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95
94
헬무트
94화
시안이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나한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남학생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현상이라고. 모든 관심과 애정이 아레아한테 쏠리니까 말이지.
그리고 짐작할 수는 있잖아? 나는 아레아와 같은 마법 학부니까 그가 당하는 걸 꽤 많이 봤다고.”
“뭐, 알아서 떨쳐 내겠지. 저 녀석한텐 익숙한 일 아닌가.”
“아닐걸. 잠재적으로 협정이 맺어진 모양인지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여자들은 그동안 별로 없었거든. 저거, 팔짱 끼려는 거 봐.”
“비키라고 말했어.”
제게 뻗는 손길을 뿌리쳐내며 아레아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자신의 마력이 지긋지긋했다. 경지에 올라 완전히 마력을 다스릴 수 있게 되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지만, 아직 그 경지까지 갈 길이 멀었다.
남자가 달라붙지 않는 게 어디냐 싶으면서도, 다수가 이럴 때면 뱀이 그를 중앙에 놓고 똬리를 조이는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마법을 쓸까.’
고민했던 마음은 공격 마법을 쓰자는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이런 광신적인 반응을 보이는 상대한텐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적절한 공격 마법이 여러 개 뇌리에 떠올랐다.
다소 과한 마법이라도 좋다. 본보기를 보일 겸, 죽이지 않는 선에서.
‘전격계로.’
그가 막 행동하려는 순간, 소녀들 틈새로 절묘하게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여어, 아레아. 여기서 보네?”
“어머, 무슨 짓이야!”
“무례하긴!”
“시안.”
아레아가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시안은 혼자가 아니었다. 아레아의 시선이 곧장 새까만 눈과 머리를 가진 그의 룸메이트에게로 돌아갔다.
제 입으로 도움을 청할 아레아가 아니었다. 잠깐 고민한 헬무트가 손을 내밀었다.
“늦어서 미안.”
마치 여기서 보기로 했다는 듯한 말투였다. 즉흥적이었는데 꽤 잘 고안한 것 같다.
시안이 살짝 놀란 눈으로 헬무트를 응시하더니 맞장구쳤다.
“헬무트와 여기서 보기로 했나 봐? 어쩐지 이 녀석이 여기로 와야 한다고 하더라니.”
“어서 가자.”
헬무트가 눈짓 해 보였다. 아레아는 소녀들 틈에서 몸을 빼냈다.
당황하여 그를 붙잡으려던 소녀들을 아스카가 막아서며 눈을 부라렸다.
“뭘 봐! 확 눈알을 뽑아 버릴라.”
비극적인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제지당한 한 명이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세상에! 이렇게 야만적인.”
“내가 좀 야만적인 걸로 유명하거든. 너도 한 번 물어 뜯겨 볼래?”
“아레아 님, 어떻게 저런 녀석과 어울릴 수 있어요?”
“격에 맞지 않아요!”
“저 녀석이 아레아 님의 평판을 더럽힐 거예요!”
아레아는 웃음기 하나 없는 싸늘한 얼굴로 헬무트 쪽으로 다가섰다.
아스카는 상대가 누구든 저를 향한 시비를 보아 넘기지 못했다.
“나란 녀석이 어떤 녀석인데?”
“어떤 녀석이냐니! 지금 몰라서 하는 소리야?”
“그만둬, 미나! 저 녀석 그거잖아. 검술 학부의 미…….”
“미, 뭐라고? 끝까지 말해 봐.”
아스카가 불량배처럼 히죽 웃었다. 이런 쪽에선 독보적인 그였다.
만만해 보이는 외모에도, 그의 악명을 알고 있었던 소녀들은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아스카는 바덴에서 아레아 다음가는 유명인이었다. 완벽하게 반대쪽으로 말이다.
아레아는 그렇게 헬무트 일행에 합류했다.
덩치 크고 위협적인 녀석은 없지만 혼자일 때와는 다르다.
네 명이서 뭉쳐 있으니 부담이 되는지 접근하는 이들이 없어졌다.
시선은 여전히 쏟아졌지만. 머리끝까지 일었던 짜증을 가라앉힌 아레아가 의외란 눈초리로 그들을 훑었다.
“너희들이 여긴 어쩐 일이야. 여긴 너희들 돈으로 들어갈 만한 가게가 없는데. 헬무트가 샀나?”
아스카가 인상을 팍 구겼다.
“와, 도와줬더니 말하는 거 봐라. 더럽게 재수 없네.”
“인정. 너보다 심한데?”
시안마저 고개를 끄덕거리며 호응하자 아레아가 코웃음 쳤다.
“사실이잖아? 도와달란 말 한 적 없어.”
