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76
75
헬무트
75화
손을 뻗어 멱살을 틀어쥐려고 하자, 헬무트가 슥 몸을 틀어 피해 버렸다. 졸지에 허공에 손을 휘두른 에런이 이를 악물었다. 헬무트는 그를 흘끗 보며 물었다.
“뭐하는 거지?”
“네가 뛰는 데 발을 걸었잖아!”
에런이 넘어진 걸 본 녀석들이 ‘어쩐지’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다져진 운동장이라 넘어질 일은 많지 않았다.
“착각이겠지. 네가 멍청하게 넘어져 놓고 왜 나한테 뒤집어씌우지?”
헬무트는 뻔뻔하게 응대했다. 당연히 발을 걸었다. 자꾸만 팔꿈치로 후려치려고 하길래, 갚아 준 것뿐이다. 그가 한 건 일종의 정당방위였다.
“뭐라고? 이 평민 자식이 날 호구로 봐!”
에런이 다시 한 번 손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헬무트가 요리조리 피해 다녀서 그는 자꾸만 허공에 손을 휘젓게 되었다.
“자꾸 쥐새끼처럼 도망 다닐 거냐?”
“네가 너무 느려.”
헬무트는 친절하게 지적해 주었다.
“그런 움직임으론 진짜 쥐도 못 잡을걸.”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같잖았다. 상대해 줄 가치도 없는 약한 녀석이 아무것도 모르고 시비를 건다. 파헤의 숲에서는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 일이다. 약한 놈이 주제넘게 기어오르는 거. 짜증스러운 이 상황도 몇 번 겪다 보니 적응되었다.
‘나도 인간화되고 있군.’
헬무트는 자신의 적응력에 내심 감탄했다.
“이, 이!”
계속 헛손질만 해댄 에런의 얼굴이 분노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검이 있었으면 이 녀석을 당장 베어 버렸을 거다.
“에런, 그게 무슨 꼴이냐!”
보다 못한 사바트가 그를 불렀다. 슬슬 교관이 돌아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 평민 녀석은 내버려 둬! 나중에 대련으로 갚아 주라고.”
헬무트가 평민이라는 걸 모르는 녀석도 알게 될 만큼 큰 목소리였다. 에런이 이를 갈면서도 물러났다. 헬무트가 너무 쉽게 그의 손을 피하는 통에 슬슬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참이었다.
“응? 평민 녀석? 날 불렀어?”
마침 운동장을 돈 아스카가 쾌적한 얼굴로 걸어왔다. 어딜 봐도 무력하곤 거리가 멀어 보이는 외모에 상큼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었지만, 그를 아는 이들은 슬슬 뒷걸음질 쳤다. 사바트가 혀를 찼다.
“넌 또 뭐야?”
“나? 평민 녀석인데?”
사바트가 아스카를 아래위로 훑으며 소리쳤다.
“뭐야, 대체 검술 학부엔 평민이 몇 명이나 되는 거야?”
누군가 사바트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새 친해진 기존 재학생이었다.
“교관님 오신다.”
“아아, 그래.”
사바트가 헬무트 쪽을 지목하며 비웃음을 던졌다.
“뭐 잘 지내봐라. 평민 둘이서.”
알란 교관이 오자 흐트러진 분위기가 바로잡혔다. 교관은 모두에게 하나씩 목검을 나누어주었다.
“앞으론 그걸로 대련과 연습이 이루어질 거다. 혹시 파손되면 아카데미 행정실에 이야기하도록. 잃어버리지 말고, 수업 시에 지참하도록 한다.”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단단하고 좋은 목검이었다. 헬무트는 손안에 쥔 목검을 쓸어 봤다. 목검의 손잡이 부분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오늘은 첫날이니, 그동안 논 녀석들은 감을 찾아야겠지. 각자 몸을 단련하거나 검을 연습하도록 한다. 대련은 금지다!”
“예!”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알란 교관의 눈이 어느새 검술 학부 학생들 뒤에 선 아스카에게 꽂혔다.
“너, 아스카. 벌써 운동장은 다 돌은 거냐?”
“물론이죠.”
사실 반도 안 돌았지만, 모두가 헬무트에게 이목을 집중하고 있어서 그가 얼마나 운동장을 돌았는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좋아, 그러면 남은 시간, 자유롭게 수련하도록! 이상!”
‘첫날이라 그런가. 운동장을 돌고 끝이야?’
이미 에단에게서 첫날엔 별거 없을 거란 이야기는 들었지만 약간 허무하다. 교육 기관에서 듣는 첫 수업이었다. 헬무트는 개인 교습만 받아봤을 뿐 이제껏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단체로 뭔가를 배워 본 적이 없었다. 그것만큼은 신기하면서도 색달랐다.
