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55
54
헬무트
54화
4장 시험공부
“그래, 누구를 찾아왔다고요?”
여관을 잡자마자 말을 맡기고, 거추장스러운 변장을 풀었다. 곧바로 찾아간 그레타 아카데미에서 사무직원이 귀찮은 표정으로 헬무트를 응대했다. 입학시험이 가까워질수록 아카데미 직원이나 학생을 찾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특혜를 보거나 정보를 얻거나. 심지어 뇌물을 주고 매수하려고 드는 이들도 있었다.
‘곱상하게 생겼고, 옷도 고급인데 어느 댁 자제분인가? 그래도 하인들 시키지 않고 직접 왔네.’
헬무트는 자신이 만나고자 하는 사람의 이름을 댔다.
“에단 쿠드로.”
“검술 학부 교관이신 에단 쿠드로 님 말씀이시죠?”
‘맞게 찾아왔구나.’
바덴에 있을 거라고는 들었다. 아카데미에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출타 중이신데.”
“언제쯤 돌아오죠?”
“어디 보자, 사흘 후에 돌아오시는 걸로 말씀을 남겨 두셨군요.”
“그럼 사흘 후에 오지요.”
“그분을 만나고자 하시는 용무는?”
“제 스승님과 아는 사이세요.”
‘아아, 추천이라도 부탁하려나 보군.’
직원은 내심 코웃음 쳤다. 하지만 자신의 선에서 뭐라고 할 일은 아니었다. 에단 쿠드로는 완고한 남자다. 지인의 제자라고 해서 실력도 안 되는데 편의를 봐주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전달하지요. 성함은?”
“헬무트.”
“뭐, 그럼. 사흘 후 오후에 여기를 다시 방문해 주세요.”
그레타 아카데미를 빠져나간 헬무트는 바로 여관으로 향했다. 하도 사람이 바글거리기에 노숙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운 좋게 널찍한 수련장이 딸린 여관에 방을 구할 수 있었다. 헬무트는 그 후로 사흘간을 꼬박 수련에 몰두했다. 치안이 잘 되어 있는 바덴에는 블랙 호크의 손길도 미치지 않는다.
그는 사흘 후 다시 아카데미를 찾았다. 저번과 같은 직원이 헬무트를 맞이했다. 그는 바로 헬무트를 알아봤다. 보기 드물게 위압적인 분위기에 잘생긴 소년이라 기억에 남았다.
“아아, 얼마 전에 왔던 분이군요.”
“그 사람은 돌아온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일단 말씀은 전해드렸는데…… 헬무트라는 분은 모르신다는데.”
아무래도 그때 남긴 헬무트라는 이름을, 에단 쿠드로의 지인으로 착각한 것 같다. 참 모호하게 질문한다고 생각하며 헬무트는 말했다.
“그건 내 이름이에요. 직접 만나서 이야기했으면 하군요.”
어차피 제대로 물었어도 다리언의 이름을 발설할 수는 없다. 다리언의 제자라는 걸 드러내선 안 된다. 그를 함정에 빠뜨려 파헤의 숲으로 보낸 자들이 살아 있는 한. 이제껏 헬무트의 검술을 제대로 본 자는 모두 죽었다.
“그건…… 뭐 일단 말씀드려 보지요. 기다려 보세요.”
그는 곧장 자리를 떴다. 십여 분쯤 기다렸을까, 돌아온 사무직원이 헬무트에게 손짓했다.
“이리로 따라오세요.”
헬무트는 아카데미 안쪽으로 안내되었다. 아카데미 안쪽, 특히 교수나 교관들이 거처하는 곳은 출입증이 있어야만 들어설 수 있다. 굳게 닫힌 철문 앞에 선 사무직원이 품에서 카드를 꺼냈다. 그리고 문 가운데 둥그렇게 패여 문양이 새겨진 곳에 가져다 댔다.
지잉. 마력이 모이는가 싶더니, 곧 철컹, 하고 거대한 문이 열렸다. 문손잡이를 밀어 활짝 연 사무직원이 으스대듯이 말했다.
“마법이지요.”
그는 곧바로 고풍스러운 문들이 초상화와 함께 줄지어 있는 복도를 걸어, 어떤 방문 앞에 섰다.
“이곳입니다. 쿠드로 교관님이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무직원이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안쪽에서 들어오란 묵직한 음성이 들렸다.
“자, 안으로.”
