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50
49
헬무트
49화
제니아의 눈초리가 가늘어지더니 헬무트 쪽을 건성으로 훑었다.
그녀는 곧장 여태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마법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머, 용병은 아무래도 좋아요. 길튼이 괜찮다고 생각하면 알아서 해 줘요. 나는 아레아 님과 할 이야기가…….”
그때 그녀 옆에 있는 마법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출발하여야 하니 이만 들어가서 준비를 해야겠군요.”
맑은 미성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여자라기엔 낮고 남자라기엔 고운 중성적인 음성이었다.
“어, 어머나? 물론 그렇지만 식사를 더 하시지 않고.”
“충분합니다, 이만.”
예의 바르나 어딘지 선을 긋는 듯이 말한 그가 출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헬무트가 서 있는 방향이었다.
후드로 가린 얼굴이 그제야 모습을 보였다. 언뜻 엿보이는 은발은 투명하게 반짝였고, 단정하면서도 유려한 얼굴은 눈처럼 하얗고 깨끗했다.
섬세한 콧날 양옆에 자리한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는 빨려드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직은 앳된 얼굴이나 성숙한다면 어떻게 변할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마법사는 헬무트 또래의 소년이었다.
헬무트가 호위해야 할 아가씨, 제니아도 눈에 띄는 미소녀였지만, 이 마법사는 사람 같지가 않다.
마법이 아니면 실존할 것 같지 않은 비현실적인 외모였다.
마물이 인간을 홀리기 위해 둔갑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낯설고도 신비로웠다.
“아, 아레아 님.”
제니아의 아쉬운 부름을 뒤로하고 아레아라는 이름의 마법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헬무트 쪽을 스쳐 지나갔다.
일순간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지만, 그는 헬무트에게 아는 척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데.’
헬무트가 곰곰이 자신의 감각을 되짚어 보았다. 생긴 것뿐만 아니라 저 마법사에게는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위화감이.
“나도 이만 객실로 돌아가야겠어요.”
팔랑거리는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제니아가 길튼과 헬무트를 지나쳐갔다.
“아레아 님, 같이 가요!”
한껏 목청을 돋운 그녀의 외침이 식당 안을 뒤흔들었다.
“저렇게 뛰다가 넘어지실지 모르는데.”
길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의 등 뒤로 호위 기사가 따라붙고 있으니 그들이 알아서 제니아를 챙길 것이다.
“저 소년 마법사, 언제 봐도 비현실적이군. 전설 속의 이종족이 저런 모습일까.”
길튼이 혀를 내둘렀다. 헬무트는 물었다.
“저 마법사도 호위입니까?”
“아니, 제니아 아가씨의 손님일세. 바덴의 그레타 아카데미에서 수학 중이라는데 거기서 유명인이라더군. 사촌분이 그레타 아카데미에 수학하고 계신 터라, 아가씨도 그에 대해 들으신 적이 있었던 모양이야. 우연히 마주치게 됐는데 아가씨가 그를 알아보아 함께하게 된 거라네.”
“아가씨도 바덴의 아카데미에?”
“입학시험을 보러 가시는 거네. 곧 열네 살이 되시니까.”
바덴에는 세 개의 유명 아카데미가 있다. 그리고 아카데미는 열네 살부터 입학할 수 있었다.
헬무트는 자신이 곧 열다섯 살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파헤의 숲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은 의식하지 못한 사이 쏜살같이 흘렀다.
“그렇군요.”
“두 시간 정도 시간이 있네. 최대한 빨리 채비를 마치고 아까 본 케드릭에게로 가 보게. 그가 자네에게 할 일을 알려 줄 걸세. 나는 떠날 준비를 해야 해서.”
“네.”
헬무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 마법사, 좀 걸리는데.’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의 머뭇거림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라고 이해한 길튼이 종업원을 불러 헬무트를 안내하라고 말했다.
헬무트는 의문을 뒤로 미루어 두고 종업원의 뒤를 따랐다.
*
“아까 들었겠지만, 내 이름은 케드릭이다.”
“헬무트입니다.”
‘20대 중후반, 실력은 2급 용병에서 3급 용병 사이.’
헬무트는 케드릭에 대한 판단을 마쳤다. 실전 경험이나 기타 요인에 따라서 실력이 좀 달라지긴 하지만 느껴지는 인상은 그랬다.
“꼭 귀족 같은 이름이로군. 뭐, 몰락 귀족 출신도 많으니까.”
용병의 과거는 묻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케드릭이 고개를 내저었다.
