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83
82
헬무트
82화
오후가 될 무렵, 모든 조사는 일단 끝을 맺었다.
그레타 아카데미의 각 조사 담당자들은 조사 대상들에게 그날의 행적이나 아스카에 대한 생각을 집요하게 캐물었다.
멀쩡한 학생들을 의심이 간다고 죄인 취급할 수는 없다.
하지만 헬무트에게도 일을 벌인 전적이 있는 그들이기에 의심의 대상이 되어도 할 말은 없었다. 이른바 유력한 용의자.
‘빌어먹을, 블랙 호크 녀석들 돈을 얼마나 먹였는데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거야!’
사바트가 내심 투덜거렸다. 아스카를 응징할 효과적인 방법으로 블랙 호크를 생각해 낸 건 바로 그였다.
귀족인 그들이 직접 진을 치고 아스카를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사바트는 더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의뢰비의 반절을 선불로 주면서 돈을 꽤 썼지만 아깝지 않았다.
걸레짝이 될 평민 녀석을 기대하면서 사바트는 휴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블랙 호크란 놈들이 그런 걸 수행하기엔 제격이지.’
평민 녀석 따위 불구가 되면 어떤가.
편입생인 그는 불과 한두 달 전만 해도 평민과 귀족이 명확하게 구분된 곳에서 살아왔다.
귀족에게 욕설을 퍼부어대는 아스카란 녀석은 용납될 수 없는 존재였다. 사지를 찢어 죽여도 성에 차지 않는다.
그에게 그레타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괴상하게만 느껴졌다.
‘평민 녀석 따위 하나 죽건 살건 뭐 어쨌다고 조사하고 난린지.’
평민 따위가 자신을 노릴 만한 녀석들로 그들을 지목했다고 해서, 귀족이 조사를 받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사바트는 일이 잘못된 걸 알고 불려가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잘 다스렸다.
증거는 남지 않았다. 검가 특유의 암호문을 쓴 편지로 바덴에 남아 있는 본가의 사람을 통해서 의뢰했고, 본가에서는 은밀한 방식으로 블랙 호크와 접촉했을 터였다.
사바트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짐작은 할 테지만, 귀족 친구들은 입을 다물어줄 것이다.
심증만 있을 뿐 그들도 확실하게 아는 건 없었다.
‘그 평민 녀석이 만신창이가 되었어야 하는 건데.’
계획대로 되었다면, 모두가 눈꼴 사납게 생각하는 녀석에게 응징을 가한 게 된다.
자신이 한 짓이라고 암시하면 그걸로 사바트는 검술 학부에서 입지를 얻을 수 있을 거였다.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사바트, 에런, 제롬을 위시한 그들 패거리는 조사에서 무슨 일인지 모른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굳이 말을 맞출 것도 없었다. 사바트가 주도한 일이고, 나머지는 모른다.
진실의 눈이란 게 그렇게 쉽게 사용되는 게 아니란 걸 후에 알아내고 분통을 터뜨렸기에 아카데미에서 자신들에게서 진실을 이끌어낼 수단이 없단 건 알고 있었다.
‘블랙 호크 놈들도 재주껏 몸을 빼낸 모양이니까.’
결국 아카데미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사바트는 제 패거리들과 합류하며 그 사실을 재확인했다.
다들 오전 내내 붙잡혀서 조사를 받은 것에 짜증스러운 눈치였다.
의뢰비의 반절은 날아갔으나 그 평민 녀석도 이젠 말귀를 알아먹었을 것이다. 귀족을 상대로 그렇게 건방을 떨어선 안 된다는 것을.
마침 교정으로 돌아온 사바트 패거리의 눈에 아스카가 잡혔다.
헬무트가 검을 수련하자, 할 일이 없어진 아스카도 모처럼 목검을 쥐고 자세를 잡고 있었다. 각 잡고 검을 수련해볼 참이었다.
에런이 먼저 운을 떼었다.
“야, 평민. 너 누구한테 습격당했다면서. 꼴이 그게 뭐냐.”
곱상한 얼굴에서 터진 입술과 생채기를 발견한 그들은 기분이 좋아졌다.
상처를 치료했다고 해도, 칼침을 맞았으니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아스카는 표정 없는 얼굴로 에런을 쳐다봤다. 그답지 않은 표정이었다.
다른 녀석들이 추임새를 넣었다.
“성질이 그 모양이니 지나가다가 칼을 맞는 거지.”
“누군지 몰라도, 애먼 우리를 물고 늘어지면 쓰나. 너 때문에 반나절을 날려 먹었잖아.”
“앞으로 고분고분하게 살아. 그러다가 다음엔 정말 죽는 수가 있으니까.”
