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67
66
헬무트
66화
헬무트는 질문을 돌렸다.
“그보다 남은 한 달 동안은, 따로 준비해야 할 건 없는 거죠?”
선행 학습이나 검술 수련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그건 헬무트가 일상처럼 하는 일이니까. 주로 후자를.
“그래, 곧 기숙사 방 배정이 있을 테지만 넌 싸 둬야 할 짐도 많지 않으니 준비할 것 없다. 아카데미 교복도 기숙사 방이 배정된 다음 사는 게 좋을 것 같군.”
“잘됐네요.”
그 말이, 담고 있는 뉘앙스가 묘하여 에단이 물었다.
“무엇을 하려고?”
“바덴에도 용병 길드가 있지요?”
“그렇지.”
설마. 에단의 동공이 커졌다.
“용병 일을 하려고요. 한가할 때 돈을 버는 게 좋겠죠.”
파헤의 숲에서도 꽉 찬 일상을 보냈던 헬무트다. 새로운 뭔가를 해 봤자 그게 놀거나 게으름 피우는 일이 될 수는 없었다. 좀이 쑤셨다. 뭔가 유용한 일을 찾는 건, 몸에 밴 습관이었다. 그래서 헬무트는 자신의 용병 신분을 활용하기로 했다.
“쉼 없이 달리는 거도 좋다만, 용병 일을? 아카데미에 입학하기도 전에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제가요? 전 다치지 않아요.”
헬무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검은 눈에 가득 서린 것은 오만함이었다. 이곳에 자신과 대적할 자가 없단 오만함. 2급 용병 두 명을 해치운 그다. 바덴에서 맡은 의뢰 때문에 다치는 게 가능할까? 다쳐도 그의 회복력이면 금방 나아버릴 거다.
하지만 에단은 귀족이었다. 자신이 후견하는 열다섯 소년이 돈을 벌겠다고 험한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는 반박할 말을 찾았다.
“한 달 동안 무슨 의뢰를 할 수 있겠나.”
“뭔가를 하라면서요. 바덴에서 할 수 있는 의뢰를 알아보죠. 그런 게 없으면 어쩔 수 없겠지만.”
“돈이 필요한 거면 내가 지원해 줄 수 있다. 나는 네 후견인이잖니.”
“돈은 저도 가지고 있어요. 부족하지 않아요.”
딱 자른 대답에선 선이 느껴졌다. 에단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을 뿐 헬무트는 그에게서 독립적인 존재였다. 도움은 최소한으로 구한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불쾌하다거나 서운하다기보다는 안타까웠다. 사람은 홀로 살아가지 않는다. 그동안 쿠드로 저택에 머무르면서 마음을 좀 열었다고 보았는데, 아쉬움이 느껴졌다. 에단은 한숨을 쉬었다.
‘꼭 홀로 노니는 맹수 같구나.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 수 있을지.’
“그래, 그렇다면야. 하지만 의뢰를 맡게 되면 내게 말해야 한다.”
은인의 제자다. 에단은 헬무트를 마음을 다해 지원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태어난 날조차도 알지 못하는 이 어린 소년을 말이다.
다음날, 헬무트는 대장간에 가서 검집을 찾았다. 낡고 닳아 초라했던 검집은 하루아침에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탈바꿈했다. 검은색으로 칠해진 표면은 윤이 났고, 파낸 문양을 금으로 채워서 고급스러워 보였다.
“만족하십니까?”
대장장이는 자기 작품이 만족스러운지 싱글벙글 웃었고,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 검집에 있는 검을 뽑아 새로운 검집에 안착시켰다.
그다음으로 그가 찾은 장소는 용병 길드였다. 어제 번화가 끄트머리에 있는 걸 발견하고 지나친 터였다. 용병 길드 안은 꽤 북적였다. 슬슬 아카데미로 돌아오는 학생들이 있을 시기였다. 호위 임무를 마친 용병들은 바덴에서 새로운 의뢰를 찾아 이곳을 떠났다.
“어서 오세요, 의뢰를 하시려는 건가요?”
헬무트 또래의 소년이 접수대를 지키고 있다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쳐다봤다.
‘어느 검가의 자제분이신가? 눈빛이 좀 매서운데.’
고급스러운 장신구가 사람의 품격을 좌우할 때가 있다. 헬무트는 외형도 귀족적이었지만, 옷도 고급스러웠다. 거기다가 금박이 박힌 검집까지 허리에 차니까 도저히 평민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의뢰를 맡으려는 건데.”
“네, 네? 용병이세요?”
“그래.”