“말은 탈 줄 아나?”
말을 타 본 적이 없었음에도 헬무트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네.”
“개인용 말은?”
“없어요.”
“종업원에게 말해 두지. 그를 따라 마구간에 가면 네 몫의 말을 내줄 거다.”
험한 길을 지나는 여정이면 말이 갈 수 없는 길을 가게 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말을 버리기는 비싼 데 중도에 처분하기 어려우니 아예 처음부터 타지 않는 걸 택한다.
뷰탄 상회의 의뢰가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기사들은 거의 필수적으로 말을 탄다. 귀족의 의뢰라면 말을 타는 일이 잦았다.
헬무트는 급하게 마을을 떠나야 했던 데다가 블랙 호크에 쫓기다 보니 말을 사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마리 구해 볼 걸 그랬나.
‘승마가 특별히 어려워 보이진 않았는데.’
헬무트는 말을 다룰 줄 안다. 그냥 말 위에 올라타서 떨어지지만 않으면 되는 거라면 쉬웠다. 그를 떨어트릴 수 있는 말은 없으니까.
‘남들 하는 거 보고 따라 하면 되겠지.’
헬무트는 느긋하게 생각했다. 케드릭의 말이 이어졌다.
“네 위치는 마차의 후열. 호위는 주로 기사들이 맡을 테니 주변을 경계하기만 하면 된다. 별로 할 일은 없을 거다.”
4급 용병 때부터 쉬운 임무만 맡는 듯한데, 이것은 운일까? 궁금해진다.
“혹시 아가씨가 말을 걸거든 예의를 갖추어 대답하도록. 제니아 아가씨는 체링겐 후작가의 고명딸이시니 각별히 주의해. 며칠 걸리지 않는 여정이나,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한다.”
“네.”
좀 이르긴 하지만 바덴으로 향하는 마차가 슬슬 늘어날 시기였다.
바덴의 아카데미들은 두 달쯤 후에 신학기에 들어선다. 제니아는 입학시험을 위하여 좀 이르게 바덴으로 향하는 것이다.
키넨 왕국의 정세가 불안정하여 많이들 다른 길로 돌아가고 있지만, 이들의 경우 빠른 길을 택하자는 제니아의 성화가 있었다.
또한 불안한 정세에도 감히 제국의 후작가를 쉽게 건드리진 못하리라.
헬무트 말고도 고용된 용병은 네 명이 더 있었다. 그가 마지막 충원이었다.
4명의 3급 용병. 2급 용병은 갑작스레 구하기엔 흔치 않은 재원이다.
먼저 들어온 용병들은 헬무트를 데면데면하게 대했다. 까다로운 귀족들을 상대로 의뢰를 맡는 용병들은 차림새가 깔끔하고 말수가 적어 노련한 느낌이 들었다.
딱 임무만 충실히 할 뿐 괜한 시비를 걸거나 텃세를 부리지는 않는다.
마물 사냥이나 호송 임무보다는 귀족 호위 쪽이 보수가 높고 덜 위험한 경우가 많았다. 괜히 문제를 일으켜 평판을 낮춰서는 안 되는 것이다.
헬무트는 종업원을 따라 마구간으로 향했다. 체링겐에서는 훈련된 말을 여유 있게 데리고 왔다.
보통 여관이 아닌 만큼 마구간은 꽤 넓었다. 체링겐의 말을 한데 모아 놓고, 주인이 있는 말과 주인이 없는 말을 따로 구분해 놓을 정도로.
기사들은 손수 길들인 자신만의 말을 몰았고, 용병들도 종종 그랬다.
싸워야 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 자신만의 말을 갖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말과의 호흡은 때로 마상 싸움의 승패를 결정지으니까.
“이쪽으로 오시지요.”
종업원에게 인계받은 마구간지기가 헬무트를 마구간의 한구석으로 인도하며 말했다.
“체링겐에서 주인 없는 말은 이 두 마리뿐입니다.”
두 마리의 말이 콧김을 푸르릉대며 헬무트를 맞이했다. 한 마리는 콧등 위에 까만 점이 찍힌 백마였고, 한 마리는 맑은 눈이 순해 보이는 밤색 말이었다.
귀족 가문에서 공들여 길러 낸 말답게 두 마리 모두 털에서 윤이 흐르고 영양 상태가 좋아 보였다.
“어느 쪽이 좋아 보이시는지요? 원하시는 놈에게 안장을 채우겠습니다.”
“어느 쪽이 나한테 좋아 보여요?”
