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81
80
헬무트
80화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아스카에게 시안이 정말로 궁금한 것처럼 물었다.
“배후? 짐작 가는 상대가 있어? 넌 아카데미에서 사이 좋은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그중에서 누구일지 어떻게 알아.”
“시끄러워! 밀짚 머리!”
진실은 뼈아픈 법이다. 연한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시안에게 아스카가 성질을 부렸다.
“의뢰인이 누군지 알 것 같지만.”
헬무트가 입을 열었다.
“자백할진 모르겠는데, 확실히 하고 싶으면 데려다가 고문을 하는 쪽이…….”
인간은 매 앞에 장사 없다고 다리언이 말해줬다. 잡아다 놓고 불로 지지고, 손톱을 뽑고, 팔다리를 꺾으면 웬만한 놈은 다 진실을 실토하게 된다는 거다.
혼자였으면 기꺼이 그렇게 했을 테지만, 아쉽게도 헬무트는 혼자가 아니었다.
시안은 그렇다 치고 의외로 아스카가 경악하고 반대했다.
“야, 이 미친놈아! 넌 그레타 아카데미 학생이 되어 가지곤 한다는 말이…….”
“남의 귀를 물어뜯어 정학당한 네가 할 소리야?”
시안이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도 해쓱해져 있었다.
‘용병 출신이랬지? 무슨 생각하는 수준이.’
거칠다는 정도로 표현할 게 아니다. 무슨 전쟁통에서 굴러먹다 온 녀석 같다.
“저, 그건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아. 그러다가 걸리면 아무리 저쪽에 습격했다고 쳐도 퇴학감이라고. 사람을 고문하는 건 정당방위로 상대를 살해한 것보다 더 심해.”
괜히 도덕의식을 들먹이는 것보단 이렇게 말하는 쪽이 헬무트한테는 잘 먹힐 것 같았다.
예상대로 헬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말지. 문제가 되면 곤란하니까.”
정말 딱 그 이유였다. 시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병사들에게 넘기자. 아카데미에도 말해 두면 놈들을 심문하겠지.”
그들은 병사를 불러, 쓰러져 있는 블랙 호크 일당을 넘겼다.
바덴에서 아카데미 학생을 습격하는 건 중죄로서 엄격하게 다뤄진다. 쉽게 넘어가진 않을 터였다.
상처투성이의 아스카에게 시안이 간단한 치유 마법을 걸어주었다.
“이쪽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돌아가서 제대로 치료받도록 해.”
아스카는 고맙다는 말 하나 없이 고개를 홱 돌렸다. 시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자.”
그들은 바로 아카데미 행정실로 향했다. 습격 사태에 대해서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헬무트와 시안은 목격자로서 참석해야만 했다.
‘번거롭군.’
시안은 이 의외의 상황을 즐기는 눈치였지만, 슬슬 돌아가 수련이나 할까 생각했던 헬무트는 못마땅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버려 두고 갈 걸 그랬다.
아스카가 습격당했다는 소리에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행정실 직원이 검술 학부 교관을 불렀다.
마침 남아 있었던 알란 교관이 행정실 직원과 함께 시안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안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이유는, 제3자인 그가 더 객관적으로 사태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누가 사람을 고용해서 아스카를 습격했다고?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상대는 무장하고 있었고, 표적이 이 녀석이라고 말했어요.”
시안이 증언하자 알란 교관이 냉정하게 반박했다.
“시비가 걸린 녀석이라 아스카를 지목한 걸 수도 있잖나. 너는 도망치는 아스카를 마주친 거였다면서. 이미 그 상태에서 상대는 아스카를 쫓고 있었고.”
그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태를 바라봐야 했다.
“아니라니까요! 놈들은 날 알고 있었어요! 포위망을 형성한 채로 접근해서 시비를 걸었다고요! 애초부터 저를 노린 거예요! 계획적으로! 제가 고작 몇 명이랑 시비에 걸렸다고 도망칠 리 없잖아요?”
어지간한 상대였으면 도리어 곤죽으로 만들었을 거다. 아스카의 실력은 알란 교관도 알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스카, 너는 너를 노린 게 누구라고 생각하지?”
아스카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검술 학부 2학년의 귀족 녀석들이겠죠!”
“짐작 가는 사람은 있고?”
“네.”
아스카는 짐작한 범인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부른 이름을 들은 알란 교관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검술 학부 내에서 유독 평민에 대한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다.
페트리샤가 공유한 내용도 있고, 좌시할 수만은 없는 문제였다. 더군다나 평민 학생에 대한 폭력 의뢰까지 이루어진 상황이라면.
