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504
503화 (특별외전 5)
저택으로 돌아온 그들에게 때맞춰 연락이 왔다.
[흠흠, 그래 우리, 약혼하기로 했어.]홍조를 띤 채 멋쩍은 듯 볼을 긁는 아스카는 좀 보기가 거북스러웠다. 아레아는 수정구를 꺼 버리려다가 참았다.
[조만간 다 같이 약혼식이 치러질 리노사에서 보자고.]서로가 격에 맞는 상대이니 빠르게 이야기가 진행된 모양이었다. 사흘 뒤, 약혼식 장소는 리노사의 왕성. 아레아는 그 사실을 헬무트에게 전달했다. 어차피 리노사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니 일정에 변화는 없었다.
소식을 들은 뮤트가 흥분한 태도를 보였다.
[내 동생이 약혼을 한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구나!]“……샤를로트가 왜 네 동생이야?”
[너와 나는 한 몸이었으니, 샤를로트는 내 동생이기도 하다. 기특한 것, 오빠를 찾으러 파헤의 숲까지 목숨을 걸고 들어오다니. 얼마나 감동적이던지.]뮤트는 헬무트의 기억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헬무트는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너 설마, 아레아한테도.”
아레아와의 기억도 녀석은 모두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감정 또한 기억의 일부이니, 헬무트가 느꼈던 감정들 그 모두를.
뮤트가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아레아는 예쁘지만…… 뭐, 마음 정도는 품을 수 있는 것 아닌가.]“마음으로만 끝내도록. 죽고 싶지 않다면.”
내가 죽이는 건 아닐 테지만. 생략한 뒷말은 뮤트도 알고 있으리라. 자신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될 것이다.
수줍은 듯이 아레아를 힐끔대는 뮤트
와는 달리, 아레아는 처음부터 이 녀석
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니까.
마법사로서 탐구심이 들 만도 한데 싸늘한 눈길에 말조차 섞지 않았다. 구실만 생기면 언제든 녀석을 없애려고 할 것이다.
그녀에게 집적대는 것은 죽어 마땅한 구실이었다.
상심한 듯하던 뮤트가 잠시 후 물었다.
[그, 시안이라는 녀석도 오는 건가.]“아마 오겠지.”
지금쯤 장벽 보수도 마무리되었을 거다. 잠깐 시간을 내어 리노사를 방문할 수 있을 터.
[……나, 그 시안이라는 녀석이.]좀 마음에 걸린다. 뮤트는 말을 삼켰다. 그보다는 시안에게 깃든 그 힘의 주인이. 관조하는 듯이 자신을 지켜보는, 마치 들여다보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대지의 정령. 그 존재가 자신에게 주목하고 있었다. 그 주목이 어둠의 싹으로부터 비롯된 그에게 달갑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다.
엘라가가 입을 열었다.
[결혼이라는 게 인간들의 공식적인 짝짓기 행사라면서? 네 동생도 약혼을 한다는데 넌 언제 결혼할 거냐.]애초에 둘이서 마음이 맞았으면 됐지 왜 결혼인지 뭔지 안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엘라가였다.
“글쎄.”
하이케를 찾겠다며 연구에 몰입한 아레아의 방 쪽을 힐끔 본 헬무트는 별다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십 년 안에는 그녀의 목표가 달성되지 않을까? 대마법사가 되겠다는 아레아의 재능을 믿어 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아레아는 대마법사 대공비라는 걸 꼭 동시에 이뤄 내고 싶은 모양이니까.
* * *
때맞춰 찾아든 것은 소식만이 아니 었다. 한참 놀러 다니 던 이그렐이 돌아왔다.
“자, 선물이다!”
이그렐이 과감하게 던진 것은 보석과 금괴가 가득 담긴 두 자루의 포대였다. 성인 남자도 담길 것처럼 컸다.
[넌 이제 인간한테 이런 것도 다 뺏냐.]엘라가는 당연히 이그렐이 강제로 빼앗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이었다.
“내가 말이야, 모처럼 흥미로운 도시를 발견해서 돌아다니고 있는데 웬 귀족이라는 녀석이 나더러 미인이라며 좋은 대접을 해 주고 싶다더군.”
거기까지만 들어도 충분히 수상했다.
“따라갔더니 불경하게도 이 몸에 손을 대려고 하길래 대가를 치르게 해줬지.”
씩 웃는 이그렐의 얼굴을 보아하니 그들이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알 것 같았다. 틀림없이 혹독한 대가를 치렀으리라.