사바트 패거리는 비웃음과 함께 아스카를 스쳐 지났다.
아니, 스쳐 지나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퍽! 먼저 입을 뗀 에런의 고개가 가차 없이 옆으로 꺾였다. 번개 같은 일격이었다.
우당탕! 그는 바로 균형을 잃고 바닥에 처박혔다. 충격 때문에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크흑!”
신음을 내는 그의 얼굴에서 코피가 흥건하게 쏟아졌다.
사바트 패거리가 목검을 쳐들고 아스카를 둘러쌌다. 금세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 자식! 뭐하는 짓이야?”
“돌았어?”
아스카가 상쾌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히죽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미안! 하도 병신같은 면상이라 손이 저절로 나가더라고.”
이성이 끊겼고, 주먹이 날아갔다. 그건 불가항력이었다.
도발한 녀석이 잘못 아닌가? 아스카는 당당히 생각했다.
그는 코를 부둥켜 잡고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키는 에런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생긴 게 병신같으니 지나가다가 평민한테 처맞는 거지, 안 그래? 네 잘못이잖아.”
“이 벌레 같은 평민 자식이!”
“말로는 안 되겠어!”
“응? 말로 할 생각이었어? 몰랐네.”
밝은 웃음이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아스카는 목검을 들었다. 역시 이쪽이 적성이 맞았다.
“거기 동작 중지!”
그때, 저쪽에서 노성이 내리꽂혔다.
어느새 나타난 페트리샤 교관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제군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이 평민 녀석이.”
“조용! 평민 녀석이라고? 제군은 잠시 후 개인적으로 나를 한 번 봐야겠어. 다른 사람이 설명해 봐.”
사바트가 불만스럽게 입을 꾹 다물자, 다른 녀석이 말했다.
“아스카가 에런을 때렸습니다.”
에런은 코피를 훔치며 기침했다. 피해자라는 걸 과시하는 태도였다.
마음껏 싸워 볼 수 있나 싶었는데 등장한 교관 때문에 김이 샜다.
아스카가 퉁명스레 말했다.
“네, 제가 저 여우 같은 새끼를 팼습니다.”
“대체 왜 학우를 공격한 건지, 설명해 봐. 욕설은 빼고, 내가 이해할 수 있게.”
“그냥 패 주고 싶게 생겨서요.”
성의 없이 대꾸한 아스카에게 페트리샤 교관이 바로 응징을 가했다. 딱!
“아얏! 교관님.”
“어머, 이런. 때려 주고 싶은 머리통이라 나도 모르게 그만.”
“제 얼굴 안 보이세요?”
아스카가 자신의 터진 입술을 가리키며 호소했다.
그가 휴일에 습격당해 피투성이가 되었단 사실을 모를 리 없는 페트리샤 교관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냉철하게 잘랐다.
“아주 건강해 보이는군. 다른 학우를 두들겨 팰 정도로.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해야 할 거야. 어제 죽을뻔하고 오늘 운동장을 돌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몰인정한 마녀라고 속으로 욕한 아스카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제가 휴일에 시내에 나갔다가 블랙 호크란 녀석들에게 습격을 당해서 생사를 오갔잖아요. 그런데 기껏 병사한테 넘긴 놈들이 도망갔다지 뭐예요?
교관님이 이해 좀 해 주세요. 지금 도망간 녀석들이 습격할까 봐 겁이 나서 제가 부쩍 예민해져 있거든요. 누가 시비를 걸면 저를 공격하는 것 같다는 피해망상증이 생길 정도로 말이죠.”
이곳에 있는 모두가 들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모두가 솔깃한 채 귀를 기울였다.
페트리샤 교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자신이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골칫덩이가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순조로웠던 그녀의 교관 생활에서 맞부닥친 난제였다. 다른 교관들도 아스카에게는 학을 뗐다.
“그러니까, 제군의 말은 저쪽에서 시비를 걸었단 말이지?”
“정확합니다.”
“어떻게 시비를 걸었는데?”
“그냥 제가 칼을 맞은 것에 대해서 즐거워하던데요. 저 녀석들이.”
아스카의 손가락이 정확히 제게 시비를 건 녀석들을 지목했다.
“여럿이서 시비를 걸었다는 소린가, 지금?”
“교관님! 폭력을 행사한 건 저 녀석입니다, 우리가 아니라요!”
“그건 당연히 처벌해야 할 문제지. 하지만 여럿이서 시비를 거는 건 정당한 일인가?”
“그렇지요. 그리고 전 한 놈만 팼습니다. 관대하게 다른 녀석들은 용서해 준 거죠.”
