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84
83
헬무트
83화
헬무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이만 수련하러.”
헬무트는 수련하고 싶었다. 꽤 강렬하게. 제법 친해진 것 같으니, 잡담은 둘이서 해도 충분하지 않은가?
발을 빼려던 헬무트를 아스카가 지체 없이 따라나섰다.
“나도 수련할래.”
시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개 주인이 생겼구만.’
남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놈의 약속이 뭔지, 시안도 곧 아레아에게 불려 갈 처지였으니까.
아마 한동안은 해방되긴 어려울 것이다.
시안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수련장으로 향하면서 헬무트는 옆에서 조잘거리는 아스카를 기절시켜서 던져 버리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에 휩싸였다.
그는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게다가 생활이 동떨어진 시안과는 달리 얼마든지 헬무트를 귀찮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건 헬무트도 알았다.
‘인간의 삶에 녹아든다는 건 이런 일인가?’
누군가를 상대하는 건 귀찮았고, 인내심이 필요했다.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까지 쿠드로 저택에서의 삶은 단조롭고 평온했다.
마음껏 검에 수련할 수 있었고, 성에 찰 만큼 뭔가에 열중할 수도 있었다. 헬무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결정하면 되었다.
그는 계획적이고 규칙적인 성격이었다. 파헤의 숲에서는 그의 계획을 다리언이 정해 주었지만, 쭉 그렇게 살아왔다.
아침에 일어나면 뭘 할지 머릿속으로 그린다. 대개 개인적인 수련 시간을 확보하는 방향이다.
남들 보는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기초적인 연습뿐, 비스 수련이나 다리언의 검법을 펼치는 건 개인적인 공간에서나 가능했다.
에단이 바빠서 기회가 주어지진 않았지만, 그와도 한 번 제대로 대련이란 걸 해 보고 싶다.
강력한 검사와의 일대일은 해 본 적 없으니까. 큰 발전은 없었지만, 원래 경지란 단계적으로 오르는 것.
향상되는 실력을 매일같이 체감하는 건 불가능하다.
‘쿠드로 저택에서는 약간 진보가 있었는데.’
그의 안엔 끝모르는 우물이 있었고, 쿠드로 저택에서는 우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카데미를 다니자 그 느낌은 금세 미미해졌다.
계획과 달리 신경을 빼앗는 일이 생긴다. 친분이든, 시비든 많은 것들이 헬무트를 자극했다.
무시하자니, 그는 숲속에서 혼자 살 듯하려고 아카데미에 들어온 게 아니었다. 목적과 부합하는 선에서 적당히 섞이는 건 까다롭다.
친구라고 몇 명 있지도 않은데도 그러니, 만약 그가 평민이란 게 소문나 따돌림당하지 않았다면 삶이 더 번잡해졌을 것이다.
‘차라리 잘 된 건가.’
그때 문득 아스카가 물었다.
“한 가지 생각난 게 있는데.”
“뭔데.”
“너, 그 블랙 호크란 녀석들과 무슨 일이 있었어? 그때 그 녀석들한테 볼일이 있다고 말했잖아.”
“아아, 원한이 좀 있어서.”
2급 용병 두 명을 참살하고 변장한 이후로 추적은 끊겼다.
하지만 이제 탈출한 녀석들이 그를 목격했으니 다시 블랙 호크에서 그가 바덴에 있단 걸 인지하게 되었을 터.
걱정할 필요 있을까? 헬무트는 그레타 아카데미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 여기선 그들도 헬무트를 건드릴 수 없다.
감옥에서 탈출한 건으로 떠들썩하니 그들도 바덴에서 당분간 활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끈질긴 녀석들 같으니,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아스카란 상대적으로 만만한 표적도 어떻게 하지 못한 그들이 당분간 헬무트를 노리진 못할 거다. 특히나 바덴에서는.
아스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한? 그러고 보니 너, 용병 출신이랬지. 그거 돈 많이 버냐?”
“꽤? 의뢰에 따라 다르지만.”
“아니, 너도 들었지? 그 병신같은 에런이 나한테 치료비를 청구한다잖아. 쪼잔한 새끼! 코뼈를 뭉개 줬어야 하는 건데.”
“그 녀석이 먼저 시비를 건 게 있으니 그렇게는 안 될걸. 그리고 학기 중에는 일 못 해.”
“학기 끝나고는 안 되는데…….”
아스카는 끊임없이 쫑알거렸다. 수련장 입구에 다다르자 드디어 아스카를 떨쳐 버릴 기회가 찾아왔다.
“여기까지. 난 이쪽으로 들어간다.”
“아, 넌 에단 교관님 수련장을 쓴댔지? 치사하게 혼자만 그러기냐.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안돼.”