“제가 말한 녀석들을 당장 불러다가 조사해 보면 답이 나올 거예요. 직접 의뢰한 건 아닐 테고 가문을 통해서 의뢰를 넣었겠죠. 친해진 지 얼마 안 된 놈이니 조지다 보면 한 놈은 실토할 거라고요.”
귀족들의 생리는 뻔하다. 아스카가 경멸조로 내뱉자, 알란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그들이 했다는 증거가 없다.”
“그럼, 내버려 두겠단 소리예요!”
“아니, 잡혀 온 자들을 추궁해서 의뢰인을 알아내야겠지. 걱정할 것 없다. 조사는 확실하게 이루어질 테니까. 마법을 써서라도 실토하게 만들면 된다.
그리고 만약, 아카데미 학생이 이 일에 연루된 게 사실이라면 응당 처분이 이루어질 거다.”
퇴학, 그 이상의 처벌도 떨어질 수 있었다. 가문이 이 일에 가담한 거라면 더욱 큰 제재가 가해질 거다.
헬무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녀석들은 블랙 호크예요. 이런 일에 익숙한 녀석들이니 순순히 실토하진 않을 걸요.”
“블랙 호크, 귀족들의 더러운 의뢰를 맡아서 하는 자들이로군. 확실한가?”
“네. 의뢰인이 귀족이란 만큼이나 확실하지요.”
“사실, 저 녀석을 노리는데 돈을 주고 사람을 쓸 건 귀족들뿐이니까요.”
시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행정실 직원은 그들이 증언한 내용을 정리해서 적었다. 알란 교관이 말했다.
“이 건은 내가 상부에 보고해 두지. 교관들과도 논의해 봐야겠어. 너희들은 돌아가서 이만 쉬도록. 아스카는 상처를 좀 치료하고.”
어느덧 늦어진 시각이었다. 아카데미 양호실은 24시간 운영하지만, 야간에는 응급조치만 가능했다.
그리고 응급조치는 이미 시안이 해놓은 상태였다. 의원을 찾아가도 붕대를 감고 누워 있으라 권할 것이다.
하지만 응급조치만으로 충분한 상처가 아니었다.
“상처는 어떡하지? 옆구리 쪽에 좀 깊게 베였어. 내가 겉만 살짝 아물게 해놔서 조금만 움직여도 터질 텐데.”
“자고 일어나면 나을 테니까 신경 꺼!”
시안이 혀를 찼다.
“네가 마물도 아닌데 그럴 리가 없잖아. 너 바보야?”
“이게!”
항상 시비 걸 태세로 충만해 있는 아스카였지만, 육체의 통증을 이기지 못했다.
팔을 쳐들었다가 신음과 함께 몸을 숙이는 아스카를 시안이 한심하게 바라봤다. 헬무트가 한마디 거들었다.
“치유 마법사를 찾아가면 되잖아.”
“이 녀석한테 그럴 돈이 있을 것 같아? 이 밤중에 치료를 받으려면 두 배는 내야 할 거라고. 평민한테는 부담이 크지.”
시안은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사실 그도 자신의 흥미 분야에는 오지랖이 넓지만, 온화한 생김새와는 달리 냉정한 구석이 있었다.
그 말은 즉 아스카에게 흥미가 일었다는 뜻이다.
반대로 헬무트는 이제 슬슬 이 귀찮은 일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충분히 많이 도와줬다. 이 정도면 엄청나게 선심을 쓴 거다.
“본인이 신경 끄라니, 내버려 두면 되잖아.”
“인정머리 없는 자식! 네가 당할 뻔한 일이기도 했다는 거 알아?”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니 버럭 성을 낸다. 그냥 만사에 불만이 많은 녀석이었다.
헬무트는 딱 잘라 끊었다.
“난 안 당했을 거야. 너와는 달리.”
헬무트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던 아스카는 이를 갈면서도 대꾸하지 못했다. 둘을 번갈아 보며 시안이 눈을 빛냈다.
‘어라, 이 녀석?’
시안한테 이를 드러내는 것과는 반응이 좀 다르다. 미친개도 자신보다 강한 상대 앞에서는 숨을 죽이는 건가.
그보다 아스카는 마치 낑낑대는 강아지 같은 눈동자로 헬무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안이 신경 써주는 건 마음에 안 들어 하면서, 헬무트가 그를 외면하려고 하니 예민하게 반응한다.
‘귀여운 데가 있는데.’
본인이 극구 거부를 하니 내버려 둘까 했던 마음이 바뀌었다.
미친개를 길들일 기회다. 목줄을 쥘 건 자신이 아니겠지만.