페트리샤 교관이 치솟는 혈압을 누르며 기가 막힌 듯이 아스카를 쳐다봤다.
가까스로 코피가 멎은 에런이 분기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대로 저 녀석을 놔두실 겁니까? 당연히 조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저 녀석은 제정신이 아니에요! 미친개처럼 날뛴다고요!”
“꼬우면 일대일로 덤비던지.”
“아스카!”
딱! 두 번째 일격이 아스카의 머리를 강타했다. 이번엔 눈물이 찔끔 날만큼 아팠다.
아무리 분이 치민 아스카라지만 교관에게 대들진 않는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며 아픈 시늉을 했다.
“교관님, 그만 좀 때리세요!”
“이 상처, 네게 정식으로 치료비를 청구할 거야! 네가 그 돈을 갚을 수 있는지 보겠어!”
버럭 소리를 지르는 에런을 아스카가 큰 소리로 조롱했다.
“가서 가문에다가 이르지그래! 아버님, 어머님, 저 아카데미에서 평민 녀석한테 처맞았어요! 그 새끼를 좀 죽여 주세요! 엉엉엉! 오냐, 알았다. 내 금쪽같은 아들!”
딱! 세 번째 일격이 아스카의 머리를 강타했다. 페트리샤 교관이 한 차례 심호흡 후 말했다.
“좋아, 제군? 일단 상처를 치료하도록 해. 다만 이 녀석이 미친개라는 걸, 앞으로 말을 할 때 유념해 두도록 하고. 그리고 아스카! 넌 나를 따라와.”
페트리샤 교관이 아스카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스카는 요란스럽게 엄살이란 엄살은 다 부리면서 그녀에게 끌려갔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진 후, 검술 학부 학생들은 맥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뭔가, 되게 시끄러웠네…….”
“바람 잘 날 없다니까.”
그 말에 깊이 공감하며 헬무트는 목검을 치켜들었다.
어떤 소란에서도 수련에 집중할 자신이 있었는데, 그 자신감이 오늘 무너져 내렸다.
그는 인정해야 했다. 아스카는 정말 난 녀석이었다.
***
“아이씨, 반성문을 열 장이나 썼어. 손가락 아파 죽겠네. 그 마녀 진짜 인정이 없어.”
아스카가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운동장 20바퀴는 우습게 도는 녀석치고는 과한 엄살이다.
헬무트는 시안과 함께 기숙사 1층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수련장으로 가려던 헬무트가 시안한테 붙잡힌 참이었다.
그의 수련은 막상 검술을 배우는 아카데미에서 매일같이 방해받고 있었다.
시안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여어, 아스카! 검술 학부에서 싸움이 났다길래 너일 줄 알았지.”
마침 그걸 물어보려고 헬무트를 붙잡았던 것이다. 헬무트가 짤막하게 설명을 보탰다.
“에런이란 녀석을 때려서 코피를 쏟게 했어. 저 녀석은 교관한테 끌려갔지.”
“시비 건 녀석이 잘못이지. 내가 반성문 같은 걸 왜 써야 하는 거야?”
아스카가 뻔뻔하게 중얼댔다. 이 녀석도 도덕 시험을 어떻게 통과했을지 의문이다.
헬무트는 아카데미 시험이 퍽 허술하다고 생각했다. 이래선 희대의 살인마도 문제없이 아카데미에 입학할 것이다.
아스카가 시안과 헬무트를 번갈아 봤다.
“너희 둘은 다른 학부인데 어떻게 아는 사이야? 이 녀석은 이제 막 편입했을 뿐이잖아.”
“뭐,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지.”
간략하게 유령 출몰 사건을 설명하자 아스카가 흥미를 보였다.
“뭐야, 그런 재미있는 일이.”
시안도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너랑 같은 방 쓰는 녀석은 대체 너와 어떻게 지내는 거야?”
검술 학부의 미친개와는 아무도 방을 쓰고 싶어 하지 않을 텐데, 그에 관해서 항의가 들어왔다는 소리를 들은 적은 없었다.
시비가 일상인 녀석이니 일이 터질 만도 한데, 묘하게도 아스카는 기숙사에선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스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작년부터 같은 녀석과 방을 쓰는데 그 녀석은 내 이름도 모를걸? 맨날 멍한 눈으로 돌아다니는 녀석인데 이름이 뭐더라, 콜린이던가.”
“아아, 콜린, 마법 학부에서도 괴짜로 소문난 녀석이지. 배정이 참 절묘하게 됐네.”
헬무트는 아레아와 아스카는 콜린과. 만만찮은 녀석들끼리 모아 놨더니 그럭저럭 균형이 이뤄지고 있었다.
누가 배정했는지 몰라도 신의 솜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