‘어떤 수련을 할까.’
교정은 넓었고 다른 녀석들과 부딪칠 일 없이 수련할 수 있었다. 헬무트는 고심했다. 모두가 편입생들을, 무엇보다도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심지어 알란 교관조차도 헬무트를 힐끗거리며 쳐다봤다. 다리언의 검술을 내보일 곳은 아니었다. 기초 수련이나 대륙 공용 검술 정도는 선보여도 좋을 거다. 결심한 헬무트는 구석 자리로 이동하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새하얀 얼굴에 가득 미소를 머금은 푸른 머리 소년, 아스카였다.
“이봐, 너 평민이라며?”
“맞아.”
헬무트는 긍정했다. 이미 소문이 다 났는데 부정할 이유가 없다.
“나도 평민이야.”
“그래?”
아이러니하게도 이 검술 학부에서 가장 하얀 피부를 가진 두 명은 귀족 출신이 아니었다. 사람은 겉만 봐서는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은 진실인 것 같았다.
“우리 악수할까?”
녀석이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헬무트는 그의 손을 맞잡지 않았다. 살의까진 아니어도 상대에게서 호의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감지했기 때문이다. 하! 아스카가 코웃음 쳤다.
“그래도 눈치는 빠르네.”
손아귀에 비스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손을 맞잡았다간 꽉 붙잡아서 고통스럽게 죄어 주었을 거다. 헬무트가 순순히 당해 주지는 않았겠지만.
“하나 미리 경고해 둘게. 괜히 같은 평민이랍시고 질척대지 마. 난 누가 친한척하는 게 귀찮거든. 너도 적이 많은 것 같은데, 나한테 도와달란 소리 하지 말라고.”
‘아레아 과인가?’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었다. 정작 그 아레아와는 같은 방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 한 번도 마찰을 빚은 적이 없었지만. 헬무트는, 문득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아아, 네가 그 녀석이구나.”
“내가 뭐?”
“미친개.”
“이게!”
바로 울컥해서 주먹을 확 쳐든 상대를 헬무트는 눈썹 까딱하지 않고 쳐다보았다. 검술 학부에서는 최하위권에 들만한 체격. 하지만 확실히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헬무트가 기억할 만한 실력을 가진 녀석이다. 서 있는 자세, 눈빛, 느껴지는 기운이 달랐다. 아마 이 녀석은 비스를 꽤 다룰 수 있을 거다.
“시비 걸지 마. 나도 더 이상 정학은 사양하고 싶거든?”
아스카는 슬쩍 알란 교관 쪽 눈치를 보면서 손을 내렸다. 시비는 자기가 걸어놓고, 황당한 소리를 한다.
‘내가 만만해 보이나?’
바덴에 와서 시비를 몇 번이나 걸렸는지 모르겠다. 헬무트가 유순해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쯤 정신을 놓은 아레아의 추종자들이 아니라 에런과 사바트, 그리고 눈앞의 이 아스카를 비롯한 검술 학부 녀석들은 자연히 헬무트를 아래에 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군, 내가 기운을 감춰서.’
헬무트는 완전히 자신의 비스를 안쪽으로 갈무리하고 있다. 눈빛이 섬뜩하긴 하지만, 그가 특별히 강한 상대로 느껴지진 않는다. 게다가 헬무트는 평민으로 알려져 있었다. 여러 편견이 미약한 본능을 불식시키고 그를 약자로 보이게 했다.
‘대련 때 입증하면 될까.’
여러모로 사려야 하는 입장이다. 그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야겠단 생각이, 문제를 일으키더라도 이 상황을 바꿔놔야겠다는 쪽으로 바뀐다. 흉포한 기분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아스카는 변덕스럽게도 안면을 싹 바꿔 웃었다. 그가 친근하게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아무튼 앞으로 잘 지내보라고, 평민 친구.”
‘뭔가 만만한 녀석은 아닌 것 같지만.’
헬무트란 녀석이 잘 지내든, 못 지내든 아스카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저 구경이나 하면 될 일이다.
***
검술 학부 수업에 이어서 오후의 교양 수업까지 마친 헬무트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방 중앙의 막은 반쯤 걷혀 있었다. 처음 같이 방을 쓸 때는 질색했으면서 그도 적응해가는 것 같다. 아레아가 칫솔을 입에 물고 방을 오가다가 그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첫 수업은 어땠어.”