“하는 김에 주거지도 박살 내고 반짝이는 것들을 주워 왔다. 인간들이 창고에 귀한 것을 쌓아 놓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
강도질이라지만 정당방위이니 뭐라 말할 것은 못 되었다. ‘네가 먼저 공격했으니 난 너를 죽여도 된다.’ 누구보다도 정당방위라는 단어를 잘 활용하는 파헤의 숲 출신들이었다.
“이거 좋은 거 맞지?”
허리를 척 짚은 이그렐이 의기양양하게 묻자 헬무트가 무심히 답했다.
“아스카한테 약혼 선물로 주면 되겠군.”
장물이니 황족인 아스카가 접수한다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출처가 출처인지라 받는 당사자가 기분 나빠할 수도 있었지만, 막상 리노사로 돌아가 선물을 건네자 아스카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럴 수가! 단 한 번도 네게 이런 걸 기대한 적이 없는데.”
헬무트가 돈은 많지만 자신도 안 쓰고 딱히 비싼 걸 선물하는 타입도 아니다. 이런 통 큰 선물은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이그렐이 가져다준 것이지만.
“이게 얼마나 될까? 이거면 빚을 청산할 수 있겠어!”
아직도 빚이 남아 있었나. 저래 봬도 마왕을 물리친 영웅 중 하나인데 아들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다는 게 의아했다.
“사실 샤를로트에게 줄 약혼반지를 내 돈으로 샀거든. 근데 좀 모자라서…….”
또 빚을 만들었다는 소리다. 파르네세 대공가라면 그 정도는 그냥 해 줄 만도 한데 자꾸 아스카를 궁핍한 처지로 몰아넣는 것이, 그의 탈주를 막기 위한 수단 정도로 보였다. 아스카를 잘 파악하고 있다.
“빚을 청산해도 네게 자유는 없을 텐데.”
없어야 했다. 샤를로트와 약혼해 놓고 제멋대로 자리를 이탈하는 것은 안 된다. 헬무트는 드물게도 오빠다운 생각을 했다.
“그건 그렇지…… 좋은 시절은 다 갔구나.”
하지만 아스카는 기분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어떤 짐은 기꺼이 짊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럴 마음이 들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헬무트는 그 얼굴을 보면서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것도 변한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그는 완전히 제자리를 찾았고, 그건 자신 역시도 그랬다.
그리고 아스카 곁에 샤를로트가 있듯이 자신의 곁에는…….
“동생을 보러 가야지.”
아레아가 속삭이자 헬무트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왜 그래?”
그때 등 뒤에서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왔어? 아스카!”
“늦게도 온다!”
뒤늦게 온 시안과 교대하면서 그들은 그곳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약혼녀분도. 이제 리노사로 아예 돌아오신 건가요?”
리노사 대공가의 일원들이 모인 장소로 이동하자 미하엘이 천연덕스럽게 그를 반겼다.
“그래.”
“앞으로 성심껏 보필하도록 하지요.”
육체가 건강하면 정신도 건강해진다. 골골 앓는 몸에서 탈출한 미하엘은 조금이나마 비뜰어진 성질을 고친 것 같았다.
샤를로트와는 종종 충돌을 빚는다고 들었다. 그러니 그녀가 어서 결혼해서 리노사를 떠나기를 바랄 터. 헬무트를 보필하는 그녀의 자리를 노리는 것처럼 보였다.
목숨이 달려 있으니 헬무트에게 수작을 부리긴 어려울 테지만, 그렇다고 신뢰할 수는 없다.
헬무트는 대답하는 대신 물었다.
“대공비께서는?”
“안쪽에 계세요.”
대공비는 샤를로트가 있는 방에서 막 빠져나온 터였다. 헬무트와 마주친 그녀는 흠칫 놀랐다.
“……오랜만이구나, 헬무트.”
명백히 헬무트를 피하고 있던 그녀였다. 하지만 딸의 약혼식에도 대공비가 참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리노사 대공가와 파르네세 대공가의 결합이라는 중대 행사니까.
“앞으로 혼사와 장례를 제외하고는 공식적인 자리서 뵙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녀에 대한 처벌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대공비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마.”
라토나에서 내보내기에는 아직 일렀다. 대공은 아직 대공이다. 그녀를 벌한다고 대공 부부 사이를 갈라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하나 권한을 빼앗고 그림자처럼 살게 할 것이다.
