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66
65
헬무트
65화
이래선 어딜 가도 이목이 쏠리는 걸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후드 정도가 아니라 가면을 써야 하지 않나.’
아니, 가면을 쓴다고 해서 숨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가? 아레아의 주변엔 공기부터가 달랐다. 모난 데 없는 이목구비도 그렇지만 그 자수정 같은 눈을 쳐다보고 있으면 정신이 빨려드는 것 같았다.
아레아가 서 있는 곳은 공기도 색도 달랐다. 꼭 반짝이는 빛이 흩뿌려진 것처럼. 세세하게 관찰하면서도 홀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헬무트가 상당히 무딘 편이기 때문이다. 또 비스의 저항력 덕분이기도 했다.
미간에 줄은 죽죽 그은 아레아가 내뱉었다.
“마법이 아니야.”
헬무트는 무슨 소릴 하는가 싶어 아레아를 쳐다봤다.
“내 마력의 속성이야. 사람들의 호감을 이끄는 거.”
아레아는 냉정하게 덧붙였다.
“특히 여자들한테 잘 먹혀. 자연스럽게 나한테 매혹되는 거지. 그들은 의식하지도 못할 거야.”
일반적인 마법사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마력으로 누군가를 매혹하다니. 그건 아레아가 전승 마법사란 특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법에 대한 지식이 좀 있다면 알 수 있을 테지만, 헬무트는 그런 게 있나 싶었다.
“그러니까 괜한 착각하지 마. 이거 소문내지도 말고.”
결국 하고 싶은 얘긴 자긴 마법으로 여자들을 꼬시고 있지 않다는 변명이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아레아가 희대의 바람둥이라도 헬무트와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아니, 좀 이상하긴 한가.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아레아가 팔짱을 꼈다. 배도 채웠으니 이대로 헤어지는 건줄 알았는데, 아레아는 작별 인사를 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마침 잘 되었다. 아레아는 바덴에서 일 년 이상을 산 사람이었다. 그 말은, 아레아가 좋은 안내자가 될 수 있단 소리다.
“상점가로 가야지.”
“그래, 그 선물이란 게 네게 필요한 물건이잖아? 난 그게 뭔지 알 것 같은데.”
아레아의 시선이 헬무트를 아래위로 훑었다.
“좋아, 따라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내가 제대로 바덴을 구경시켜 주지.”
‘역시 이렇게 되나.’
알은척하지 말라고 해놓고 이젠 바덴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한다. 헬무트가 본 사람 중에 아레아가 가장 변덕스러웠다. 하지만 나쁠 건 없었다. 헬무트는 앞장서는 아레아를 따라갔다.
“저 서점이 가장 책 종류가 많아. 가격은 다른 데보다 비싼 편이지만 다른 데 없는 책도 있지.”
“수련용 목검이나 장갑 같은 건 저 잡화점에서 팔아. 검술 학부 녀석들이 저길 자주 드나들더군.”
“저 빵집이 새벽부터 열어서 식사를 해결하기 좋아. 맛도 괜찮고.”
“저긴 고급 문구점인데 질 좋은 필기구나 노트가 많지. 굳이 저기서 안 사도 괜찮아. 바덴엔 워낙 귀족 출신의 부유한 녀석들이 많아서 물가가 비싸다고.”
“저곳은 수제화 전문점이야. 검사들은 발에 착 감기는 편하고 튼튼한 가죽 부츠를 따로 맞춘다던데, 너도 한 켤레 장만하는 게 좋을 거야.”
아레아는 쉴새 없이 상점가에 대해서 설명했다. 어쨌든 아레아도 이런 걸 이야기할 기회나 상대가 없었다. 한 번 설명을 시작하니 과외 선생을 해서 그런지 자신이 아는 걸 모조리 설명해야겠다는 의무감마저도 들었다.
‘생각보다 말이 많은데.’
그렇지만도 않은가? 아레아는 과외할 때도 그랬지만, 자기 생각을 말하는 걸 좋아했다. 헬무트가 못 알아듣는 게 있으면 이해시켜야겠다는 집념도 종종 느껴졌다. 반대로 헬무트는 별로 말이 없고, 남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거나 모르는 걸 알게 되는 것을 선호했다.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저기, 저기가 네가 가장 잘 알아 둬야 할 곳이야.”
“대장간?”
“그래, 네 검은 상태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검집은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어?”
