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88
87
헬무트
87화
바덴과 인접한 키넨 왕국 국경의 허름한 건물, 다수의 사내가 모여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얼굴은 멍투성이에 멀쩡해 보이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 앞 책상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던 중년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를 빼내느라 바덴 쪽 첩자를 잃었다.”
“죄, 죄송합니다. 지부장님.”
사내들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중년인의 이름은 안톤. 블랙 호크 키넨 왕국 지부장이었다.
귀족들에겐 자신들의 지저분한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줄 이들이 필요하다.
특히나 검가 루갈처럼 명예가 드높은 귀족 가문이면 더더욱 뒤치다꺼리해 줄 다른 손이 필요하다.
그 때문에 블랙 호크는 여러 귀족들과 꽤 끈끈한 관계를 맺어 왔다.
그들의 불법적인 활동은 귀족들의 뒷배 덕에 보장되고 있었다.
루갈에서 들어온 의뢰에 블랙 호크에서도 상당히 신경을 썼다.
그레타 아카데미 검술 학부 학생이라지만, 고작 2학년. 평민 하나 적당히 손봐 주는 의뢰다.
9명이면 많이도 동원했다. 실패할 리가 없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들이 붙잡혔다는 소리를 들은 순간, 안톤은 이마를 짚어야만 했다.
수라도 적었다면 모를까 9명이나 되는 인원을 포기할 수는 없다.
바덴은 블랙 호크가 활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학술 도시였다. 만약을 위해서 공들여 첩자를 잠입시켜 놨다.
임무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이 쓸모없는 녀석들을 빼내려고 그 첩자를 써먹게 된 안톤은 속이 쓰렸다.
안톤은 온건파였다. 성질 더러운 지부장이었다면 ‘그 쓸모없는 새끼들 당장 내다 버려!’라고 호통부터 내질렀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블랙 호크라고 해서 인력이 남아도는 건 아니다. 잔챙이들이라고 해서 쉽게 내버릴 수는 없다.
요즘 들어, 운이 나쁜지 이상하게 일이 틀어졌다.
“왜 임무에 실패했지?”
화를 추스른 그가 침착하게 물었다. 사내 중 한 명이 대표해서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것이, 그 평민 놈이 새, 생각외로 저항이 거세고 몸도 재빨라서, 아차 하는 사이 도망쳤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너희는 9명이다. 3급 용병 9명이 15살 애송이를 놓쳐?”
“녀석은 부상 당했고 다, 다시……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조력자가 나타나서 훼방을 놓는 바람에.”
조력자가 나타났다면 그럴 수 있다. 안톤은 가까스로 화를 누그러뜨렸다.
“그레타 아카데미 학생들이 너희를 잡아넣었다고 하던데. 고학년 학생들이었나?”
“아닌 것…… 같았습니다. 같은 학년 학생들 같았는데. 두 명이었습니다.”
안톤의 억양이 다시 올라갔다.
“그러면 지금, 15살 애송이들한테 당했다는 소린가?”
“아, 아닙니다! 애송이가 아니었습니다. 두 녀석 중, 한 놈의 실력이…… 절대 애송이가 아닙니다!”
“2급 용병 이상입니다! 확실합니다!”
안톤의 시선이 항변하는 사내들의 얼굴을 쭉 훑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다. 일부러 의뢰에 실패하려고 한 게 아니라면, 상대가 그 정도는 되어야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했을 것이다.
“그레타 아카데미가 아무리 인재의 보고라지만, 15살에 2급 용병에 필적하는 실력을 가진 녀석이 있다고? 그 녀석 이름이 뭐지?”
그만한 녀석이면 이름이 알려졌을 것이다. 운 나쁘게 유명한 검가의 자제에게 걸렸을지도 모른다.
표적이 된 아스카란 평민은 평판이 나쁘다지만 정의심 있는 녀석이라면 같은 아카데미 학우가 습격받는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안톤은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라고 해서 아카데미에 입학한 학생들에 관한 정보를 세세히 알고 있진 못했다.
블랙 호크가 활동할 수 없는 바덴에서 정보를 얻긴 힘드니까.
“그 녀석 이름이 뭐더라?”
“헤……? 뭐였지.”
“나 알아, 헬무트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은 안톤이 눈을 부릅떴다.
‘헬무트라고?’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 녀석 인상착의를 말해 봐라!”
안톤의 독촉에 하나둘 입을 열어 상대의 인상에 대해서 말했다. 대화를 짜 맞춘 안톤이 그대로 읊조렸다.
