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53
52
헬무트
52화
“오, 여기 엄청 귀여운 아가씨가 있는데? 부들부들한 드레스를 입은 귀족 아가씨라고!”
“히야! 이 피부 좀 봐라. 완전 인형같이 생겼는데? 변태들 수집품으로 팔아넘기면 제법 돈을 받겠어.”
“그보단 체링겐에 좋은 값을 불러야지. 괜히 귀족 아가씨 건드렸다가 추적당하고 싶냐?”
“그 전에 살짝 만져는 봐도…….”
“이 새끼, 이거. 순서를 모르네. 그런 건 두목이 먼저 해야지.”
이야기를 듣던 헬무트는 문득,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마차에는 제니아뿐만 아니라 마법사도 함께 타고 있다. 도적 중 누군가 그를 봤다면 소란을 떨었을 것이다. 그 마법사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외모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들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거기에 마법사가 없단 것.
‘어디로 간 거지?’
실낱같이 미세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도적들의 집중력이 마차로 쏠린 그때, 뒤쪽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움직이지 마.”
차분하지만 모두가 들릴 수 있을 만큼 힘이 실려 있다. 일제히 음성이 들려온 쪽을 향해 시선을 향했다. 마법사 아레아가 두목의 등 뒤에 파랗게 빛나는 손바닥을 대고 서 있었다. 두목이 얼어붙은 채로 입만을 움직였다.
“뭐야, 빌어먹을! 몸이 안 움직여! 내 뒤에 뭐가 있는 거야?”
“마법사인가?”
느슨해져 있던 분위기가 살얼음판같이 변했다. 도적들은 하나같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레아는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네놈들 두목이 죽길 바라지 않는다면 무기를 내려놔.”
아마 은신 마법으로 몸을 숨기고, 기회를 엿보았을 거다. 두목이 혼자가 되는 기회를. 하지만 헬무트는 마법사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말은 헬무트의 감각으로도 아주 근거리가 아니라면 눈치챌 수 없을 만큼, 마력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 헬무트가 1급 용병 이상의 실력자라는 걸 생각해 볼 때 비범한 마법사였다.
도적들은 수군거리며 저희끼리 서로를 돌아봤다. 아레아는 그들에게 고민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파지직!
“으허헉!”
소리를 지르며 두목이 선 채로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전격계 마법이다. 까무러치지 않는 게 용할 정도로 엄청난 고통이 골수까지 흔들었다.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말했어.”
모두를 상대하는 것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우두머리를 인질로 잡는 것이다. 그러나 도적들은 예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방법을 택했다.
“너야말로 두목을 놔줘! 그렇지 않으면 이 계집앨 죽이겠다.”
바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니아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협박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레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동요하긴커녕 입가에 비딱한 웃음이 서렸다.
“죽이던가.”
털끝만큼도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정말로, 죽여도 상관없는 것처럼. 아레아는 다시 한 번 마법을 시전했다. 파지직! 허공에서 부르르 떨리는 두목의 눈알이 고통에 까뒤집혔다. 그가 침을 튀기며 부하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무, 무기. 무기 내려놓으라고 새끼들아!”
하지만 시키는 대로 따를 만큼 규율이 있는 놈들이 아니었다. 제니아를 붙잡은 놈이 손에 힘을 주었다.
‘허세인지 아닌지, 시험해 볼까?’
위협 삼아, 목에 조금 상처를 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가 손에 힘을 주는 순간, 옆에서 쇄도해 온 뭔가가 그의 어깨를 꿰뚫었다. 퍽!
“크아아악!”
피를 흘리며 나뒹구는 남자 주변에서 도적들이 거의 시간 간격을 두지 않고 하나씩 나가떨어졌다. 다음 순간 제니아 옆에는 한 인영이 서 있었다. 아레아가 눈을 찡그리며 상대를 확인했다.
‘저 녀석은.’
“의뢰인을 죽이면 곤란하지.”
헬무트는 제니아를 물건처럼 들어다가 마차 안으로 던져 넣고 문을 닫았다. 마법사 혼자 이 상황을 해결했다면 나서지 않았겠지만, 상황이 그를 나설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용병이 아닌 저 마법사에겐 그녀의 안전이 아무래도 괜찮은 문제라도 헬무트에겐 달랐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받은 의뢰가 호위이니 호위에 실패해서 의뢰인이 죽거나 하면 돈을 못 받는 것 아닌가? 그런 헛수고는 할 수 없다.
