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59
58
헬무트
58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일주일 동안 내내 그들은 오전부터 얼굴을 마주했다. 학습시간을 꼭꼭 다 채울 모양인지, 헬무트는 단 한 번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한 번쯤은 늦을 만도 한데 아침 열 시에 칼같이 나타났다. 한 번은 고작 2분 늦게 나타난 아레아를 말없이 빤히 쳐다봤다. 약간 압박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아레아는 그날 수업을 2분 늦게 끝내야만 했다.
‘부지런한 데다가 열의까지 넘치다니.’
좋게 볼 점이었지만, 헬무트의 정식 스승도 아니고 과외 선생에 불과할 뿐인 아레아는 좀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골수까지 뽑아 먹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헬무트는 복습하는 것도 모자라 시험 범위 외의 것까지 공부해 왔다.
“이것도 다 읽은 거야?”
“네가 가르친 건 다 복습했어. 다른 할 일도 없으니까.”
“달리 취미 같은 건 없어?”
늘어지게 잠을 잔다거나, 뒹굴거리며 논다거나 하는 일과 무척 거리가 먼 헬무트는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없어.”
모범적이라기보다는 비인간적인 구석이 있는 녀석이다. 아레아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헬무트는 공부를 마치고 나면 새벽에 검을 수련했다. 자는 시간을 빼고서 거의 일과를 꽉 채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리언과 있을 때보다 훨씬 수련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부족한 느낌을 채우려고 더 열심히 한 것도 있었다.
기껏 인간 세상에 나와서도 즐긴다는 행위와는 거리가 먼 헬무트였다. 그가 즐기는 거라곤 에단의 저택에서 편안히 지내는 것뿐이다. 맛있는 음식, 편안한 잠자리, 따뜻한 목욕물과 깨끗한 옷. 그 모든 게 다 낡아빠진 오두막에서 살았던 헬무트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사였다.
아레아의 수업 시간도 꽤 즐거웠다. 아레아는 헬무트가 처음으로 만난 제대로 된 대화 상대였다. 엘라가건, 다리언이건 헬무트의 질문에 답해 주길 귀찮아했다. 대화도 상당히 일방적이었다.
하지만 아레아는 헬무트가 되물어도 깊이 있는 수준까지 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비록 말투는 썩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끊임없이 파고들고 사고하는 것이 마법사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말로 그걸 알아듣게 설명하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아레아는 헬무트에게 강의하면서 나름의 재미를 느꼈다. 남을 가르치다 보면 자신도 배우게 된다고 그 과정은 아레아에게도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헬무트는 그가 했던 말대로 텅텅 빈 자리에 지식을 빨아들이듯 채워 넣고 있었고, 그 속도도 빨랐다. 아레아는 마침내 감탄하듯이 말했다.
“넌 적성을 보건대 학자나 마법사가 되어야 했어.”
하지만 비스는 마력과 상충한다. 그 때문에 검사는 마법을 배울 수 없었다. 마법 스크롤이나 아티팩트를 사용하여 마법을 쓸 수는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쓸 수 없다.
“이 속도면 암기해야 하는 건 문제없겠는데. 문제는 암기로는 풀 수 없는 과목이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긋난 건지 알고 수정하려면 문제의 근원을 알아야 했다. 아레아는 탐구적인 자세로 물었다.
“넌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자란 거야? 무슨 숲속에서 자랐나?”
“맞아.”
“……부모님은?”
“안 계시는데.”
이번 대답은 좀 늦게 나왔다. 만난 적이 없으니 그렇게 말해도 좋겠지만, 확실치 않다. 헬무트로서는 부모님의 생사를 알 수 없었다. 어느덧 14년이 흘렀다. 14년이면 풍광이 바뀌기에도 충분한 세월이다. 어둠의 싹을 가진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그 부모까지 벌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높은 신분이라면 뭔가 다른 일에 휩쓸리고도 남았다.
“그럼 넌, 누가 키운 거야? 조부모신가?”
이번 질문에는 더욱 대답이 궁색해졌다. 엘라가라고, 파헤의 숲 중앙 권역을 지배하는 거대한 표범이 있는데 놈이 자신을 길렀다고 대답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레아는 거짓말에 예민했다. 그리고 상대의 집요한 질문에 충실히 대답해 주는 것만큼이나 그 자신도 질문에 집요했다. 헬무트는 결국 답을 지어냈다.
“할아버지가.”
다리언은 노인이니 할아버지다. 친할아버지는 아니지만.
“검도 그분한테 배운 거고?”
“그래.”