헬무트는 칼같이 잘랐다. 누군가와 한 공간에서 수련하는 게 불편할뿐더러, 에단 교관의 수련장을 쓸 수 있도록 허락받은 건 자신뿐이었다.
“같이 가서 대련하면 좋잖아, 어때.”
헬무트는 솔깃해졌다. 그거 하난 마음에 들었다.
대련이란 거. 다른 녀석들은 방과 후 가볍게 검을 맞대기도 하는 모양이었지만, 헬무트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친근한 의미로 대련을 청하는 게 아니더라도, 애초에 수련장도 따로 썼기에 사바트 같은 녀석들이 시비를 걸기 위해 대련을 청하는 것도 어려웠다.
“조만간 수업에서 대련이 있을 거라고 했어.”
헬무트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고픈 욕구를 억눌렀다.
“그때 하지.”
짤막하게 말을 맺은 헬무트는 등을 돌렸다. 본격적으로 수련에 정진할 시간이다.
***
다음날 아스카는 자연스럽게 헬무트에게 따라붙었다.
아침부터 헬무트는 자신의 방이 있는 3층 복도에 대기하던 아스카와 딱 마주쳤다. 아스카가 생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수업받으러 가야지.”
언제부터 같이 다녔다고? 묻고 싶었지만 아스카는 뻔뻔스러웠다. 헬무트는 그를 빤히 보다가 입을 닫았다.
매몰차게 거절할 정도로 아스카가 싫고 귀찮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이것도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그가 감수해야 하는 사회화 과정 아닐까?
헬무트는 과묵했고, 그 때문에 항상 떠드는 건 상대 쪽이었다.
화젯거리가 떨어질 만한데 아스카는 쉴새 없이 아카데미 생활에 대해서 떠들었다. 검술 학부 생활을 1년 더 해 봤던 그는 아카데미에 대해서 아는 게 많았다. 어느 식당의 어느 메뉴가 맛있는지도.
헬무트는 문득 생각했다.
‘이 녀석은 사실 외로웠던 거 아닐까.’
검술 학부 건물에 도착하자 아스카가 손짓했다.
“사물함 좀 들렀다 가자. 오늘 쪽지 시험 본대. 틈틈이 쉬는 시간에 책 좀 봐 둬야지.”
“네가 공부를 한다고?”
헬무트는 의외란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실기 비중이 70퍼센트를 차지하는 검술 학부에서 필기 공부를 평소에 열심히 하는 녀석은 드물었다.
그중에서도 아스카는 언행만 봐선 머리가 텅텅 비었을 것 같았다.
“무슨 그런 표정으로 봐? 누굴 멍청이로 아나. 나 성적 좋아!”
그러니까 성적이 좋은 게 순전히 실기 시험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하긴 성적이 좋아야겠지.”
그래야 아스카 정도로 사고를 치고 태도가 불량해도 아카데미를 다닐 수 있는 거다.
헬무트가 납득하자 그의 말이 거슬린 아스카가 눈을 부라렸다.
“아침부터 왜 자꾸 시비를 걸어! 안 그래도 성질 죽이고 있구만.”
투덜대며 그는 제 사물함 쪽으로 걸어갔다.
검술 학부 학생들에겐 인당 1개의 사물함 열쇠가 주어진다. 목검은 수련 때문이라도 기숙사까지 들고 다니는 녀석이 많았지만, 교재는 검술 학부 본관 입구에 있는 사물함에다가 넣어 두고 수업 전에 찾아갔다.
하지만 아스카는 곧 우뚝 멈춰섰다.
“왜 열려 있지?”
그는 빠르게 사물함을 열어젖혔다.
“아니, 미친! 내 책이 어디 갔어?”
아스카의 사물함은 텅 비어 있었다. 그 안에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헬무트가 물었다.
“네가 열어 두고 간 거 아니야?”
“그럴 리가. 난 적이 많아. 그래서 사물함을 늘 신경 써서 잠가둔다고!”
아스카가 당당하게 외쳤다. 그레타 아카데미라고 해서 사물함에 마법 잠금쇠를 달아 두진 않았다.
그렇다고 싸구려 사물함을 쓰는 것도 아니라서 힘으로 열 수도 없었다.
안 좋은 손재주가 좀 있다면 열쇠가 없이도 열어 볼 수는 있겠지만, 쉽지는 않을 터였다.
아스카가 사물함을 탕 닫았다.
“이 새끼들이 블랙 호크를 또 고용했나. 가지가지 하네, 진짜!”
사람을 습격하기 위해서 고용한 적도 있으니, 사물함 털이 정도 시키는 건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
사바트 패거리가 그날 이후로 반성하거나 마음을 고쳐먹고 있지 않음은 그걸로 명백해졌다.