“네 말은 아무도 듣지 않는 것 같은데.”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걸 감지한 두목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이 새끼들아, 빨리 무기 내려놓으라고!”
“뭐해, 처리하지 않고.”
헬무트는 아레아에게 빨리 두목을 죽일 것을 요구했다. 부하들이 말을 듣지 않는 걸 보니 저 두목은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다 쓸어버리는 게 편할 거다. 헬무트는 살인만은 피할 생각이었다. 이 정도의 도적들, 죽이지 않고도 숨만 붙여 놓은 상태로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눈치를 보던 도적들이 먼저 움직였다.
“도망쳐!”
쓰러진 동료들도, 두목도 내버려 두고 저들끼리만 살길을 찾아 달렸다. 단결한 듯이 하도 쏜살같이 내빼는 통에 추적하려던 헬무트도 멈칫거리다가 포기했다.
파지직! 세 번째 전격 마법이 작렬했다. 정신을 잃은 두목이 이번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나뒹굴었다.
“남은 놈들을 묶어 두지.”
두목을 기절시킨 아레아가 턱짓으로 지시했다. 헬무트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넌 날 고용한 적이 없어.”
“난 의뢰인의 손님이야. 그건 즉, 네 의뢰인과 동등한 위치란 뜻이지.”
“네가 그녀를 죽이든 말든 상관없다고 한 걸 알면 손님이 아니게 될 텐데?”
“내가 언제?”
아레아가 시치미를 뚝 뗐다.
“어차피 그녀는 네 말보단 내 말을 믿을 거야.”
그건 그랬다. 아레아에게 열광하는 제니아의 태도로 보아, 헬무트의 말을 순순히 믿을 것 같지 않았다.
“싫으면 관둬. 내가 할 테니까.”
아레아가 기사들 쪽으로 움직였다. 잠든 그들을 묶고 있던 밧줄이 슬금슬금 움직여 풀어지더니, 공중을 날아 남아 있는 도적들을 한 곳에 옮겨 묶기 시작했다. 꼭 밧줄이 살아 있는 뱀이 된듯한 기이한 모습이었다.
“이름이 헬무트라고 했나?”
작업을 마친 아레아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헬무트를 똑바로 노려봤다.
“너, 어떻게 잠들지 않았지?”
아레아는 모든 종류의 음식물을 먹기 전에, 정화의 마법을 건다. 그것은 독만을 정화하는 게 아니라 다른 모든 종류의 효능을 제거하는 고난도 마법이었다. 그 때문에 상황을 감지하고 모습을 감출 수 있었다. 하지만 헬무트는 달랐다. 그는 마법을 쓸 줄 모르는 용병이다.
“난 저 샘의 물을 마시지 않았으니까.”
“네가 아까 물을 마시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원한다면 대지의 기억을 읽어서 네 눈앞에 보여줄 수 있어.”
피곤할 만큼 집요하게 따지고 든다. 헬무트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좀 특이 체질이라서.”
“그래? 어떻게 특이 체질인데. 넌 좀 수상해. 처음부터 그랬지.”
중얼거리던 아레아의 몸에서 마력이 일어났다. 새하얀 기운이 그의 몸을 타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헬무트는 검에 손을 가져갔다. 저 상태가 뭔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마법을 구현하기 바로 전 단계다. 보랏빛 눈동자에 광채가 일었다.
“내게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내가 직접 널 해부해 볼 테니까.”
헬무트는 아레아라는 이 마법사가 그동안 차분한 척하고 있었을 뿐 성격이 꽤 급하다는 걸 깨달았다. 헬무트는 견적을 재봤다. 일단 제압해 놓고 협박할까, 죽일까. 하지만 무력으로 어떻게 하기엔 만만찮은 상대다. 질 것 같진 않지만 혹시 도망치기라도 하면 골치 아팠다.
‘살인은 하면 안 되는데, 의뢰비는 받아야 하고.’
이전의 헬무트였다면 싸우는 것을 택했을 테지만, 이제는 제약이 걸렸다. 헬무트는 일단 아레아의 공격을 받아쳐 보기로 했다.
“그러는 너야말로, 줄곧 마법을 쓰고 있던데, 무슨 꿍꿍이지?”
“내가 마법을?”
“시치미 떼지 마. 처음부터 계속, 쓰고 있잖아. 네 몸을 둘러싼 마력을 느꼈어. 그게 마법이 아니면 뭐지?”
아레아의 입가에 미소가 배었다. 싸늘해 보이는 미소였다.