“내내 숲에서 둘이 산 거야?”
“맞아.”
아레아는 헬무트가 내켜 하지 않는 것을 깨닫고 질문을 멈추었다. 아레아는 마법사로서의 탐구심은 풍부한 편이지만 누군가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헬무트에 대해선 궁금한 게 많았다. 워낙 특이한 녀석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의 ‘마법사의 운명’과 연관된 녀석 같기도 해서였다. 하지만 더 깊이 파고들지는 않기로 했다. 반대로 같은 질문을 듣는다면 아레아도 마찬가지로 숨길 게 있었기 때문에.
“따로 가정 교사를 둔 적은 없을 테고, 친구도 없었어? 사람을 만난 적도 별로 없나?”
“쭉 둘뿐이었어.”
‘나보다 더하잖아.’
아레아도 어린 시절에는 인간 세상과 가까이 자라지는 않았지만, 가끔 마을에도 나갔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도 좀 있었다. 하지만 헬무트는 그마저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검사였다면 지식이나 상식 같은 부분에 대해서 성의껏 가르쳐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뭐가 문제인지 알겠군.”
이 녀석은 야생 동물이나 마찬가지다. 용병 생활을 해서인지 어느 정도 녹아들고 있긴 하지만, 막상 모범 답안을 추구하는 문제에는 엇나가고 마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 답을 찾는지, 알려 주지.”
생각해 보면 머릿속까지 뜯어고칠 필요는 없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게 뭔가. 기본적으로 인성 검사에 해당하는 문제였지만, 문제라는 관점에서는 꼭 인성을 갖추지 않아도 정답을 맞힐 수 있다. 아레아는 모르지만 아무 죄책감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헬무트는 애초에 그런 쪽에선 자격 미달이었다.
한동안 기본적인 도덕과 갈등 해결 방법에 대해서 설파한 아레아가 문제를 냈다.
“자, 사정이 어려운 학우가 내 물건을 훔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경우의 해결 방법은? 1번, 훔쳐간 물건을 다시 훔친다. 2번, 몰래 불러내서 때리고 물건을 되찾는다. 3번, 따로 불러내서 돌려주지 않으면 고발할 거라고 말한다. 4번 학우의 사정이 딱하니 침묵하는 것을 택한다. 답은 몇 번이지?”
헬무트는 고민했다. 뭘 선택하든 모호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카데미에서는 싸움을 벌여선 안 될 거다. 여기선 온건한 방법을 택해야 하는 것 같으니까.
“4번?”
아레아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호구냐? 물건을 훔쳐간 놈을 왜 그냥 내버려 둬! 네가 손해를 감수하면서 타인이 부당한 이익을 취하도록 내버려 두는 건 아카데미 정신에 어긋나. 정의롭지 못하다고.”
“……온건한 해결 방식이잖아.”
“온건한 해결 방식이라는 게 호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겠지? 물론 저런 경우 넘어가는 사람도 꽤 있어. 상대가 딱해서 그럴 수도 있고, 자기 입장에선 별로 비싸지 않은 물건이라 상관없어서, 소란을 일으키기 싫어서 등등 넘어가는 이유는 많지. 하지만 시험 문제에 대한 정답은 아니야.”
“답이 뭔데?”
“3번, 따로 불러내서 돌려주지 않으면 고발할 거라고 말한다.”
“그건 협박 아닌가.”
고발하면 아카데미 교칙 상 상대는 처벌을 받는다. 처벌을 두려워하는 상대가 물건을 도로 헌납하게 만드는 건 헬무트의 생각으로는 온건한 것 같지 않았다. 헬무트는 항변했다.
“가장 좋은 건 훔친 걸 도로 훔치는 것 아닌가. 그러면 아무 문제도 없이 끝나잖아.”
1 빼기 1은 0. 그러니까 서로 주고받은 게 없게 된다. 아레아는 이제 한숨을 푹푹 쉬지 않았다. 헬무트에게 꽤 익숙해져 있는 터였다.
“자신의 물건을 되찾는 것이니 훔치는 건 잘못이 아니지만, 도둑질한 상대의 부정한 행위를 눈감는 것이 되지. 용서하더라도 잘못을 눈감고 넘어가지 않는 것이 아카데미에서 말하는 ‘정의’에 부합해.”
헬무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려운데.”
이렇게 복잡한 건 처음이다. 삶을 통해 체득하는 걸 학습하려고 하니까 제대로 되지 않는 건 당연했다. 아레아가 팔짱을 끼며 설명했다.