혈육이며 어머니지만, 누구보다도 믿을 수 없는 상대였다.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헬무트를 배반한 여자니까.
헬무트와 아레아는 그녀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섰다. 약혼식 준비를 하느라 바빠서 도통 얼굴을 볼 수 없던 샤를로트가 거기에 있었다.
약혼식답게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아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잠깐 몰라볼 뻔했다.
아레아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약혼 축하해.”
‘감사해요, 두 분 모두.”
“이건 선물.”
아스카에게 줄 선물은 성의 없게 때웠지만, 샤를로트 것은 아레아가 준비하기로 했다.
잘 포장된 상자 안에는 은빛 브레이슬릿이 놓여 있었다. 일반적인 장신구는 아니고 마법 아티팩트다.
“간단한 아티팩트야. 청결 마법과 불을 피울 수 있는 화염 마법이 걸려있지. 마력을 자동 보충하는 식이라 각기 하루에 한 번씩은 쓸 수 있어.”
야숙에나 유용할 법한 기능이었지만 샤를로트는 좋아했다.
“약혼 선물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듭니다!”
“그렇지?”
아레아의 입꼬리가 슥 위로 올라갔다. 이내 아티팩트의 사용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한 그녀와 샤를로트 사이는 꽤나 친근해 보였다.
“나 먼저 나가 있을게.”
아레아가 자리를 비워주고 나자 둘만의 대화를 나늘 수 있었다. 그렇게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기에 바로 중요한 대화에 들어갔다.
“약혼식 이후로도 리노사에 남을 건가.”
“물론이에요. 동생인 제가 먼저 결혼을 하는 것도 예에 맞지 않으니 약혼 기간이 좀 길어지겠지요. 길어지는 약혼 기간 동안 저는 리노사에 있을 거고요.”
네가 결혼을 언제 할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그 핑계로 나도 결혼을 미루고 리노사에 상주할 거라는 뜻이다.
“잘 되었군. 네가 할 일이 많아.”
“준비하고 있었어요.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시는 과정이 수월하도록.”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건 아니지만 여러모로 좋은 동생이다. 그 때문에 무심한 헬무트라도 그 질문만큼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보다 정말 아스카로 괜찮겠는지.”
“괜찮을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봐야죠. 약혼이지 결혼은 아니니까요.”
부드럽게 웃는 얼굴과 별개로 샤를로트는 냉정해 보였다. 과연 헬무트의 동생다웠다.
* * *
“이로써 피로 맺어지기에 앞서, 고귀한 두 혈통이 약혼하게 되었음을 루멘의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별로 원치는 않았지만 신전에서도 화해의 표시로 새로 임명된 대신관을 보내왔다. 그 때문에 신전과 전쟁을 벌인 지 오래 지나지 않았는데 대신관의 축하를 받는 기묘한 상황이 펼쳐졌다.
하지만 여기 있는 이들은 이 신속한 화합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정치적이었다.
당사자인 아스카도 별생각 없이 웃는 얼굴이다. 그는 신전도 거슬리지 않을 만큼 샤를로트와 약혼한다는 게 마냥 기쁜 것처럼 보였다.
“자, 여기.”
아스카가 샤를로트에게 반지를 끼워 주었다. 과연 그가 빚을 만들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샤를로트가 우아한 말투로 말했다.
“마음을 다해 충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나도, 틀림없이.”
곧이어 축하연이 펼쳐졌다. 가족들에게 다가간 아스카는 이 사람 많은 곳에서 용케 울지 않고 있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동생, 아리아에게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안타깝게도 넌 미래의 파르네세 대공이 될 기회를 잃었다.”
파르네세 대공이 지적했다.
“너한테 대공 위를 꼭 물려 준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저 후계자잖아요. 맨날 붙잡아 놓고 부려 먹지 못해 안달하시면서 무슨.”
“앞으로 리노사 대공녀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언행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알았어요! 오늘 같은 날도 잔소리를 하시네.”
“아스카, 아버지께 예의를 갖추렴!”
화기애애해 보이는 파르네세 대공가 일가족이었다. 그에 반해 헬무트 쪽은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공은 샤를로트에게 당부의 한마디만을 남겼다.
“약혼하더라도 네가 리노사의 사람임을 잊지 말거라. 너는 나의 자랑이니.”
“예.”
샤를로트는 아스카와 달리 신망을 얻고 있었고, 그 때문에 별다른 충고가 필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