고개를 끄덕인 헬무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낯선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호가니로 만들어져 조각된 가구들과 모피로 장식된 고풍스러운 방이었다. 검사의 방이라기보다는 어느 귀족 저택처럼 보였고 책상에 앉아 두꺼운 서책을 뒤적이는 학자의 방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이제껏 본 곳 중에 가장 좋은 곳이 제니아의 여관이었던 헬무트로선 낯설 만했다.
‘에단 쿠드로, 쿠드로라고 했지.’
귀족이라서 그런가. 품격이 남달랐다. 방안에는 뒷짐을 지고 선 단단한 풍채의 남자가 있었다. 헬무트는 일순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에게서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비스가 느껴졌다. 그것은 흡사 수면이 잠잠한 깊은 호수처럼 느껴졌다. 안으로 갈무리되었다곤 하나 정제되고 다듬어진, 긴 세월 수련해 온 검사의 비스.
헬무트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에단 쿠드로는 다리언만큼, 산처럼 느껴지는 강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헬무트가 이제껏 만난 검사 중에는 가장 강했다.
‘1급 용병? 그쯤 되면, 이 정도일까.’
그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헬무트라는 이름은 모른다. 무슨 용건으로 나를 찾은 거냐.”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 생각보다 젊어 보이는 중년의 얼굴. 지성과 날카로움이 공존하고 있는 귀족적인 인상이었다. 경지가 높은 검사는 나이를 초월하여 젊음을 간직한다. 짙은 녹색의 눈동자가 헬무트를 꿰뚫듯이 응시했다. 매의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만약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헬무트는 이 자와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걸 바라는지, 바라지 않는지 헷갈렸다. 쉽게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마음, 그러면서도 싸우고 싶은 호승심.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를 앞에 두니 배 속이 떨리고, 오싹한 전율이 흐른다.
남자가 재촉했다.
“말하라.”
그 말이 헬무트에게 이성을 돌려놓았다. 싸울 때가 아니었다.
“26년 전, 당신이 했던 맹세를 기억하는지요?”
“내가 했던…… 맹세라고?”
남자의 눈빛이 변했다. 말소리가 흐릿해졌다. 남자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헬무트를 쳐다보았다.
“기억하다마다. 한시도 잊은 적이 없지.”
“다리언 디페르트, 그게 내 스승의 이름이에요.”
“오, 맙소사. 살아 계시는 거냐?”
“아니요, 얼마 전에 수명이 다해서 돌아가셨어요.”
자신의 입으로 다리언의 죽음을 말한다는 게 낯설었다. 얼마 전, 정말로 얼마 전이다. 헬무트는 파헤의 숲에 있었고, 다리언의 오두막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 헬무트는 그레타 아카데미의 어느 방에 서 있었다.
“그렇구나.”
남자는 침통한 표정이었다. 연기가 아니라면 저 표정이 안타까움을 의미하는 거라는 건 알았다. 그러나 남자의 눈빛은 곧 단호하게 바뀌었다.
“네가 그분의 제자란 증거는?”
“이 검. 보여 주면 알 거라고 하던데.”
헬무트는 검을 빼 들었다. 검사는 검의 진면목을 알아볼 수 있다. 빼 들린 날에서 비범한 예기가 흘렀다. 어린 소년이 가지기엔 너무도 좋은 명검이다.
“기억하지. 틀림없이 그분의 검이로군.”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성 다리언 디페르트, 그분이 실종된 지 이십여 년이 흘렀지. 젊은 시절 나는 그분에게 생명의 빚을 졌고, 내 가문과 이름을 걸고 언젠가 그것을 갚겠노라고 말했다. 그분은 내 이름을 기억해 두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기회는 오지 않았지. 그분은 돌아가셨고, 오늘날 그 제자만이 내 앞에 서 있구나.”
실종이라면 다리언 디페르트의 명예와 지위가 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리언을 파헤의 숲을 보낸 자들이 명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 말해 봐라.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헬무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레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어요.”
그것이 다리언의 유언이었다. 헬무트가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인간의 삶을 배우길 바란다는 것. 현자의 핏줄을 이은 쿠드로 가문은 대대로 바덴을 위하여 헌신해왔고, 이 에단 쿠드로는 다리언을 만났을 당시 그레타 아카데미의 조교였다. 그래도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 그가 이곳에 남아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운이 좋았다.
“그리고 다리언이 나를 돌봐 줬으면 한다고 전해달라던데요? 이렇게 말하는 게 맞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아이도 아닌데 돌봐달라는 건 뭐지? 난 지금도 나 자신을 돌보고 있는데.’