“여정 중이니 청결을 유지하는 마법을 쓰고 있지. 눈치가 빠른데?”
“그런 마법이라면 풀어 봐도 문제없겠지?”
의기양양하게 굴던 입술이 꾹 닫혔다. 아무래도 숨기고 있던 사실을 제대로 지적당한 것 같다. 당황한 마법사가 살벌한 눈으로 헬무트를 노려봤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야.”
“그 말 돌려주지. 네게 상관하지 않을 테니, 너도 내게 상관하지 않는 걸로 하지.”
헬무트는 협상을 시도했다. 이 마법사는 숨기는 게 있다. 그리고 자신도 숨기는 게 있었다. 서로가 수상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 게 편하다. 어차피 그나, 저나 이 일행에서 다른 의도는 없는 것 같으니까.
“……일단은 좋아, 그러지.”
아레아는 헬무트의 휴전 요청을 받아들였다. 허가 찔린 기분이 전의를 누그러뜨렸다. 아레아도 나름대로 판단을 내렸다. 주변에 잠든 사람들이 쓰러져 있는 야영지에서 싸우는 건 적절하지 못하다. 움직임을 보건대 헬무트란 저 용병,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사람들을 깨워야겠어.”
‘다음에.’
기회는 만들면 된다. 아레아는 잠든 사람 중 몇몇에만 정화의 마법을 펼쳤다. 이 많은 사람에게 모두 마법을 쓰려면 마력이 많이 든다. 저 수상한 녀석을 놔두고 그렇게 마력을 소진할 수는 없었다.
“큰일 날 뻔했군요.”
깨어나 상황을 파악한 길튼이 놀란 가슴을 추슬렀다. 너무도 방심했다. 소중한 아가씨를 모시고 있으면서, 이런 함정에 빠져들다니. 만약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는 체링겐의 집사로서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깊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마법사님께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별말씀을, 동행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제니아를 죽여도 상관없다고 말했던 것치곤 뻔뻔스러운 태도로 아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레아도 생각 없이 그랬던 게 아니다. 인질을 잡았다고 협상에 응하면 자신도 무기력해진다. 당장 제니아를 죽이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적들 전원을 마비시키는 마법을 준비하려면 약간의 시간을 벌어야 하는 터. 바로 숨이 끊기지 않는다면 제니아를 치유 마법으로 어떻게든 살려놓을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다. 그조차도 제니아 입장에선 눈물 날 일이겠지만.
“그보다, 저기.”
아레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 손끝은 나무 그루터기에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헬무트를 정확하게 지목하고 있었다.
“저기 있는 저 용병도 저를 도왔습니다. 어떤 이유에선지 잠들지 않았더군요.”
아주 의심스럽다는 어조였다. 헬무트는 저를 쳐다보는 길튼에게 아레아 못지않게 태연하게 말했다.
“체질적으로 약이 잘 안 듣습니다.”
길튼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체질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지. 대단하군. 의뢰비를 지불할 때 자네에게 섭섭지 않게 사례하지.”
귀족의 사례라면 얼마나 될까. 헬무트는 금액부터 계산해보았다. 이천? 의뢰비와 합하면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역시 의뢰인을 구하길 잘했다. 헬무트는 내심 흡족해했다.
하지만 정작 제니아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곧바로 아레아에게 달려갔다.
“어머, 마법사님. 정말 대단하세요. 그런 와중에도 정신을 잃지 않으시다니. 홀로 도적들을 상대하느라 어찌나 고생스러우셨을지.”
“별말씀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헬무트도 깨어 있었단 걸 알면서도 아예 그는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는 그녀는 증세가 이전보다 더 심화된 것 같았다. 눈빛이 훨씬 더 열기를 띠었다. 꼭 사랑에 빠진 것처럼.
그녀는 자신이 정신을 잃은 동안 무슨 일을 당할뻔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레아의 행동도. 차라리 다행이었다. 알았다면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졌을 테니까.
그녀는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며 아레아에게 감사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아아, 아레아 님.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도 모자라, 제 목숨을 구해 주시다니. 이건 역시 운명!”
난데없는 운명 타령에 아레아의 팔뚝에 소름이 일었다. 체링겐은 제국에서도 이름 높은 명문가. 부와 신분을 모두 갖춘 미소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면 어지간해선 마다하지 않을 테지만, 아레아에겐 해당하지 않는 소리였다. 제니아라서가 아니라 제국의 황녀가 그를 좋아한다고 했어도 마다했을 것이므로. 냉정한 표정을 고수하던 아레아의 입가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