“그럼 옆쪽에서 줄을 서 주세요.”
우락부락한 용병들이 뒤에 줄을 서 있는 헬무트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저건 의뢰인이지, 용병이 아닌데? 하지만 굳이 헬무트에게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용병은 타인에게 대체로 무관심했다. 특히나 용병 길드에선, 의뢰를 맡아서 나가면 그만이니까.
십여 분 정도 기다렸을 때 헬무트의 순서가 돌아왔다. 아까의 그 소년이 헬무트를 맞이했다.
“3급 용병, 헬무트.”
“페이스 용병단 소속이시군요.”
페이스 용병단에서 의뢰를 맡아본 적은 한 번밖에 없는데 그 소속이란 걸 유용하게도 써먹고 있다. 의뢰에서 함께한 이들이 아니면 같은 페이스 용병단 소속이라도 그를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헬무트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어떤 종류의 의뢰를 원하세요? 요새 들어와 있는 의뢰가 많아서.”
“바덴에서 멀리 떨어져선 안 돼. 되도록 바덴 안에서 할 수 있고, 한 달 안에 끝나고, 보상도 큰 의뢰. 위험한 거라도 상관없어. 보상이 클수록 좋아.”
바덴을 떠나는 건 에단이 반대할 터. 헬무트는 의뢰가 좀 어려워도 좋으니 돈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이것저것 사려면 돈이 좀 들 테니까.
뒤쪽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뒤에 줄을 선 용병들이 낸 소리다. 그들은 어쩌다가 용병 자격을 갖게 된 귀족 도련님이 탐욕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괴, 굉장히 구체적이시네요. 그런 의뢰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한 번 알아볼게요.”
제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인 소년이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바덴에서 할 수 있는 의뢰는 좀 있는데, 거의 4급 용병이 할 만한 수준의 간단한 의뢰예요. 딱 한 가지, 보상이 제법 큰 게 있는데. 좀 난해한 의뢰라.”
‘위험한 것도 아니고 난해한 건 또 뭐지?’
헬무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설명해 봐.”
“어, 그러니까 그레타 아카데미 쪽에서 작년 말에 들어온 의뢰인데. 여태까지 아무도 해결하지 못했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의뢰냐 하면…….”
소년의 설명을 들은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하겠어.”
“네? 하지만 실패하면 보수는 한 푼도 없는데요. 의뢰 실패 기록도 남고요. 보수는 괜찮지만 그래서 아무도 맡으려고 하지 않는데.”
“감수하지.”
“네, 네. 뭐 그러면야 뭐……. 접수해 놓을게요. 기한은 보름입니다. 혹시 기한을 연장하고 싶으시거나 의뢰를 포기하실 거면 다시 이곳을 찾아 주세요.”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접수원이 넘긴 서류를 받아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레타 아카데미의 의뢰라.’
헬무트는 접수원이 말한 의뢰의 내용에 대해서 떠올려봤다. 그레타 아카데미에서 밤늦은 시각이면, 괴이한 소리와 함께 이상한 형체가 등장한다고 한다. 분명히 사람은 아니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적은 없지만 본 사람은 여럿 되었다. 유령이라는 소문도 무성했다.
교관들이나 호기심을 느낀 마법사들이 그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내려 했지만, 목적이 있는 자들 앞에선 나타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거기에 계속 매달릴 수 없었기에 하나둘 신경을 껐지만 여전히 괴존재의 출몰은 이어졌다. 그냥 내버려 두기엔 찝찝한 것도 사실이었다. 해결은 해야 했다.
그레타 아카데미에서는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편하게 용병 길드에 맡기기로 했다. 학업에 열중해야 할 학생들의 신경을 빼앗을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되도록 개학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바란다면서 의뢰비를 제법 크게 내걸었다. 그 괴존재의 정체를 알아내거나, 없애는 것.
‘3,000마르크. 괜찮군.’
추가 금액을 받긴 했지만, 제니아의 호위 의뢰가 원래 800마르크에 불과했단 걸 생각해 보면 3,000마르크는 제법 큰 금액이었다. 해결되리란 기약도 없고 해결 방법도 알 수 없기에 의뢰비가 후하게 책정된 것 같다. 일종의 수수께끼 같은 의뢰였다. 단순히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헬무트가 이 돈이 될지도 장담할 수 없는 의뢰를 떠맡은 이유는 하나였다.
‘돈을 많이 주잖아. 그리고 재미있을 것 같아.’