“헬무트, 네 사물함도 확인해 봐.”
아스카가 말하자 헬무트는 시큰둥하게 제 사물함 쪽으로 움직였다.
설마 제 것까지 손댔으랴 싶었다. 그러나 곧 헬무트의 눈에 살짝 열린 사물함 입구가 들어왔다.
‘설마.’
손을 뻗어 열어보니 텅 비어 있었다.
순간 그의 안에서 뭔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순 시야가 암전되었다.
머리는 뜨거운 듯이 차가웠다.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피비린내 나는 광경에 눈앞에 펼쳐졌다. 그것은 곧 다가올 수순이었다.
헬무트가 정신을 차린 건, 살기에 감응한 어둠의 싹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경각심이 폭발할 듯한 화를 제어했다. 헬무트 쪽으로 다가온 아스카가 픽 웃었다.
“너도 털렸냐? 미치겠다. 별 지저분한 짓을 다 당해 보네.”
웃고는 있었지만 입매가 비틀렸다. 잔뜩 화가 난 눈빛이었다.
아카데미 교재 값은 비싸다. 수업 중에 필기해 둔 내용도 죄 날아갔다. 열이 뻗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가서 조질래? 시발, 정학이든 퇴학이든 그 새끼들 두 다리로 못 걷게 만들어 주자고.”
엄청난 유혹이었다. 하마터면 승낙할 뻔했다. 늪에 빨려드는 것처럼 끌렸지만, 헬무트는 간신히 견뎌냈다.
“……곧 대련이 있어.”
굳이 그럴 것도 없이, 정당하게 놈들을 응징할 방법이 있었다. 아카데미의 규율이 발목을 죄였다.
이 제약 안에서, 움직이는 게 헬무트에게 주어진 과제다.
헬무트는 아스카를 좀 경계하기로 했다. 아레아나 시안과는 달리 이 녀석은 자신을 비행으로 몰고 갈 녀석이었다.
같이 미친개가 되면 곤란하니 주의해야 했다. 헬무트의 목표는 모범생이었으니까.
가까스로 화를 다스린 아스카가 허공을 보면서 중얼댔다.
“아무튼 편입한 새끼들이 지독하네.”
헬무트를 포함해서 하는 말인지 뉘앙스가 묘했다. 하지만 아스카는 먼저 등을 돌렸다.
“그래, 대련. 대련이라 이거지.”
목검을 불끈 쥐는 태도가 심상치 않다. 하지만 그건 헬무트도 마찬가지였다. 순순히 당하고 넘어가는 취미는 없다. 헬무트의 눈빛이 맹수처럼 사납게 번뜩였다.
***
오늘은 알란 교관의 수업이 있었다. 알란 교관도 요새 검술 학부를 휩쓴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학기를 진행하다 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정규 일정을 진행하는 데 더 이상 차질이 있어선 안 되었다.
몸을 푸는 주간은 끝났고, 본격적으로 수업을 진행할 시간이다.
“오늘은 슬슬 대련을 시작해 볼까? 늘 하던 친구와 붙는 것도 좋겠지만, 평소에 붙어 보지 못한 새로운 친구와 대련해보는 게 경험 면에서도 좋을 거다. 마침 짝수니 잘 되었군. 대련 상대를 찾아서 내 앞으로 오도록. 상대를 찾지 못한 학생은 내 앞으로 오면 짝을 지어주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스카는 즉각 움직였다. 사바트 패거리가 모여 있는 쪽이었다.
“에런, 나와!”
살기등등한 미소가 아스카의 안면에 떠올랐다.
그의 외침을 들은 사바트 패거리들은 움찔했다. 애초에 문제를 일으킬 수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어쩔 수 없는 상대란 걸 알기에 아스카를 건드리지 못한 거였다.
편입생뿐만 아니라 재학생도 섞여 있는 무리라 아스카에 대해선 모두 경각심을 품고 있었다.
에런에게 주먹을 날린 아스카의 몸놀림은 기차게 빨랐다. 대련에 응했다간 어떤 꼴을 볼지 모른다.
하지만 꼭 대련에 응할 필요는 없었다. 거절은 자유였으니까.
“네 상처, 갚을 기회를 주지. 겁먹은 쥐새끼처럼 숨어 있을 거냐?”
에런이 코웃음 쳤다.
“유감이지만, 우리 쪽은 짝수라서 다 대련 상대가 정해졌는데?”
“원래 대련하던 녀석들 말고 다른 녀석을 찾아보라는 교관님 말씀 못 들었냐?”
“네가 대련을 정상적으로 치를 것 같진 않아서. 미친개한테 물리면 곤란해지잖아?”
아스카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원래 인내심 많은 성격이 아니었다. 많이 참았다.
그때, 옆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나는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