“방법이 있지. 헬무트, 네 도움이 필요해.”
‘또 뭔데’라고 묻는 듯한 짜증 서린 눈빛이었다. 시안은 개의치 않고 웃었다.
***
―똑똑.
“들어와도 돼.”
문을 벌컥 열고, 헬무트가 몸을 반쯤 안으로 들였다.
아레아는 마침 새로운 잠옷으로 갈아입고, 세안을 마친 채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레아는 우뚝 멈춰선 헬무트를 의아하게 쳐다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등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두 명이다.
“뭐야, 밖에 누가 있어?”
“네 도움이 필요한데.”
등을 쿡 찌르는 손길에, 헬무트가 못 이기는 척 입을 열었다.
“이 안으로 들이겠다는 소리야? 두 녀석이나?”
아레아가 눈을 부라리며 팔짱을 꼈다.
요즘 들어 헬무트와 벽이 허물어지고 있긴 했지만, 그게 다른 녀석들까지 받아들이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문이 조금 더 열리고 시안이 고개를 쑥 내밀었다.
“어이, 아레아! 너무 그렇게 쌀쌀맞게 굴지 마.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어? 너 근데 잠옷 한 번 참 인상적이다. 멋진데.”
아레아는 갈색 곰돌이가 그려진 연보라색 잠옷을 입고 있었다. 재질이 고급스럽고 무늬가 정교해서 그런가 생각보다 유치하지 않고 잘 어울렸다.
요즘 동물 그림이 그려진 잠옷이 유행이라고 하던가. 시안이 흥미를 보였다.
“너, 그거 새로 산 거지? 어디서 산 거야?”
아레아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말포트 상점.”
“번화가 동쪽 끝에 있는 거기? 거기 엄청 비싸잖아.”
“너와는 달리 난 돈이 많으니까.”
“예, 예, 그러시겠지요. 마법 학부 수석님.”
“그래, 차석.”
시안은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성적에 목숨을 거는 아레아와는 달리, 그는 크게 성적에 연연하지 않았다.
아레아와는 좀 큰 격차가 나지만, 여유 있게 차석을 유지하고 있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러면 수석님, 이 차석이 방안에 좀 들어가도 될까? 바깥 공기가 쌀쌀한데.”
일부러 새로 산 물건에 관심도 보여 주고, 비위도 맞춰줬지만 아레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뒤에 있는 녀석은 뭔데.”
“그게 바로 중요한 점이지!”
시안이 아스카의 어깨를 떠밀었다. 상처를 자극당한 아스카는 배를 움켜쥐며 눈을 찡그렸다.
“웬 거지꼴이 된 녀석을 주워 와선.”
아레아가 기가 찬 듯 말했다.
아스카는 검술 학부에서 희귀한 호리호리한 미소년이었다. 하지만 쑥대밭이 된 머리와 터진 입술을 한 지금 몰골로는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뭐라고 말하려는 아스카의 입을 틀어막으며 시안이 하하 웃었다.
“너도 아는 녀석일걸?”
알아서 해결하란 듯이 헬무트가 안으로 들어서 버리자 공간이 생겼다. 시안은 재빠르게 행동했다.
“뭐, 시간이 늦었잖아? 바깥에서 시끄럽게 이러지 말고 일단 안에서 이야기하지.”
아스카를 안으로 떠민 시안이 얼른 문을 닫아 버렸다. 아레아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뭐하는 짓이야?”
“치유 마법 쓸 줄 알지? 아니면, 뭐 포션 같은 거라도 없을까.”
“지금 나더러 이 녀석을 치유해달라고 찾아온 거야?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해야 하는데?”
“귀족들의 사주를 받은 불량배에게 습격을 받아 다친 평민 학우에 대한 자비심과 동정심으로?”
“나한텐 그런 마음은 없으니, 데리고 내 방에서 나가!”
‘쉽지 않군.’
아레아는 늘 쉽지 않았다. 시안은 어떻게 그를 설득할지 도전욕을 느꼈다.
방심한 새 입이 자유로워진 아스카가 아레아의 안면을 훑으며 물었다.
“더럽게 예쁘네. 네가 그 아레아구나?”
아레아가 검술 학부의 미친개에 대해서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스카도 마법 학부 수석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두 유명인이 한 자리에 있는 것이다.
아레아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깔렸다.
“너도 예뻐.”
자세히 보니 여장해 놓고 보면 정말 여자라고 해도 의심하지 못할 만큼 선이 고운 얼굴이다.
아레아 자신과 같은 경우는 아니겠지만……. 왠지 말투부터 거슬렸다. 상성이 맞지 않는 녀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