“검은 머리, 검은 눈. 창백한 얼굴에 귀족적인 인상. 미형의 소년. 그레타 아카데미 2학년이라고…….”
블랙 호크에 소속될 예정이었던 두 명의 2급 용병을 해치운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가 살해한 블랙 호크의 인원만 여덟이다.
어디론가 사라졌기에, 추적을 끊고 잠적했나 싶었다. 그런데 바덴에 가 있을 줄은.
안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레타 아카데미라니. 파악하기 힘든 장소를 잘도 골랐다.
그렇다면 상대는 단순한 검술 학부 2학년생이 아니었다. 홀로 2급 용병 두 명을 해치운 그 소년을 만났다면 이 녀석들이 살아 돌아온 건 천운이었다.
부하를 시켜 전투 현장의 기억을 마법으로 담아오게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영상은 흐릿했다.
대마법사를 부르지 않는 한 그 이상을 끌어낼 수는 없다고 하니, 그것이 최선이었다.
그 영상 속에서 안톤은 흐릿하게나마 헬무트란 소년의 진가를 엿봤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검의 궤적, 피가 튀고 살이 튀는 전투에서도 흔들림 없는 차가운 눈빛.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 녀석에 대한 정보는 놓칠 수 없었다.
“좋아, 너희들은 나가봐라.”
지금 중요한 건 이 녀석들 따위가 아니었다. 안톤은 사내들이 나가자마자 부하를 호출했다.
“크로모!”
“예, 지부장님!”
“헬무트라는 녀석에 대한 조사 결과는 어떻게 되었지? 알아낸 것까지만이라도 보고해 봐라.”
영상이 흐릿해져 검술을 감별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뒷조사를 통해 추적하다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블랙 호크는 이런 부분에 일가견이 있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헬무트란 놈은 페이스 용병단에서 처음 등재된 3급 용병입니다.”
“고작 3급 용병?”
“예, 정식으로 용병 길드에서 시험을 본 게 아니라 페이스 용병단에서 임의로 3급 용병 증서를 발급했다고 합니다.
헬무트는 페이스 용병단에서 타리크 용병단, 그것도 막스와 파울이 함께한 뷰탄 상회의 호송 의뢰를 맡았습니다.”
“그 의뢰에서 막스와 파울이 도망쳐서 우리 블랙 호크에 입단 요청을 한 거였지?”
“예, 그렇습니다. 엄청난 마물의 습격을 받아 거의 실패했고 의뢰인도 죽을 뻔했는데 용케 의뢰를 완수했다고 합니다. 타리크 용병단은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었고, 페이스 용병단에서는 두둑이 한몫을 챙겨갔다지요.”
안톤은 빠르게 추측했다. 저만한 실력의 녀석이 있었다면, 고난도의 의뢰라도 성공률이 확 올라갔을 것이다.
하지만 파울과 막스는 도망쳤다. 3급 용병이라고 한 사실을 미루어보아, 헬무트란 녀석의 실력을 그 둘은 몰랐던 게 틀림없다.
그러니 안톤이 그를 제거하라고 보냈을 때도 순순히 응했을 터.
“페이스 용병단에선 그 녀석을 어디서 데려온 건가? 어디서든 합류를 했을 텐데?”
“아직까지는 정보를 확보할 수 없었습니다. 알다시피 용병들은 저희를 견제하는지라. 뷰탄 상회에서도 꽤 중요한 의뢰였는지 입단속을 하더군요. 뷰탄 상회를 만나기 전, 페이스 용병단원들의 행적을 추적해보고 있습니다.”
“좋아, 되도록 자세히 알아보도록. 가 봐라.”
“예!”
고개를 숙인 크로모가 그곳을 빠져나갔다. 안톤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악운으로 엮인 상대. 그쪽도 자신이 상대하는 게 블랙 호크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해도 열다섯 살 소년이 당장 블랙 호크를 어떻게 하진 못할 터.
방법은 두 가지였다. 지금에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던가, 아니면 제거하던가. 하지만 전자도 후자도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아직 어릴 때 싹을 잘라버리는 게 좋을지도.’
하지만 상대는 영민하게도 그레타 아카데미에 몸을 담았다.
바덴에 속한 아카데미는 그가 건드릴 수 있는 영역 밖이었다. 그나마 있던 첩자도 잃었다. 새로 침투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상대가 원한을 잊지 않는 자라면 나중에 골치 아파질 테지.’
