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8
7
헬무트
7화
“일어나라!”
해가 뜨기도 전, 벼락같은 외침에 헬무트는 번쩍 눈을 떴다. 눈을 비빌 새도 없이, 잠자리에서 일어난 헬무트 앞에 물동이가 놓였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채워 놔라. 매일매일 네가 할 일이다.”
명령 같은 말투였다. ‘이 인간은 잠도 없나?’ 생각한 헬무트는 물동이를 집어 들었다.
잠이 덜 깨 느릿한 걸음으로 집을 나서는 헬무트의 뒤통수에 호통이 날아들었다.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식사는 없다!”
기껏 물가까지 내려가 식인어들을 피해 물동이를 가득 채운 헬무트는 돌아가려다가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잠이 깨니 화가 일었다. 잠도 제대로 못자고 아침부터 내쫓기듯이 나와서 이게 뭔가. 자리에 멈춰 선 헬무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바닥을 걷어찼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지?’
엘라가가 그를 자상하게 키운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강압적으로 부려먹진 않았다. 다리언에 비하자면 살뜰하게 돌봤다.
훈련한답시고 종일 고문처럼 사람을 괴롭히질 않나 아침부터 일과를 정해 주고 사람을 내몬다.
헬무트는 난생처음으로 어떤 상황에 대한 부당함을 느꼈다.
“말해야겠어.”
단단히 결심한 헬무트가 꽉 채운 물동이를 짊어지고 오두막으로 걸어 올라갔다.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는데 오두막에선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있었다.
‘불이 난 건가?’ 고개를 갸우뚱한 헬무트가 오두막에 이르자, 다리언이 손짓했다.
“왔으면 어서 앉거라.”
마당에 타오르는 불 위에 조악한 쇠 냄비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서 걸쭉한 액체가 보글보글 끓었다.
그 냄새를 맡은 순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놀랍도록 허기를 자극하는, 군침 도는 냄새였다. 양 볼이 찌릿했다.
입안에 침이 고이는 걸 느낀 헬무트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이렇게 미칠 듯이 허기져 본 적이 있었나?
“먹어라.”
이곳 파헤의 숲에서 제대로 된 그릇 같은 건 구할 수 없다. 다리언은 단단한 열매껍질로 만든 그릇에 내용물을 덜어주었다. 갈색빛이 도는 걸쭉한 액체를 그는 ‘수프’라고 불렀다.
성급히 입에 가져다 댔다가 혀를 데어 버렸다.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식히는 헬무트에게 다리언이 나무를 깎아 만든 스푼을 건네주었다.
“그걸로 떠먹는 게다. 이 미련한 녀석아.”
헬무트는 고기 수프를 떠먹는 다리언을 슬쩍 보고 따라 했다. 스푼으로 한 움큼 떠서 후후 불어서 식힌 후, 입에다가 넣는다. 살코기와 지방이 고루 섞인 수프는 입안에서 촉촉하게 감겼다.
‘맛…… 있어?’
헬무트는 눈을 끔뻑거렸다. 전율이 찌르르 일었다. 이렇게 맛있는 건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았다. 인간의 음식은 원래 이런 건가.
“어떻게 만든 거야…… 요?”
“으깬 고기와 어제 먹은 뿌리를 넣고 잘 익힌 거다. 야영을 자주 하다 보면, 요리에 익숙해지지. 그저 그런 재료도 잘 조리하면 꽤 먹을 만해진다. 차차 네게 가르쳐 주마.”
그 말에 솔깃해진 헬무트는 다리언을 쳐다보았다. 눈썹을 치켜 올린 다리언은 어서 먹으라고 말한 뒤 식사를 이어갔다.
헬무트는 뜨거워서 스푼을 후후 불면서도 빨리 먹지 못하는 것에 안달 나고 줄어드는 음식에 또 안달이 났다.
다리언이 준비한 식사는 꽤 양이 많아서, 배부를 때까지 먹을 수 있었다.
“녀석, 그게 뭐가 그렇게 맛있다고.”
다리언이 혀를 끌끌 찼다. 말로는 그러면서도 걸신들린 듯이 먹는 헬무트를 그는 자신도 모르게 측은하게 쳐다봤다.
천애 고아처럼 숲속에 홀로 떨어져 자라난 소년이다. 인간의 음식이란 걸 먹어 봤을 리 없다.
무쇠 같은 다리언의 심장도 물러지고 만 것이다.
실컷 채찍을 휘두르다가 당근을 주자마자 헬무트는 단순하게도 불만을 잊었다.
가정식은커녕 요리란 걸 먹어 본 것도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 소소한 고기 수프가 헬무트에겐 행복감마저 안겨주었다. 그 기분은 헬무트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이런 걸 먹을 수 있다면, 이런 음식을 만들 수 있다면 다리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인간 세상에 나가면 이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겠지?’
꼭 파헤의 숲을 나서야겠다. 새카만 눈에 비장한 결의가 감돌았다.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표를 다졌다. 삽으로 다지듯이 팍팍.
물론 그 이후에, 또 고단한 훈련이 따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제대로 집중해라!”
딱! 다리언이 주먹으로 머리통을 가격하자 헬무트의 눈빛이 변했다. 바로 이 갈림 섞인 항의가 튀어나왔다.
“내 자세, 제대로잖아요!”
며칠이 지난 지금, 그는 슬슬 불평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도 하나의 변화였다.
“어디가 문제죠?”
딴생각을 하긴 했지만, 시킨 그대로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헬무트는 반항적인 눈빛을 드러냈다.
그의 불만은 타당했다.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같은 동작으로 반복해서 목검을 휘두르는 건 사흘 만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열 살짜리 어린 소년에게 이보다 더 빠른 성취는 기대하기 힘들다. 누군가 보았다면 천재라고 탄복했을 것이다.