그답지 않게 우물거리면서 묻는 모습이……. 헬무트는 적당한 표현을 찾아낼 수 없었다. 아레아는 때때로 헬무트에게 처음 느끼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무반응을 아레아는 다르게 해석했다.
“첫날부터 시비가 걸렸어?”
“내가 시비 걸기 좋은 인상인가?”
“네가? 전혀.”
아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뭐, 검술 학부 녀석들은 워낙 체격이 크니까. 자기보다 작은 녀석을 얕잡아보는 거겠지. 시간 지나면, 그러니까 네가 실력을 내보이면 해결될 문제야. 너도 에단 교관님을 후견인으로 둔 입장에서 내키는 대로 싸울 순 없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 말은 시간이 지날 때까지 헬무트가 참아야 한다는 걸 전제로 한다. 아스카야 이제 헬무트에게 신경을 끊은 듯했지만, 상대는 교묘하게 교관이 안 볼 때 시비를 걸었다. 괜히 걸어가는 길을 가로막는다거나, 무시하는 말을 던진다거나 하는 식으로. 벌레처럼 하찮은 일이라도 계속 벌어지면 거슬릴 수밖에 없다.
헬무트가 아는 해결 방법은 간단했다. 영원히 헬무트에게 시비를 걸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양치질을 마치고 입 안을 헹구는 아레아에게 헬무트는 다시 물었다.
“다른 방법은?”
물을 뱉어 낸 아레아가 입가를 훔치며 말을 이었다.
“네가 도발해서 상대가 덤벼들게 해. 교관이 있는 데면 더 좋지. 그렇지 않다면, 딱 한 대만 맞아 줘. 그다음엔 곤죽을 만들어도 참작될 거야. 상대가 다수면 더 좋지.”
“죽여도 돼?”
아레아는 살짝 당황했다. 사실 아레아는 거의 시비를 걸려 본 적이 없다. 그의 적이 된다는 건 그의 추종자를 적으로 돌린다는 뜻이었다. 여자들에게 우르르 눈총을 사고 경멸당하는 건 정신적으로 감당할 일이 못 되었다.
“……그건 좀. 상대는 귀족이라고. 아무리 그레타 아카데미가 학생들 간의 평등을 지향하고 있다고 해도, 귀족을 죽이면 그쪽에서 가만 있겠어? 수습하기 힘들 거야.”
아레아는 안된 눈으로 헬무트를 쳐다봤다.
“어지간히 화가 났나 보네. 너도 그런 말을 할 정도면.”
사실 화가 안 나도, 헬무트는 살짝 짜증이 난 정도로도 누군가를 살해할 수 있었다. 아레아는 헬무트가 그 정도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아레아도 헬무트에게 꽤 시비조로 말을 많이 했는데, 그는 이상하게 시비조로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건 헬무트도 알 수 없는 묘한 차별이었다.
그때 문을 콩콩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레아가 미간을 구겼다.
“열어 주지 마. 없는 척해.”
“헬무트, 들어가는 거 다 봤어. 문 좀 열어 줘. 나 시안이야!”
아레아가 싸늘한 태도로 막을 홱 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누군가를 방에 들이지 말라곤 했지만, 그 말은 자꾸 쳐들어오는 시안만 비껴가고 있었다. 찾아온 녀석을 내쫓는 것도 귀찮아졌기 때문이다.
헬무트가 문을 열어주자 시안이 냉큼 안으로 들어섰다. 제집처럼 자리를 차지한 녀석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레아는?”
“아직 안 돌아왔어.”
헬무트는 아레아가 없는 척해 주기로 했다. 시안은 더 캐묻지 않고 낙천적으로 물었다.
“친구, 오늘 하루는 어땠어! 아카데미 수업은 어때.”
검술 학부 수업은, 평소에 수련할 때에 비하자면 사람이 많고 시비가 걸려서 불편했다. 하지만 그 외의 교양 수업은 나쁘지 않았다. 헬무트는 배움의 순간을 즐겼다.
“그럭저럭.”
“뭐, 궁금한 거 있어? 알고 싶은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시안은 어차피 헬무트한테 친구란 게 생길 리 없으니, 궁금한 걸 자신이 답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구하고나 친하지만, 아무하고도 친하지 않은 시안은 검술 학부 소식에 대해서도 꿰고 있었다. 이 평민 편입생을 검술 학부 학생들이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도.
‘없다’고 말하려던 헬무트는 불현듯 누군가를 떠올렸다.
“아스카란 녀석에 대해서 알지?”
“검술 학부의 미친개? 알지. 전에 말한 적 있지 않나? 그 녀석도 평민이잖아.”
“그 녀석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