헬무트의 장점은 아는 게 별로 없기에 남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였다.
“그야 어떤 점을 더 좋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백마 쪽이 좀 더 멋들어지는 데다가 힘 있고 좋은 놈이긴 합니다만, 이 밤색 녀석이 훨씬 순합니다.”
순한 녀석보다는 힘 있는 놈이 자신에게 맞았다. 헬무트는 대수롭지 않게 선택했다.
“백마로 하죠.”
마구간지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마에게 안장을 얹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해 보였던 놈은 헬무트가 등에 올라타자마자 성질을 숨김없이 내보였다.
히히힝! 마구간지기가 고삐를 놓자마자 백마는 곧바로 앞발을 들고 날뛰기 시작했다.
춤을 추듯 온몸을 흔들며 사방을 뛰어다녔다. 헬무트는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몸을 낮춰 말등에 달라붙었다.
“아이고, 내 이럴 줄 알았어!”
죽상을 한 마구간지기가 날뛰는 말의 고삐를 잡으려고 쫓아왔다. 헬무트는 그를 제지했다.
“내버려 둬요. 내가 알아서 해 볼 테니까.”
마물도 때려잡았는데 말 한 마리 길들이지 못할 건 뭔가. 오히려 잘 되었다.
헬무트는 비스를 끌어냈다. 다리에 힘을 줘 옆구리를 조이자 움직임이 둔해진다. 놈은 제 위에 쇳덩이가 올라 있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헬무트는 살기를 실어 말했다.
“가만히 있어.”
경직된 채 잠깐 반항을 더 해 보던 백마는 푸르릉 콧김을 뿜으며 멈춰섰다. 놈의 콧잔등에서 땀이 후두둑 떨어졌다.
강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이런 야생마 같은 녀석일수록 더하다. 본능이 살아 있으니까.
헬무트는 달래듯이 말했다.
“그래, 곧 출발해야 하는 데 힘 빼면 안 되지.”
헬무트는 백마를 몰아 보았다. 터벅터벅 걷다가 가볍게 달렸다. 마구간은 좁아서 빨리 뛰게 할 수는 없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타는 데 지장은 없을 것 같다.
헬무트가 말을 길들이는 모습을 감탄하듯 지켜보던 마구간지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거, 말은 잘 길들이시는 거 같은데 별로 타 본 적이 없는가 봅니다. 자세가 영…….”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마구간지기한테 약간의 강습을 받은 후, 좀 더 편해졌다.
헬무트는 그에게 약간의 돈을 주어 사례했다.
‘이걸로 말 타는 건 해결 됐고.’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는지도 모른다. 헬무트는 말에 탄 채 싸워 본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내려서 싸우면 될 게 아닌가? 아무 문제가 없었다.
*
헬무트는 출발 준비를 마치고 마차 주변에서 대기했다. 드디어 그의 시선에 제니아와 예의 그 마법사가 함께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집사와 몇몇 기사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레아 님, 어서 마차에 오르셔요.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기대되어요.”
상기된 얼굴로 그에게 달라붙어서 재잘거리는 제니아에 반해 마법사는 ‘예의만 갖추고 있는 태도’로 성가시다는 듯이 정면을 쳐다봤다.
그가 헬무트의 앞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아까처럼 시선이 잠깐 마주친 것 같았다. 마법사가 헬무트를 쳐다본 것이다.
그자는 헬무트의 존재를 의식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위험을 느끼는 본능일까? 마법사도 강해질수록 초감각이 발달하게 되니까.
‘강한 마법사라.’
헬무트는 아레아라는 이름의 마법사를 재평가했다. 그는 꽤 강한 마법사였다. 헬무트에게서 자신의 마력을 숨길 수 있을 만큼.
헬무트가 그의 마력을 느낄 수 있었던 건, 그의 마력이 몸 중앙으로부터 새어 나와 전신을 아주 미세하게 감싸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런 현상은 평범하지 않았다. 마법을 사용하기 전 마법사는 자신의 마력을 비스처럼 안으로 보유하고 있을 뿐이니까.
마법 물품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마력의 흐름이 저렇게 되진 않는다.
‘그렇다면 저 마법사는.’
헬무트는 해답을 찾아냈다. 저 아레아라는 자가 어떤 마법을 지속적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것.
다른 이들은 헬무트처럼 감각이 예민하지 않다. 마력을 감지하기도 힘들뿐더러, 마법사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쉬웠다.
하지만 저것은 분명히 마법의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