물론 헬무트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다리언은 알았다. 알아도 그의 태도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자고로 검은 달궈졌을 때 쉼 없이 두들겨야 단단해지는 법이니까.
“멍청한 녀석아, 자세만 제대로라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니다.”
“그러면?”
“일일이 말해 줘야 하는 게냐?”
“네.”
딱 자른 대답에 다리언은 기가 차서 턱을 쓰다듬었다.
보면 볼수록 별난 녀석이다. 어둠의 싹은 인성을 잔혹하고 포악하게 만든다. 게다가 야생에서 자라난 소년. 성격이 좋다면 그게 더 신기할 것이다.
헬무트는 다리언이 보기에 참을성도 있는 편이고, 사소한 것에도 만족하며 어딘지 모르게 성숙한 소년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을 생각해 봐도 그랬다.
그런 점에 어른스럽다고 감탄할라치면 이런 데선 잘도 기어오른다. 유순한 성격은 아니다. 고집도 있고 성격도 있다. 납득이 가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는다.
“그렇다면 알려 주마.”
확실한 건, 스승에게 기어오르도록 내버려 둬선 안 된다는 거다.
딱!
“아!”
헬무트가 소리를 질렀다. 엄살을 부리는 것도 늘었다. 다리언이 뺏어 든 목검으로 헬무트를 한 대 더 후려갈겼다. 그리고 팔짱을 끼며 물었다.
“차이를 알겠느냐?”
“무슨 차이?”
헬무트를 지그시 바라본 다리언이 다시 목검을 쳐들었다. 헬무트는 양팔을 들어 올려 잽싸게 머리를 감쌌다.
딱! 목검이 머리를 가린 헬무트의 팔목을 가볍게 가격했다.
“세 번이다. 이 세 번의 차이를 알겠느냐?”
“몰라.”
퉁명스럽게 내뱉자마자 배가 쿡 찔렸다.
“저녁을 굶고 싶지 않다면 공손하게, 생각을 하면서 대답해라!”
호통이 떨어지자 헬무트의 기세가 좀 죽었다. 끼니를 가지고 협박하는 건 헬무트에게 제법 잘 먹혔다.
식사할 때마다 뭘 만들든 걸신들린 듯이 먹어 치우는 헬무트 덕에 다리언은 늘그막에 자신이 요리에 재능이 있단 걸 발견한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반대로 헬무트는 뭘 만들든 인간이 먹을 수 없는 걸 만들었다.
“……강도가 다른데, 속도, 때린 위치도 다르고.”
헬무트가 시무룩하게 꺼내 놓은 대답은 그것이었다.
말을 하면서 헬무트는 불현듯 깨달았다. 다리언의 동작은 아주 일정했다. 사람의 움직임인가 싶을 만큼 매끄럽고 군더더기 없다.
그런데도 거기 담긴 힘이나 속도는 달랐다. 굼벵이가 기어가듯 느렸다가 번개가 내려치듯 빨라졌다. 그 모든 동작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
며칠의 훈련 끝에 헬무트의 동작은 다리언과 비슷해졌다. 하지만 헬무트도 그처럼 할 수 있을까? 답은 빠르게 나왔다. ‘아니오.’
“이제 알겠느냐?”
“……예, 근데 어떻게.”
“이해.”
단호한 한 마디였다.
“흉내만 내선 소용없다. 육신의 이해. 나아가서 정신의 이해. 즉 검의 이해. 네 검이 네 육신을 넘어서 정신에 배도록 하라. 검을 휘두르는 데 있어 네 손끝, 네 근육, 네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네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모든 흐름을 꿰뚫듯이 통찰하고 이해하여야 한다.”
다리언의 말은 막힘없이 이어졌다. 기운이 실린 음성이 고막을 넘어 두뇌 깊은 곳까지 새겨 박히는 듯했다.
“네 검을 네 몸 다루듯 통제한다는 느낌이 들 때, 비로소 그것을 익혔다고 할 수 있는 거다. 빠르든 느리든 강하든 약하든 흐트러짐 없이 같은 흐름을 잇되 그 같음이 무언지 알아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그 하나의 동작을 펼치는 데도 심혈을 기울여야 함이야.”
헬무트는 다리언의 말을 곱씹었다. 바닥으로 시선을 향한 채 생각에 잠겼다. 다리언은 기다렸다는 듯이 훈계를 퍼부었다.
“그런데 네놈이 하는 걸 봐라. 생각 없이 정해진 대로 도끼질하듯이 검을 휘두르고만 있지 않느냐? 따라 하는 것이 대수가 아니야. 네 동작의 흐름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익히지 않으면 네놈은 검사가 아니라 그저 도끼질하는 나무꾼일 뿐이다. 네가 생각 없이 백 번, 천 번을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
“생각 없이 검을 휘두르는 놈들은, 결국 단련된 육체에 의존할 뿐이다. 그런 녀석들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일류는 될 수 있어도, 그 이상은 되지 못하는 게다.”
다리언의 일류란 기준 자체가 대단히 높은 것이지만, 다리언은 그 일류를 넘어선 검사였다.
헬무트는 검을 배우는 어린 소년들이라면 누구나 가르침을 받길 원할 검사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 다리언의 기준이 턱없이 높을 수밖에.
다리언이 헬무트를 받아들인 건 심심해서나 동정심 때문이 아니었다.
검을 가르치는 데 너그러움 같은 건 필요 없다. 사람은 혹독하게 몰아치고 몰아쳐야 좀 쓸 만해진다.
하물며 검성에게서 검을 전수 받으려면 그만한 고난은 당연히 감수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