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52
51
헬무트
51화
‘수련이나 하러 가 볼까.’
헬무트는 오는 길에 봐 둔, 마을 바로 바깥의 공터로 향했다. 원래는 장작을 다듬는 곳인데 밤에는 사람이 없다. 이런 시골 마을에서는 해만 지면 온 사방이 캄캄해진다. 웬만해선 나돌아다니지 않는 것이다.
‘이번 의뢰에는 자유 시간이 꽤 주어지겠군.’
페이스 용병단에서의 호송 임무 때에는 워낙 잡일을 챙길 게 많아서 수련 시간을 많이 확보하기 힘들었다. 그때는 몸도 회복해야 했으니.
자리를 잡고 선 헬무트는 수련을 시작했다. 비스를 배제하고 육체를 혹사하여 줄어든 근육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손아귀가 아리도록 검을 휘두르고 다리 힘만으로 나무에 매달려 버티니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겨울에도 기온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 키넨 왕국이라지만 밤 기온이 꽤 찼다. 금방 싸늘하게 식은 몸이 정신을 맑게 했다.
‘비스가 좀처럼 늘지 않는군.’
헬무트는 수련할 때 육신을 단련하는 비중을 늘렸다. 파헤의 숲에 있을 때보다 근육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릇이 튼튼하지 않고선 많은 양의 비스를 감당할 수 없다. 그동안 파헤의 숲에 있을 때만큼 회복되고도, 3분의 1 정도 비스가 더 늘어났다. 하지만 거기서 정체 상태였다. 확 나아가긴 나아갔는데 거기서 턱 막힌 느낌이다.
비스를 수련하는데 기운이 풍부한 어느 한 곳에 진득이 자리를 잡는 쪽이 말할 필요도 없이 더 좋았다.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문제지만.
‘환경 때문인가? 그 숲도, 파헤의 숲만큼은 못 하지만 마력이 풍부했는데.’
많은 수의 마물을 베어 내면서 마기가 숲에 배었다. 일부는 그대로 마기로 남지만, 일부는 숲 고유의 마력으로 승화된다. 헬무트는 그 마력을 자신의 비스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바깥세상은 전체적으로 마력이 희박하다. 파헤의 숲처럼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장소는 많지 않았다.
‘다리언이 검사들은 비스 수련장을 따로 구축해 놓는다고 했지.’
그가 파헤의 숲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좋다고 지나가듯 말했던 게 기억이 났다. 아카데미에도 그런 곳이 있을까? 생각에 빠진 헬무트가 문득 허공을 올려다봤다. 어딘지 미묘하게 감각을 자극하는 게 있었다. 저 위쪽에서.
‘밤 새인가?’
별이 무성한 밤하늘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눈가를 찌푸린 헬무트는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그것이 헬무트가 지금 해야 할 일이었다.
마법사, 아레아는 마법을 거두었다.
‘독수리의 눈.’
많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마법이다. 일반적인 감시 마법보다는 더 은밀했다. 정신을 분리하여 저 먼 상공으로 시야를 끌어올린다. 거기서 망원경처럼 확대하면 원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의 한계는 극복할 수는 없지만. 아레아의 스승이 어지간히 예민한 검사라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장담한 마법이었다.
“감각이 좋은 녀석이야. 오래 지켜보면 걸리겠어.”
아레아가 중얼거렸다. 헬무트란 녀석, 이상한 느낌을 줬다. 용병치곤 곱상한 얼굴에 도수 없는 안경까지. 짧은 시간 관찰한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제비 같은 녀석.’
아레아가 느낀 건 딱 그것이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헬무트란 이름의 소년은 용병다웠다. 과묵하고 훈련에 성실하다. 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실력 있는 용병이라면 많이 봤다. 저 정도 나이에 3급 용병은 드물지만, 그 정도 실력의 소년들은 유명한 검가에선 드물지 않다. 인재들이 모이는 그레타 아카데미에도 천재라고 칭송받는 실력 좋은 검재들은 꽤 많았다.
단지 실력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아레아가 느낀 이상한 감각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마법사의 초감각은 무시할 게 못 되는 법이었다.
‘일단은 위험해 보이진 않지만.’
아레아는 침대에 노곤한 몸을 눕혔다. 아직은 판단하기 힘들었다. 앞으로도 유의해서 지켜볼 생각이지만, 오늘은 이걸로 족했다. 아레아가 생각을 정리하는 그때, 문을 콩콩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레아 님, 주무세요?”
명랑한 목소리가 아레아의 기분을 수직으로 떨어뜨렸다. 아레아는 노골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철없는 아가씨라지만 이 밤중까지 자신을 괴롭힐 참인가. 다행히 아레아만 그렇게 생각했던 건 아닌 모양으로, 하녀 둘이 나타나 그녀를 만류했다.