아레아의 검지 끝이 헬무트의 허리춤을 지목했다. 전부터 눈에 들어왔다. 헬무트의 검집은 표면에 잔뜩 상처가 나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파헤의 숲에서부터 계속 가지고 다녔으니 그럴만하다. 하지만 검집으로서의 기능은 충실히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검날과 함께 다리언이 남겨준 유산이었다. 버리거나 바꾸기가 좀 그랬다.
“안 그래도 검술 학부 녀석들, 시비도 많이 걸 텐데 평민인 게 알려진 네가 그런 걸 가지고 다니면 흠 잡힐 거야.”
마법 학부나 인문학부는 그런 것이 덜했지만 검술 학부를 다니는 평민은 거의 완벽에 가까워야 한다. 아니면 시비가 걸려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인내심이 깊거나. 결국 시간이 지나면 실력으로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그건 아카데미물이 많이 든 4년 차 이상에서나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흠 잡히면 어떻게 되는데.”
“꼴사납다, 거지다, 비웃음을 사겠지. 그래도 상관없으면 들고 다녀도 돼.”
욕을 먹거나 비웃음 받는다고 상처 입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헬무트도 욕을 먹으면 당연히 기분은 나빴다. 특히 벌레처럼 하찮다고 여겨지는 상대가 그러는 건 참아주기 힘들다. 파헤의 숲에서 엘라가를 감히 비웃을 수 있는 녀석이 있었나? 약한 놈들은 입 닥치고 기어야 한다. 그게 당연했다.
‘하지만 인간들은 내가 자신들보다 강하다는 걸 모르니.’
몸으로 깨닫게 해 주는 수도 있었지만, 최후의 방법이다. 아카데미는 시비가 붙는다고 상대를 마음대로 두들겨 패 줄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검술 학부니 대련이란 수단이 있지만, 대련은 피하면 그만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흠을 잡히지 않는 게 좋았다. 상대가 덜 시비를 걸어야 헬무트가 사고를 칠 확률도 줄어드니까. 헬무트는 머릿속에서 나름의 결과를 이끌어 냈다.
“뭐 네 검집, 오래되긴 했지만, 질은 좋아 보이는데. 고급품이야.”
헬무트는 제 검집을 쳐다봤다. 파헤의 숲에선 평민도 살지 않을 어설픈 오두막에서 살고 있었지만, 다리언도 여기선 부자였을 것이다. 그의 재산이 은행에 남아 있을 거라고도 했으니까.
“유산이야.”
“……그럼 겉만 손보고 수리해서 쓰는 건 어때.”
“그게 좋겠어.”
헬무트는 승낙했다. 대장간에 들어서니, 대장장이가 정중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깐깐한 장인이 있는 대장간이라기보다는 그냥 상점이다. 이곳은 바덴이고 상대는 대개 귀족이었다. 젊은 대장장이는 다소 상업적으로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이 검은, 아주 좋은 검이로군요. 딱히 관리한 것 같지 않은데 이만큼이나 예리하면……. 이 제련 기법은, 음 이거…….”
대장장이의 눈이 헬무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혹시, 왕족이십니까.”
“아닌데요.”
아닐 거다. 아마도? 헬무트는 그가 더 들여다보며 검의 주인을 추측해 내기 전에, 검을 뺏어 들었다.
“그렇게 좋은 검인가?”
아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리언은 아마 아주 부자였던 모양이었다. 이 검이 희대의 명검이라도 되는가. 하긴 에단 쿠드로도 이 검을 알아봤었다.
“네, 왕가의 보물이 되어도 좋을 정도로요. 저도 말로만 들었지만 이 제련 기법, 검날에 있는 이 무늬를 보건대 아마도 레이튼이라는 유명한 장인이 만든 검일 겁니다. 그리고 레이튼은 아무 검사에게나 검을 만들어주지 않지요.”
“비싸단 뜻인가요?”
“비싼 것도 그렇지만 레이튼은 본인의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검을 팔거나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자신이 만든 검을 쓸 만한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는 검사에게만 검을 만들어주지요.”
“엄청 깐깐하네.”
“그래서 가끔 주인을 잃고 매물로 나오는 레이튼의 무기들은 어마어마한 가격을 호가하지요. 아주 단단한 데다가 오랜 시간을 방치되어 있어도 무뎌지지도 않고, 예리함을 간직하거든요.”
아레아가 헬무트를 쳐다봤다.
“좋은 검이래.”
“그래.”
‘장인 레이튼의 검이라 이거지.’
아레아는 그가 만든 무기에 대해서 조사하면 헬무트에게 검을 물려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헬무트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터.