15살에 2급 용병 둘을 참살할 수 있는 녀석이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쯤 어떤 실력을 갖추게 될지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의 머릿속엔 이미 블랙 호크란 단체가 각인되어 있으리라. 아주 적대적인 의미로.
‘뒤를 캐면서……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어.’
안톤은 단호하게 입매를 굳혔다.
블랙 호크는 기사단이 아니다. 암살도 하나의 수단이다. 목숨을 빼앗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들에겐 선택지가 많았다.
“윗선에 보고를 올려야겠군.”
이미 한 번 보고를 올린 바 있었듯이 그의 선에서 처리하기엔 중대한 문제였다.
블랙 호크의 수장이 헬무트란 정체 모를 녀석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다.
***
“지금이 몇 시인데 벌써 일어나?”
헬무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아레아가 막을 걷고 눈을 비비며 물었다.
한 새벽에 들어온 데다가 또 일어난 그 때문에 아레아도 두 번이나 이르게 잠에서 깨어났다.
“난 나갈 테니 더 자.”
몇 시간 자지도 않고 바로 눈을 뜬 헬무트는 어느새 검술 학부 교복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목검을 챙겨 들며 그가 덧붙였다.
“반성문을 쓰느라 수련을 못 해서 일찍 가 보려고.”
짜증이 그득한 아레아의 눈빛이 멋들어지기로 소문난 그레타 아카데미 검술 학부 교복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헬무트를 보자 왠지 누그러졌다. 잠도 확 깼다.
아레아가 그답지 않게 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 수련을 열심히 하는 건…… 좋은 일이지.”
가끔 실감하는 건데 헬무트는 참 잘생겼다. 곧게 뻗은 콧날도, 차분함 속에 강렬함을 숨긴 눈빛도.
어딘지 위험한 인상을 단정한 교복이 누그러뜨리니 그에 대해서 설명할 때, ‘실력 있는’이라는 말보다 ‘잘생긴’이라는 수식어가 우선할 정도로.
자주는 아니었지만, 거울을 들여다보고 사는 아레아는 다른 사람의 외모에 둔감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레아도 가끔 헬무트를 볼 때면 마치, 평범한 소녀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참, 교재를 도둑맞았는데 아카데미 내에서 살 데가 있나?”
헬무트에겐 수업 시간에 같이 교재를 볼 친구가 없다. 아니, 그냥 친구가 없었다.
그러니 책도 없이 덩그러니 수업을 듣지 않으려면 교재를 사러 가야 할 텐데, 반성문을 쓰느라 서점에 갈 시간도 없었다.
아카데미 내에 서점이 있다는 건 아는데, 품절이 잦다고 들었다. 그래도 가 봐야겠지만.
“마법 학부 건물에 서점이 있어. 그보다 에단 교관님한테 가 보는 게 어때? 검술 학부 교재라면 여분을 가지고 계실 거야.”
“아아, 그래. 고마워.”
역시 아레아는 정답을 안다. 헬무트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거슬리던 사바트를 실컷 혼내 주고 나니 기분이 풀린 터였다.
굳어 버린 아레아를 두고, 헬무트는 방을 나섰다. 뒤늦게 아레아가 중얼거렸다.
“……뭐야, 저 녀석.”
새하얀 뺨에 은은한 장밋빛 홍조가 피어올라 있었다.
***
에단 교관의 수련장에 들어서려던 헬무트는 입구가 열리지 않자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왜 이러지?”
에단 교관에게서 받은 출입증을 가져다 댔는데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고장 난 건가? 혹시 어제 일을 들은 에단이 그의 특혜를 없애 버린 걸지도 몰랐다.
헬무트가 당직을 서던 아카데미 직원에게 다가가 문이 안 열린다고 말하자 그가 답했다.
“아아, 학생. 에단 교관님의 수련장을 이용하려는 거죠? 교관 전용 수련장은 오늘 오전에 전체적으로 청소 중이라, 지금은 이용할 수 없어요. 2주에 한 번 오전 시간에 청소하는데 공지를 못 봤나 봐요? 2학년 공용 수련장으로 가지 그래요?”
“공용 수련장…….”
살짝 머뭇거린 헬무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반성문까지 썼는데 시비가 또 붙으면 곤란하지만, 어차피 이 시간엔 사람도 별로 없을 거였다.
그는 시비를 피하려던 마음을 바꾸어먹었다. 시비가 또 붙으면 어떤가. 박살 내 주면 그만이지.
이미 헬무트는 고삐가 반쯤 풀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