“제니아 아가씨, 지금 주무실 시간인데 아레아 님을 찾으시다니요.”
“아니, 난 잠이 안 와서 이야기나 좀 나누려고 그랬지.”
“아무리 그래도 남녀가 이 늦은 시간에 함께…….”
“난 고작 열세 살이라고. 너희도 같이 있으면 되잖아!”
“그렇지만 아레아 님은 이미 주무시는 것 같은데요?”
“불을 켜 둔 것 같은데? 안 주무시는 거 아니야?”
문을 열려는지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가 둔 것이 다행이었다. 아레아는 신경질적인 한숨을 쉬었다. 잠자리까지 시달리다니, 최악이다.
“불을 켜두고 주무실 수도 있죠. 어서 이리로 오세요. 아가씨도 쉬셔야죠. 내일도 오늘처럼 오래 마차를 타야 하는데.”
“어서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으셔요.”
“칫, 알았어.”
그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며 아레아는 눈을 감았다. 빨리 쉬어야 했다. 내일도, 그는 저 소녀를 견뎌내야 하니까. 바덴에 도착하는 그때야 아레아는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평온한 여정이 이어졌다. 귀족들은 아랫것들이 잡담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사들도 사사로운 잡담을 나누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헬무트 못지않게 붙임성 없는 용병들은 더더욱이나 말수가 적어졌다. 헬무트가 들을 수 있는 건 마차 창 너머로 흘러드는 제니아의 목소리뿐이었다. 거기에 간간이 대답하는 마법사의 목소리도.
“제 사촌 레온은 그레타 아카데미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있지요.”
“들어본 적 있습니다.”
정확히는 이름만 들어봤었다. 그 레온이 제니아가 말하는 레온인지 알게 뭔가. 아레아는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다.
“역시, 아레아 님도 아시는군요. 제 사촌 레온은 아레아 님보다 두 학년 위의 선배일 테니, 잘 모르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번에는 제 사촌을 화제 삼아 말을 붙일 모양이었다. 제니아는 한동안 레온을 통해서 들은 그레타 아카데미와 바덴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아마 그 레온이라는 녀석도 어지간히 수다쟁이인 것 같다고 헬무트는 생각했지만, 귀담아 들어뒀다.
이쪽 국경도 막혀 버릴지 모르니, 일정을 서두르기로 정한 터였다. 그래도 귀족 아가씨를 모시는 행렬이다 보니 가는 길에 몇 번은 휴식을 취해야 했다. 가다 보니 오랜만에 괜찮은 곳이 눈에 들어왔다. 지나가다가 여행자들이 머무는 듯이 보이는 장소였다. 샘 근처에 나무를 세로로 잘라놓은 의자와 그루터기 형태의 테이블이 있었다. 길튼이 손짓했다.
“여기서 좀 쉬었다 가는 게 좋겠습니다. 아가씨도 고단하실 테니.”
“이런 곳에 샘이?”
“상태는 어때.”
“물은 깨끗하군요.”
샘물을 조금 길어서 마셔본 기사가 답했다. 여행 도중에 물을 수급하는 건 항상 중요한 일이다. 고개를 끄덕인 길튼이 말했다.
“여기서 식사를 들지.”
하녀들이 부지런히 오가며 식사를 준비했다. 당연하지만, 아가씨와 기사들을 위한 식사다. 용병들에게도 수프 정도는 내주긴 하지만 기본은 빵과 치즈, 그리고 육포였다.
“뭔 놈의 식사하는 데만 한나절이니.”
용병 한 명이 작은 소리로 투덜대며 빵을 씹었다. 헬무트도 빵을 씹으면서 거기에 동조했다. 무엇보다 식사를 차별한다는 점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뷰탄 상회에서는 용병들이나 상회 사람들이나 비슷하게 먹었다. 하지만 이들은 귀족답게 풀 코스는 아니더라도 여러 단계로 나누어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 같았다. 그런 번거로운 식사를 모두에게 제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맛이 약간 이상한데.’
샘물을 떠서 맛보던 헬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헤의 숲에서 오랜 시간 마토를 섭취한 그는, 모든 종류의 독에 대한 저항력이 높은 상태였다. 아주 치명적이고 강력한 독을 다량 들이켜도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다리언이 말했다.
이게 만약 독이라면 몸에서 미열이 솟으며 저항하는 징후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반응은 없었다. 이게 독이라면 처음 물을 마셔 본 기사는 이미 쓰러졌을 터.
