, 헬무트는 엘라가가 자신을 슬금슬금 뒤따르고 있단 걸 느꼈다.
‘함께 와도 좋을 텐데.’
그건 싫은 것 같다. 인간을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또 방해는 안 한다.
‘솔직하지 못하단 말이야.’
헬무트는 맘 편히 신경 끊기로 했다. 그보다 다른 문제가 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것 맞나.’
헬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인근일 텐데, 사람이 머무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두 발로 땅을 디디고 도구를 쓰는 인간은 마물과 다른 방식으로 흔적을 남긴다.
그러나 헬무트는 어디를 둘러봐도 특별한 흔적을 찾아낼 수 없었다.
‘이미 죽거나…… 떠나 버렸나.’
약간 아쉬워졌다. 오랜만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 인간을 만날 수 있었으면 했는데.
‘조금 더 둘러볼까.’
십여 분쯤 더 걸으니, 저편에 낯선 무언가가 보였다. 여러 종의 나뭇가지를 쌓아 올려 만든, 헬무트의 키 두 배만한 울타리.
마물은 울타리를 엮지 않는다. 인간의 흔적.
하지만 발견의 기쁨도 잠시, 헬무트는 의문스러워졌다.
‘너무 어설픈데.’
파헤의 숲에 사는 마물이라면 저 정도 울타리쯤은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다.
‘막으려는 목적으로 만든 게 아닌가?’
헬무트는 퍼뜩 깨달았다.
‘영역 표시군.’
저걸 부수면, 그 인간이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의 영역에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것을.
‘예고해 두는 편이 좋겠지.’
울타리가 부서지면 그 인간이 불쾌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엘라가만 해도 제가 모아 둔 잡다 구리 한 수집품에 헬무트가 손을 대는 걸 싫어했으니까.
“엘라가, 여기서부턴 나 혼자 갈게.”
엘라가를 대동하고 갔다간 싸우자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말을 던진 헬무트는 약간 망설이다가 울타리에 손을 올렸다. 크고 작은 나뭇가지를 엮어내어 꽤 튼튼한 울타리였다.
손발에 힘을 주어 울타리를 타고 오른 헬무트는 막 뛰어내리지 않고 조심스레 내려섰다.
그 인간이 이곳에 자리 잡은 지 십 년도 더 되었다. 안쪽에 무슨 함정이 있을지 몰랐다.
‘이쪽이다.’
정면에 인위적으로 나무를 베어 좁은 길을 내 둔 것이 보였다. 자신이 적대감을 품고 방문하는 것은 아니니 길을 따라가는 것이 맞다.
하지만 상대가 방문자에게 적대적일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했다.
헬무트는 긴장한 채 길을 따라서 걸었다. 주변이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이상할 정도로.
‘느낌이 묘하군.’
등골이 오싹해진 헬무트가 불안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퍽! 위쪽에서 뭔가가 그를 덮쳐눌렀다. 단숨에 몸이 고꾸라졌다.
헬무트는 고개를 간신히 모로 돌려서 얼굴이 바닥에 처박히는 것을 막았다. 뒷목을 움켜쥔 손길에 숨이 턱 막혔다.
며칠 전의 첫 사냥과 같은 방식으로 당했다. 이번에 당한 건 반대로 헬무트였다.
“아이야.”
으르렁대는 듯한, 거친 음색이 고막을 울렸다.
헬무트는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러나 뒷덜미를 내리누른 손은 어설프지 않았다. 그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대로 목을 부러뜨린다고 해도 저항하지 못할 거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댔다.
“네 이름이 뭐냐.”
약간 숨통이 트였다. 헬무트가 다급히 외쳤다.
“헤, 헬무트!”
“성은?”
“몰라…….”
“누가 너를 보냈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처음 겪는 통증이 목뼈를 부술 듯이 조여들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헬무트는 간신히 대답했다.
“내, 내가 스스로…….”
순식간에 목 뒷덜미를 잡고 있는 손이 사라졌다. 헬무트는 구르듯이 몸을 일으켰다. 목 끝에 서늘한 칼날이 와 닿았다.
“허튼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라.”
수염 덮인 주름진 얼굴은 노인의 것이었으나, 그 눈빛은 맹수의 것만큼 형형했다.
근육질의 거대한 단단한 몸, 헬무트를 낚아챈 손아귀. 전신에 흐르는 강력한 기운.
눈 높은 엘라가가 ‘강한 인간’이라고 표현할 만한 자다.
전율이 전신을 관통하듯 흘렀다. 헬무트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정말로, 강한 인간이구나!’
아기 때 파헤의 숲에 던져진 헬무트였다. 엘라가의 가호를 받아왔지만, 저를 노리는 살벌한 시선엔 익숙했다.
하지만 눈앞의 괴한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은 정말로 숨이 막혔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이 살의이든 적의이든, 중요치 않다. 존재를 존재로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
쉰 듯한 거친 목소리가 괴한에게서 흘러나왔다.
“살고 싶으면 내 질문에 답해라. 꼬마, 여긴 어떻게 찾아왔지?”
“엘라가가 알려 줬어. 당신이 여기에 있다고.”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었던 건, 괴한이 기운을 느슨하게 풀어 줬기 때문이었다. 헬무트는 쫓기듯이 내뱉었다.
“엘라가라고.”
그 이름을 곱씹는 듯하던 괴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날 선 기운이 완연히 누그러졌다. 뭔가를 생각하던 괴한이 곧 물었다.
“왜 나를 찾아온 것이냐.”
왜냐는 질문에, 덜컥 말이 막혔다.
눈앞의 그는 인간이었다. 그것도 특별하게 강한 인간. 헬무트는 다른 인간이 근방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호기심을 느꼈다.
하지만 괴한의 말에 헬무트는 이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찾아온 이유…….’
호기심이 그를 이끌었다. 그리고 만났다.
만나서 뭘 하려고?
자립하기 위해 사냥법을 익히고 궁금하면 묻고, 생각하며 배운다. 이제껏 헬무트는 단순하게 살았다.
그를 만나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던 헬무트는 막상 그를 만나게 된 이후 목적을 잃었다.
아니, 잃지 않았다.
그를 찾아온 호기심 너머에 본질적인 뭔가가 있었다.
아는 듯 모르는 듯 어떤 말이 목구멍에서 걸렸다.
그를 찾아온 이유.
뜨거운 혼란이 헬무트를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