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86
85
헬무트
85화
“이런!”
호들갑스럽게 놀란 표정을 지은 아스카가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대련에 집중하느라 듣지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교관님!”
“상대가 전투 불능이란 걸 몰랐을 리는 없을 텐데?”
“정신은 있어 보이는 데요? 항복 소릴 안 하더라고요.”
아스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항복한다고 외칠 겨를도 없이 두들겨 팬 그치고는 뻔뻔한 소리였다.
알란 교관이 이마를 턱 짚었다.
“아스카!”
“멀쩡하잖아요. 저거 보세요.”
아스카가 손가락질한 그 위치에서 토사물로 얼룩진 제롬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굴욕감을 느낄 정신도 없어 보였다.
알란이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누가 제롬을 양호실로 안내해 주도록.”
별로 의리가 깊은 사이가 아닌지, 눈치만 보던 그의 친구들 중 몇몇이 마지못해 나섰다.
그들이 제롬과 함께 사라지는 걸 본 아스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련하다 보면 다칠 수도 있는 것을, 너무 학생들을 곱게 키우시네요. 명색이 검술 학부인데.”
“이건 대련이 아니라 네 일방적인 분풀이에 불과하다. 약자에게 관대해지라고 배우지 않았느냐?”
“약자인 평민이 귀족에게 관대해질 이유가 있을까요?”
팔짱을 낀 아스카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어차피 당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는 떳떳했다. 가만 있어 봐야 당하는 건 자신뿐이다. 입학할 때부터 쏟아지는 갖은 모욕과 시비, 오로지 평민이란 이유만으로 그에게 쏟아지는 부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들.
그걸 참아넘겨야 하는가?
대개는 참았다. 아스카는 성격상 참지 않았지만, 대개의 평민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거나 들켜도 이를 악물고 아카데미를 다녀야 했다.
기껏 들어온 이곳을 박차고 나가기는 힘드니까.
멸시와 차별의 시선. 그건 열 몇 살, 학생들이 감당하기 벅찬 일이었다.
그렇다고 아카데미를 나간 이후를 생각하면 귀족들을 상대로 함부로 행동할 순 없다.
아스카가 제멋대로 구는 이유는, 애초에 미래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가 강하기 때문이다.
검가의 자제건, 내로라하는 인재건 다 때려눕힐 수 있는 천재적인 검의 재능.
사람까지 써서 그를 짓밟아주려는 귀족 녀석들한테 갚아 주는 게 왜 나쁜가. 명백히 저쪽이 먼저 시작한 일인데.
교관은 보모가 아니고, 검술 학부 내 인간관계를 일일이 해결해 줄 수 없다.
혈기 왕성하고 육체 튼튼한 학생들이 모인 검술 학부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경쟁심과 적의는 실력 향상을 가져온다. 그 때문에 갈등은 때때로 방치되었다.
하지만 귀족과 평민의 관계에서는 한쪽의 일방적인 인내를 요구했다.
아스카도 많이 참았다. 성질대로 했다간 검술 학부 2학년의 반수는 의식불명이 되었을 거다.
알란 교관도 할 말은 있었다.
“네가 말하는 귀족들도, 이 아카데미의 테두리 안에 있기에 너를 상대로 약자일 수밖에 없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선을 지키라는 소리다.”
귀족이 아스카처럼 행동했다면 퇴학당하고도 남았다. 아스카는 어떤 면에서는 피해자인 그의 처지를 고려하여 많은 징계를 감면받았다.
목줄에 묶이지 않은 미친개. 그의 무력 앞에선 다수의 학생은 약자가 된다.
그가 하는 짓은 결국 신분으로 찍어누르려는 이들에 대항해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일 뿐이다.
눈감아주려고 해도, 이렇게까지 날뛰면 아스카에게 너무 관대한 거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것이다.교관은 균형을 지켜야 했다.
알란 교관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페트리샤 교관이 네게 반성문 열 장을 쓰게 했다지?”
아스카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내 생각엔, 열 장 가지고는 한참 모자란 것 같구나.”
“알란 교관님!”
“수업 끝나고 나를 따라와라. 도망쳤다간 벌이 두 배가 될 거다.”
“에이 씨.”
아스카는 소리를 낮춰 투덜거렸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다.
토사물을 온몸에 묻히고 추태를 부린 제롬은 앞으로 고개도 들지 못할 것이다.