헬무트는 주변 사람들을 쭉 훑어봤다. 특별히 이상을 보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정리할 무렵이 되자, 그때쯤 한두 명에게 이상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처럼 물을 따로 마시지 않더라도 요리할 때 물을 길어다 쓴 탓에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두가 샘물을 섭취했다. 하나둘씩 눈을 비비거나 끔뻑거리며 졸린 기색을 보였다.
“피곤하군. 졸음이 밀려오는데.”
“배가 불러서 그런가.”
“조금 쉬었다 출발하는 것이…….”
“그건 안 돼. 일정을 서둘러야 하는데.”
말을 나누는 여유도 잠시, 한 명씩 픽픽 쓰러져서 그 자리에서 코를 골며 잠들기 시작하자, 이상을 눈치챈 사람들은 졸음을 쫓으려고 애썼다.
“함정이다!”
“독을 탄 건가!”
“잠을…… 쫓아야 돼!”
제 손을 검으로 찍어 졸음을 쫓아보려던 의지 있는 기사도 있었으나 그의 의지는 약효를 이기지 못했다. 검 손잡이를 움켜쥐고 쓰러진 기사를 마지막으로 움직임은 사라졌다. 순식간에 침실이 된 그곳에서 멀쩡히 눈을 뜨고 있는 건 헬무트 혼자였다.
“독이 아니라 수면 약 같은 거였나.”
중얼거리며 주변을 훑어본 헬무트는 일단 대세를 따르기로 했다. 일단 바닥에 드러눕고 자는 척했다. 누군가 이 상황을 의도한 거라면 모습을 드러낼 터. 저 먼 곳에서 미세한 기척들이 느껴졌다. 족히 수십에 이르는 기척. 그들이 샘에 수면제를 풀었을 것이다.
잠시 후, 이쪽으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헬무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살폈다. 쓰러진 다른 용병들이 절묘하게 가려주고 있는 위치라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었다.
하나같이 활이며 검을 들고 있는 그들은 옷차림부터 허술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도적이라기엔 갑옷까지 잘 갖추어 입고 있다. 키넨의 국경지대 병사들이 도적화 된 걸까? 엄격하게 규율이 잡힌 군대는 아닌지 도착한 이들은 시끄럽게 떠들며 함정에 걸린 체링겐 일행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임마, 내가 월척이랬지? 저 말들 봐라. 이번에 새 말 하나 장만하는 거냐?”
“귀족이잖아. 오호우! 돈이 되겠는데?”
“어디 보자. 키넨의 귀족은 아니로군?”
“제국의 귀족인가 봐. 여기 문장이 있어. 체링겐? 체링겐이면 후작가 아니야?”
“어이쿠, 오금 저려라. 제국의 후작가라고?”
“몸값을 거하게 받아낼 수 있겠군!”
“어서 하나씩 잡아다가 묶어. 깨어나면 골치 아파진다.”
“농담 마. 저 샘에 푼 걸 마시면 집채만 한 말도 꼬박 하루 동안 정신을 잃는데.”
“그래, 저게 우리의 보배지. 귀족 나리들이 이렇게 쉽게 걸려줄 줄은 몰랐는데. 대가리가 나쁜 건 귀족이나 평민이나 다 똑같은가 봐?”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그때 유독 덩치가 큰 남자 한 명이 나서서 발을 쿵쿵 굴렀다. 딱 보기에도 우두머리였다.
“언제까지 딴짓할 거냐! 어서 움직여!”
“예, 예. 두목.”
이미 많이 해본 일인 듯, 도적들은 무기를 따로 빼두며 기사들부터 몸을 묶어두기 시작했다. 손발을 모두 척 보기에도 질긴 밧줄로 꼼꼼히 묶었다. 아무리 비스로 근력을 강화해도 저걸 육신의 힘만으로 끊어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헬무트에겐 해당 사항 없는 일이었다.
‘묶도록 놔둬야 하나.’
헬무트는 고민했다. 혼자서 전부 해치울 수 있다. 시체까지 말끔하게 처리하고 흔적을 지운 후 모른 척한다면 저들이 깨어나도 헬무트가 한 일에 대해선 알지 못할 것이다. 이상하다고는 느낄 테지만, 헬무트에게 의심의 눈길이 돌아오진 않을 터.
하지만 살인은 어둠의 싹을 키운다. 구역질 나는 반향, 두 번 겪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뭔가, 미묘하게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아직 좀 더 고민해 볼까.’
기사들을 먼저 묶고 있는 도적들에게 두목이 명령했다.
“저 마차 안에 한 번 살펴봐. 저 안에 귀족이 타고 있을 테니까.”
도적 몇 명이 그쪽으로 향하고 곧 마차의 문이 열렸다. 환호성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