괴존재의 출몰이라니. 구미가 당겼다. 호위나 호송 의뢰는 이제 질렸다. 멀뚱거리며 누군가를 지키고 서 있는 것도 적성에 맞아야 할 짓이다. 접수원이 넘기던 서류를 보니 바덴에서 할 만한 의뢰라고는 어느 도련님의 검술 연습 상대를 해 주거나 가출한 고양이를 찾는 의뢰밖에 없었다. 그런 걸 하느니 그레타 아카데미를 헤집고 다니는 게 나았다. 어차피 한 달 후면 그는 그레타 아카데미의 검술 학부 학생이 되어 있을 테니까.
‘일단 보름이라고 했지.’
보름 동안 열심히 의뢰를 해결해 보고 안 되면 다른 거라도 찾아서 할 셈이었다. 큰 금액이니 시도해 봐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당분간 따로 할 일도 없었다. 접수원이 받은 서류에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비롯하여 사건의 개요가 정리되어 있었다. 헬무트는 내용을 쭉 숙지해 두고 바로 그레타 아카데미로 향했다.
그러나 아카데미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며칠 전과 비슷한 일이 헬무트에게 일어났다. 아니, 상황은 더 나빴다. 상대의 수가 더 늘었으니까. 어디선가 나타난 다섯 명의 소녀가 눈에 불을 켜고 헬무트를 둘러쌌다. 저쪽에서 경비병이 멀뚱멀뚱 헬무트 쪽을 쳐다봤다.
‘인기남이로군.’
여학생들과 교류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는 곧 헬무트에게 신경을 껐다. 헬무트에겐 불행한 일이었다. 미간이 찌푸려진다.
‘이건 대체.’
아직 입학증도 안 나온 상태에서 아카데미에 막무가내로 들어설 순 없었다. 통과하려면 저길 지나야 하는데……. 서류를 보여 주는 과정을 이 소녀들이 허용할 것 같지 않다. 괜히 의뢰에 대해서 알게 되어 방해하면 안 되니까.
헬무트는 귀찮은 듯이 물었다.
“뭐지?”
소녀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어머, 말투 좀 봐!”
“눈빛 좀 봐!”
“거칠어!”
“난폭해!”
“무례해!”
순식간에 헬무트는 거의 난봉꾼으로 전락하다시피 했다. 딱 한 마디 했는데 이런 비난이라니? 헬무트는 화가 난다기보다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러니까, 이거 시비인가.’
낯설다 못해 참신하다. 그래서 화도 나지 않았다. 재잘대는 소리에 귀가 따가울 뿐. 그들은 곧 본격적으로 추궁하기 시작했다.
“거기, 아레아 님과 무슨 사이죠?”
“얼마 전에 아레아 님과 상점가를 돌아다녔다면서요!”
“과외도 받고, 안내도 받고, 대체 그분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한 거냐니. 지금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 건 자신 쪽인데. 기가 막혔다. 아레아의 추종자들은 그에게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해 줬다. 안 좋은 쪽으로. 저건 꼭 아레아의 약점을 잡아 협박했다는 말투였다. 물론 헬무트에겐 그럴 의향이 있긴 있었다. 잘 끝나긴 했지만.
헬무트는 좀처럼 놀라거나 당황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예상외의 상황에 부닥쳐도 그는 늘 차분했다. 하지만 이 비이상적인 추종자 집단한테는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방법을 고민해 봤다.
‘때려눕히면…….’
탈락. 아카데미를 다니기도 전에, 정학부터 받을 거다.
‘죽이면…….’
남몰래 유인해서 죽인다 쳐도, 아레아의 추종자가 한둘이 아닐 텐데 바덴에서 희대의 연쇄 살인마가 되려고? 탈락.
고민하던 그때 번개같이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알은척하지 말라고 했지.’
헬무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아레아가 누군데.”
“기가 막혀! 지금 어디서 시치미를 떼는 거야!”
“‘아레아 님과 모르는 사이다’도 아니고, ‘아레아가 누군데’라니!”
“설마, 이 아카데미에서 가장 눈부시게 아름답고 고귀하신 아레아 님을 모른다고 하는 거야?”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아?”
‘……그 정돈가.’
아레아는 저들이 저런 행태를 보이는 게 자신의 마력 때문이라고 했지만, 이 정도면 마력이라고 할 게 아니라 저주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지능이 떨어지는 저주. 누군가한테 매혹당하면 이런 증상이 나타나나? 궁금하긴 했지만, 짜증스럽기도 했다. 헬무트는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아레아와 난 상관없어. 비켜.”
소녀들의 쓱 훑는 눈빛이 섬뜩했다. 잠시나마 그들을 멈칫하게 할 만큼.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