귀족들은 패배자에게 냉정하다. 어쩌면 아카데미를 그만둘지도 모른다. 그걸 생각하니 속이 후련해졌다.
“저 교관님!”
그때 누군가가 알란 교관을 조심스레 불렀다.
“무슨 일이지, 주드?”
“저기, 저거 내버려 두셔도 괜찮습니까?”
“뭘 말이냐?”
“저쪽에, 아직 대련하고 있는 녀석들이 있잖습니까. 헬무트라는 녀석이…… 지금 장난 아닌데요.”
이쪽은 완벽히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지만, 반대편 쪽은 여전히 대련을 진행하고 있는 녀석들이 있다.
알란 교관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 속에서 깨달았다.
아스카에게 시선이 쏠려서 잊고 있었지만, 저쪽에 의식하지 못한 요주의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는 것을.
“와우! 참 헬무트도 대련하고 있었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아스카가 먼저 그쪽으로 달려갔다.
사바트와 헬무트의 의견은 한군데서 일치했다. 아스카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맞붙자는 것.
어차피 교관은 그쪽에 주목할 테고, 이쪽의 대련을 빙자한 싸움에는 시선이 덜 올 것이다.
시작 전, 사바트는 히죽거리며 빈정댔다.
“항복이란 말로 내빼기 없기다. 설마 그 정도로 겁쟁이는 아니겠지?”
그가 질 리가 없었다. 당연하다. 검가 루갈에서 어린 시절부터 검을 익혀온 그가 어쭙잖은 스승을 뒀을 평민 녀석에게 질 리 없잖은가.
아스카란 녀석은 그냥 거의 기적에 가까운 확률로 등장하는 예외였다.
“좋아.”
헬무트는 승낙했다. 사바트는 그때, 헬무트가 웃는 얼굴을 처음 보았다.
그려낸 미소가 아니었다. 휘어진 눈매 사이로 번뜩이는 검은 눈동자, 그 아래로 곡선을 그리는 입술을 본 순간 섬뜩한 느낌이 치달렸다.
그 느낌의 정체를 사바트는 곧 확인할 수 있었다.
알란 교관이 신호를 내린 순간, 사바트는 몸을 숙여 짓쳐 들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눈앞에서 불이 번쩍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쓰러져 바닥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목울대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크억!”
목을 움켜쥐며 사바트가 바닥을 굴렀다. 성대가 파열된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너는 겁쟁이라 내뺄 것 같아서, 약속을 지키게 해 주려고.”
헬무트는 친절한 말투로 이야기하며 웃었다. 내심 그쪽을 주목하고 있던 다른 녀석들이 얼어붙을 만큼 싸늘한 미소였다.
사바트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충혈된 눈에 핏발이 섰다.
‘이 평민 새끼가, 무슨 개수작을!’
분명 무슨 수작을 부렸을 것이다. 방심하지 않으면 또 당할 리 없다.
사바트는 의지를 굳혔다. 그의 의지는 헬무트에게도 달가운 것이었다.
곧바로 대련이 재개되었다. 아니, 일방적인 구타가.
사바트는 자신이 첫 공격에 바닥에 드러누운 게 우연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강제적으로.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가 그를 후려 패는 것 같았다. 반응하긴커녕,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마, 말도 안 돼!’
날카로운 빗방울 같은 공격이 연속적으로 그를 두들겼다. 맞은 곳마다 불붙은 듯 통증이 일었다.
엄청나게 강력한 타격이 아니기에 사바트는 쓰러지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거기서 벗어나려면 도망치거나 바닥에 웅크리고 몸을 가리는 수밖에 없다.
마음껏 때리면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으스러질 것이다.
헬무트는 그가 천천히 오래, 버틸만한 상태로 고통받길 바랐다.
방법은 간단하다. 근육에 손상 가지 않는 강도면 된다.
사바트의 움직임은 지렁이처럼 느렸다. 무수한 점이 찍힌 나무토막에 화살을 박듯 헬무트는 국소 부위를 짧게 끊어쳤다.
탓! 타탓! 탓! 타격음이라고 하기에도 약한 소음이 울려 퍼진다.
응축된 타격이 피멍으로 드러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파열되고 혈관이 터진 안쪽에선 엄청난 통증이 밀려 올라올 터.
휘청거리며 공격을 맞던 사바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흐어어!”
사바트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경련하는 입에선 신음도 제대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터질 듯이 커진 눈동자만이 그가 드러낼 수 있는 반응의 전부였다.