헬무트는 아직 미성년이었지만, 파헤의 숲 기준으로는 성년이었다. 그리고 파헤의 숲 기준이란 건 엘라가의 기준이었다. 열네 살이면 표범으로서는 먹을 만큼 먹은 나이다.
“……후견인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지.”
“그런 뜻인가요.”
“왜 그레타 아카데미에 입학하려고 하는 거냐? 너는 검성의 제자다. 아카데미에 그분보다 나은 스승은 없어. 굳이 검술을 배울 필요는 없을 텐데?”
“아카데미에서는 검술만 배우는 게 아니잖아요.”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또래의 학생들과의 어울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 학문, 소속된 삶. 인간의 모든 것이 이 아카데미에 응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리언은 헬무트가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길 바랐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직설적인 방식으로 말했다.
“저는 혼자 자라나서 사회성이 떨어지니 아카데미에 다녀서 좀 사람이 되라고 하던데요.”
“……좋아, 무슨 뜻인지 알겠구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는 몇 살이지?”
“열네 살. 곧 열다섯 살이 되겠죠.”
해가 바뀌면 열다섯이 된다. 그리고 해가 바뀌기까지는 고작 한 달이 남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입학시험이 아니라, 편입시험을 보는 게 좋겠군. 제 나이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으니까.”
생각 외의 소리에 헬무트는 살짝 놀랐다.
“시험을 봐야 하나요?”
시험이라니, 생소한 단어다. 제니아가 입학시험을 본다고 했던 것 같은데, 공부를 많이 했다고 했나. 물론 제니아가 검술 쪽으로 아카데미를 들어가진 않을 테니 시험의 내용은 다르겠지만, 갑자기 과제가 하나 던져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헬무트의 반응을 에단은 다르게 해석했다.
‘검성의 제자가 아카데미 시험 따위를 봐야 하냐는 건가.’
얼핏 느껴지는 기운이나, 서 있는 자세 같은 것이 예사롭지 않다. 검성이 자신의 검을 물려주기로 선택한 소년이다. 그런 오만함을 보일 자격이 있다.
“……내가 아무리 교관이라지만 그레타 아카데미는 명문 중의 명문. 추천만으로 널 넣어줄 수는 없다. 그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어. 물론 교장 선에서는 예외가 허용된다만.”
남자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검성 다리언 디페르트의 제자라는 걸 밝히고, 네 실력에 대해서 내가 보증한다면 교장님께서 네 편입을 허락하실 거다.”
“제가 다리언의 제자라는 건 당분간 밝히지 않을 거예요.”
“그건 왜지?”
“다리언이 사라진 건 배신을 당했기 때문이니까.”
헬무트는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그러니 그의 제자가 있다는 게 알려져서 좋을 건 없겠죠.”
“그게…… 무슨 소리냐?”
남자는 경악한 눈빛으로 헬무트를 쳐다봤다.
“배신을 당하셨다고? 어떻게, 대체 어떤 자들이 검성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지? 나는 전혀 듣지 못했다. 아니, 그런 사실은 세상에 알려진 적이 없다.”
“당신에게 그것까지 도와달라는 거 아니니 알 것 없어요. 다리언은 복수를 원하지 않아요. 내가 그의 복수를 대신하는 것도 원하지 않고요.”
헬무트는 일단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다리언이 이 남자를 소개해준 건 이 남자를 믿어서겠지만, 다리언은 이미 믿음으로부터 배신당했다. 그러니 그의 안목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아닌가? 배신까지 당한 사람이 믿을 정도면.’
반대로 인간 불신에 찌들어 있던 다리언이 찾아가라고 할 정도면 에단 쿠드로는 아주 믿을만한 사람인 거 아닐까. 헬무트는 고민했다. 마침 그 에단 쿠드로가 물었다.
“내가 관여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면 이대로 묻어 두겠다는 소리냐?”
그것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듯한 노기 서린 얼굴이었다. 26년 전의 맹세를 지킬 정도면, 신념이 투철하고 완고한 자다. 상대가 누구든 지은 죄에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할 거라는 생각이 엿보였다. 헬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자들이 나를 노리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하지만 당장은 아니에요.”
다리언을 거꾸러트린 적을 상대하려면, 지금의 실력을 가지고선 부족하다. 헬무트는 다리언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했다. 좀 더 경험을 쌓고, 힘을 기른 뒤에 싸워도 늦지 않다. 너무 늦어서 적들이 모두 늙어 죽으면 곤란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