‘하지만 내가 왜 저 녀석을 조사해.’
뒷조사하는 게 양심에 어긋나서가 아니다. 궁금하긴 한데, 궁금해해서는 안 됐다. 거리를 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같이 있는 것도 우습지만, 더 이상 그를 알게 되어 엮이는 건 사양이다. 아레아는 호기심을 뿌리치며 대장장이를 향해 엄포를 놓았다.
“그가 레이튼의 검을 가지고 있다는 게 소문나면 당신 입에서 나온 줄 알겠어요.”
“아이고, 손님. 그건 기본이지요. 당연히 아무한테도 말 안 합니다.”
“뭐, 일단 그건 됐고, 손잡이와 검집을 손봤으면 하는군요.”
“좋은 검이니, 그에 어울리는 손잡이와 검집이 있어야지요. 손잡이는 윤을 내는 정도면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 거고 검집은 내일 다시 찾아오셔야 할 겁니다. 검집은 많이 상했는데, 표면을 좀 다듬고 문양을 새기는 건 어떻습니다. 이런 식으로.”
대장장이와 상담 후 그들은 대장간을 벗어났다. 헬무트의 검은 나무 검집에 임시로 고이 자리한 채였다. 손때가 묻고 얼룩진 검 손잡이는 기름을 먹이고 겉에 윤을 내자 원형을 찾았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단순한 형태가 세련됐다.
값은 검집을 찾으러 오면서 치러도 된다고 했다. 에단이 빈손으로 헬무트를 보낸 건 후불이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인 것 같다.
대장간이 마지막 코스였던 것 같다. 아레아는 거기서 나오자마자 헬무트에게 말했다.
“난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
문득 시간을 보니, 거의 저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다만 마법 연구가 생각이 났다. 이렇게 오래도록 마법 연구에 대해서 잊고 있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드문 일이었다.
‘나도 수다 떠는 데 맛 들인 건지.’
알은척해 버린 데다가 함께 바덴을 돌아다녔으니 다음부터는 헬무트의 바깥나들이가 더 고달파질 거다. 지금도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는 아레아의 추종자들이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테니까. 약간 양심이 찔리긴 했지만, 그건 헬무트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잘 봤어.”
“그래, 그리고 앞으로는 정말 나 모르는 척해. 나도 다음부터는 네가 또 뭘 당하든 정말로 모른 척할 테니까.”
“그래.”
아레아와 헬무트는 언제 함께 걸었느냐는 듯이 깔끔하게 서로에게서 돌아섰다. 아레아는 아카데미 기숙사로, 헬무트는 에단 쿠드로의 저택으로. 뒤에서 여자들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지만, 헬무트는 싹 모른 체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괜히 붙잡혔다간 피곤해질 거란 걸 눈치챈 터였다.
용병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누군가와 이렇게 함께 오래 돌아다닌 적은 처음이었다. 유용한 정보를 얻고, 그렇지 않고를 떠나서 그 시간이 지루하거나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건 묘한 기분이었다. 색다르고, 즐거웠던 것 같다. 검을 수련하는 것만큼이나.
“상점은 돌아보았느냐.”
저택에 돌아오자 에단이 그를 맞았다.
“아레아를 만났는데, 그가 대장간으로 안내해줬어요. 검집과 검 손잡이를 손보기로 했어요.”
“그 녀석이 또? 이상한 일이군. 그럴 녀석은 아닌데. 마법 학부 학생이지만 워낙 소문이 자자해서…….”
“어떤 소문이요.”
“외모는 아름답지만 차갑고 성질이 사나워서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는다고 말이지.”
“소문이 맞는 것 같군요.”
“그런데 왜 너와는 어울리는 거냐.”
“저한테 뭔가를 가르치는 데 익숙해져서?”
에단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유겠나. 아마도 너와 친구가 된 모양이로구나.”
에단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흡족해했다. 친구 한 명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헬무트의 생각은 달랐다. 보통은 친구한테 다음부터는 알은척하지 말라고 말하나? 그렇진 않을 텐데.
하지만 헬무트는 자신이 아레아의 속내를 간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보통 인간들 심리도 잘 모르겠는데, 아레아는 특히 복잡하고 변덕스러웠다. 웃다가도 싸늘해지고 가까워질 듯 멀어진다. 인정하긴 싫지만, 처음 사귄 친구 비슷한 거라고 할 수 있는 핀과는 전혀 달랐다. 귀찮지는 않은데 늘 아레아를 만나면 기분이 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