“일단은 일차적으로 대화를 통해 해결한다. 대화로 해결되지 않으면 그 후의 방법을 생각한다. 일단 효율 같은 건 생각하지 마. 거의 대화를 통해서 해결하는 게 답이라고 보면 돼. 그렇게 보면 쉬워.”
한동안 아레아의 강연이 이어졌다. 얼마 후 그는 또다시 문제를 냈다.
“좋아, 다음 문제.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 더 어려워. 학우가 내 과제물을 자기 앞으로 제출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때의 해결 방법은? 1번, 학우를 불러내 폭력을 행사하여 진실을 고백하게 만든다. 2번, 아카데미에 공식적으로 이 사실을 알리고 필적 감정을 요청한다. 3번, 학우에게 문제 삼지 않을 테니 사과하라고 해서 사과를 받아 낸다. 4번, 학우에게 잘못을 눈감아 줄 테니 교수실에 가서 과제물을 자기 이름으로 바꿔치기하라고 시킨다.”
“……3번.”
“틀렸어!”
“이번엔 왜 또.”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인간 세상은 이렇게 골치가 아픈가. 아카데미의 정의고 뭐고 해괴한 소리만 가득하다. 그냥 두들겨 패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해 주면 되는 것 아닌가? 그것이 헬무트가 생각하는 정의였다.
헬무트는 인상을 썼다. 늘 무표정하던 녀석이 기분을 드러내니 그 모습이 왠지 우스워 아레아가 손을 뻗었다.
“그렇게 인상 쓰지 말고…….”
‘공격인가?’
헬무트는 그 손을 막아 내야 하나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그가 결정하기도 전에, 그 손이 먼저 멈추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아레아는 당황한 채 눈을 깜빡였다.
‘뭐지? 내가 왜 이 녀석에게 이렇게 친근하게.’
다급히 손을 거둔 아레아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을 이었다.
“……잘 생각해 봐. 정답은, 완벽한 답이 아니야. 가장 나은 답이지.”
아무리 요 며칠 붙어 지냈어도 그렇지, 아레아는 원래 누구와 친하게 지내는 타입이 아니었다. 비상한 마법 실력과 성적, 아름다운 외모 탓에 주변에 사람이 원체 많았지만 철저히 차단하고 지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와 오래 붙어 있는 일이 적어서 헬무트를 친근하게 느끼게 된 걸지도 몰랐다.
‘친구라도 되었다고 착각한 건가.’
아레아는 마음을 차갑게 다잡았다. 어차피 이 과외가 끝나면 그가 그레타 아카데미에 입학하더라도 관계될 일 없는 사이였다. 가끔 학부끼리 겹치는 수업에서는 마주칠 수 있겠지만, 그뿐이다.
‘마법사의 운명이 걸리기는 해도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
아레아가 표정을 굳히자 다시 거리감 있는 분위기로 돌아왔다. 헬무트는 고심하다가 물었다.
“2번?”
“왜 2번이라고 생각하지?”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 걸 보면 제대로 답을 찾은 거다. 헬무트는 이유를 설명했다.
“1번, 폭력을 행사하는 건 절대 아닐 테고, 4번은 실패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해결책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나? 2번은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기는 하니까.”
“답은 2번이 맞는데, 이유는 그게 아니야. 4번은 실패할 가능성이 있어서 안 되는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옳지 않기 때문이야. 과제물을 바꿔치기하는 것도 교칙에 어긋나지만, 교수실에 제출된 과제물에 손대는 것도 교칙에 어긋나니까.”
“잘못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안 된다는 뜻이군.”
“그래, 이제 감은 좀 잡았어?”
아까보다는 정리되어가는 것 같다.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을 잡은 건 아레아도 마찬가지였다. 폭넓게 설명하는 것보단 실전 문제를 풀면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식 같았다.
‘과목당 커트라인만 통과하면 암기력이 좋은 녀석이니까 평균 점수는 맞출 수 있겠지.’
편입시험은 필기와 실기를 통합해서 점수를 합산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필기시험은 절대평가 방식으로 치러진다. 1차로 필기를 통과하면 그 후 실기시험을 봐서 상대 평가로 통과시키는 것이다. 물론 상대 평가란 것도 최소한 편입을 시도하는 학년의 수준을 충족시키는 기본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전제가 달렸다. 아카데미를 다닐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기에 상대 평가로 합격자를 골랐다.
다만 귀족에 왕족까지 다니는 아카데미다 보니 본국의 정세에 따라 학업을 중단하는 사태가 종종 일어났기에 자리는 빈번하게 나는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