부들거리면서도 용케 목검을 놓지 않는다.
미친 소처럼 공격해 오는 사바트를 가볍게 받아치며 헬무트가 물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네 가문이란 게 항상 널 지켜 줄 수 있다고 믿어?”
진심 어린 의문이다. 만약 목격자 없는 으슥한 곳에서 사바트를 만났다면 헬무트는 그를 해치웠을 것이다.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을 거다.
“아, 참. 말 못 하지.”
‘이럴 수는 없어. 내가, 이 사바트 루갈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그가 느끼는 혼란은 고통을 능가했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헬무트를 노려보는 사바트의 입가에서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내장이 상하진 않았을 텐데, 목 안쪽 혈관이 터진 듯하다.
“알아 둬. 여기가 아카데미가 아니었으면 난 널 죽이고 숲에 파묻었을 거야.”
새카만 눈동자에서 섬뜩한 살기가 실려 나왔다. 헬무트는 이미 그걸 실행에 옮겨본 적 있었다.
사바트는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망가진 그의 성대는 항복이라는 단어를 뱉어 내지 못했다.
교묘하게 목검을 든 손 쪽만을 피하며, 헬무트는 조용히 사바트를 요리했다.
감각이 마비되어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
사바트는 허공을 향해 목검을 휘둘렀다. 그에게 저항할 수단은 그것뿐이란 비이성적인 공포심이 피어올랐다.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피멍이 서서히 살갗 위로 올라와 퉁퉁 부어올랐다.
온몸이 새빨갛게 된 사바트는 눈 뜨고 봐 주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감각이 다시 돌아올 때쯤 사바트는 살을 저미는 듯한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무자비함에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 모두가 새파래진 얼굴로 그 일방적인 대련을 지켜봤다.
“끄으으으.”
사바트는 선 채로 휘청거렸다. 누가 봐도 위험한 상태였다. 그때 알란 교관의 외침이 들려왔다.
“헬무트!”
헬무트는 못 들은 척, 목검을 내질렀다.
퍽! 명치를 가격당한 사바트가 피를 토하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커컥!”
처음으로 힘껏 때려본 거였다. 아니, 힘껏이라고 하기엔 부족했다.
그가 정말로 힘을 주었다면 끝이 무딘 이 목검은 사바트의 척추뼈를 꿰뚫고 뒤로 튀어나왔을 테니까.
마무리로 팔이나 다리 하나쯤은 부러뜨려 줘도 좋지 않을까. 슬슬 공포심을 느끼는 모양인데. 헬무트는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하는 찰나, 알란 교관이 재빠르게 근처에 도달했다.
“헬무트, 멈춰라!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항복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계속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제가 규칙을 어기진 않은 것 같은데.”
뭐가 문제냐는 말투였다. 헬무트는 태연하게 알란 교관을 쳐다봤다. 죄책감을 느끼긴커녕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대련의 목적은 전투 불능의 상대를 구타하는 게 아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저 녀석은 아직 정신이 있는데요.”
그리고 정신을 잃지 않는 한 전투 불능이 아니다. 그것이 헬무트의 기준이었다.
알란 교관은 깨달았다. 조용해 보이는 이 녀석도 성질머리는 아스카 못지않다는 것을. 아스카 같은 녀석이 하나 더 생기다니! 교관으로선 골치 아픈 사태였다.
첫 대련 시간은 완벽하게 망쳐졌다. 이대로 더 수업을 진행할 수 없다.
“누가 사바트를 양호실로 안내해 줘라. 그리고 둘 다 당장 따라와!”
먼저 와서 사바트의 몰골을 보고 혀를 내두르고 있던 아스카가 상쾌한 얼굴로 얼른 따라나섰다.
분풀이하고 나니 기분이 한결 좋아진 그가 헬무트에게 다가붙으며 속삭였다.
“너도 참, 한 성질 한다. 진짜 잘 다져놨는데? 한 수 배워야겠어.”
벼락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잡담하지 말고 따라와!”
아스카가 입을 삐죽거리며 따라갔다. 헬무트는 손을 쥐었다 폈다. 아주 상쾌하지는 않지만, 기분이 좀 좋아진 것 같았다.
떠나가는 그들 뒤로 검술 학부 학생들의 어수선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야, 미친. 지금 저 녀석이 사바트를 저 꼴로 만든 거야?”
“저 녀석도 장난 아닌데?”
“아스카보다 더 강한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