“그럼 그녀들 쪽을 도와줬다고 해 주지. 네가 전격 마법으로 귀족 아가씨들을 지지기 전에 말이야.”
시안은 아레아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대낮부터 술을 마셨나? 냄새가 나는데.”
아레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안 온다고 하기도 했지만, 그가 오지 않은 것도 다행이었다. 왔으면 무슨 까탈을 부렸을지 몰랐다.
헬무트가 아는 아레아의 취향은 정반대였다. 칸막이가 있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디저트를 깨작거리는 거.
“좋은 곳을 갔었지.”
“그래, 네가 안 간 걸 후회할 만큼?”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꿈도 꾸지 마.”
딱 자른 아레아가 헬무트를 돌아봤다. 뭐라고 말을 하려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성격상 고맙다는 말은 아닐 테고 아마, 웬일로 자신을 도와줬냐는 그런 말을 하다가 삼킨 것 같았다.
사실 헬무트가 그렇게 주도적으로 나선 건 의외였다. 헬무트는 남의 일에 대개 상관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아레아는 헬무트를 여러 번 도와줬다. 룸메이트이기도 하니, 어쩐지 외면할 수 없었다.
헬무트는 아스카와 시안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틈을 타 슬쩍 던졌다.
“이걸로 빚은 없애 주지?”
아스카를 치료해 준 빚. 아직 아레아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걸 퉁치려는 셈이었으나, 단번에 알아들은 아레아가 코웃음 쳤다.
“어림도 없는 소리.”
뭔가 받아 낼 생각이 있긴 한 것 같다. 그것도 쉽지 않은 쪽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시안이 손짓했다.
“뭐 사려던 거 아니었어? 들어가지.”
“사지도 않을 거면서 넌 왜.”
“난 사지 않을 거니까 살 네게 붙어서 구경 좀 하게. 사지도 않을 거면서 구경만 하긴 좀 그렇잖아. 여기 상인들 눈치가 귀신같다고.”
“좋을 대로 해.”
어쩐지 합류하게 된 아레아와 그들은 함께 상점가를 쏘다녔다.
아레아는 생각 외로 노트와 필기구 몇 가지만을 사고 지갑을 닫았다.
아스카가 비꼬았다.
“하도 있는 체하길래 돈 펑펑 쓰고 다닐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네. 좀 쪼잔한가 봐.”
“아무 데나 돈을 쓰는 건 너처럼 생각 없는 녀석이나 할 짓이지.”
“이게, 그런데 자꾸!”
“싸우잔 거면 사양은 안 하지.”
둘의 시선이 날카롭게 맞부딪혔다. 마법사와 검사와의 싸움이라. 제법 흥미가 일었다.
아레아는 마법 학부 2학년 수석, 아스카는 검술 학부 2학년에서 헬무트 다음으로 강한 녀석이다. 어느 쪽이 이길지 궁금했다.
그래도 이성이 있는 아레아와는 달리 아스카가 정도를 모른다는 게 문제긴 했지만, 그건 적절한 선에서 제지할 자신이 있다.
그러나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만들 둬. 애들처럼 거리에서 무슨 짓이야? 너희 둘이 여기서 치고받으며 기물 파손하면 사람들이 그레타 아카데미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시안이 핀잔을 주자 전투적인 분위기가 좀 누그러졌다.
아스카야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지만, 적어도 우등생인 아레아는 신경 썼다.
시안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 나 머리 아파. 아직 취기가 남았나 봐.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여기 맛있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는데.”
그리고 시안은 자신들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아레아가 아이스크림을 사게 만들었다.
열두 가지 맛 젤라또를 만들어서 판매하는 그 가게는 무척 비쌌다.
확실히 남몰래 돈을 꿍쳐둔 헬무트가 아닌 시안이나 아스카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심히 부담이 될 만큼.
세 가지 맛을 꾹꾹 눌러 담은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면서 시안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승자는 시안이었다.
“왠지 주머니가 털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착각이겠지. 천하의 아레아에게 그런 일이 있으려고.”
“아이스크림 맛있다.”
아레아는 생각만큼 치사하지 않았다. 아스카한테도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아스카는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그에게 드문 호사를 누리면서 아레아에 대한 호감을 요만큼 키웠다.
‘재수 없지만 괜찮은 구석도 있는 녀석.’
그 괜찮은 구석은 전적으로 금전적인 부문에 점수를 뒀다. 시안이 웃으며 말했다.
“난 적어도 아레아 너에게 있어서 이 상황의 이점을 알 것 같은데.”
“뭔데?”
“여럿이 다니니까, 붙들리는 일이 없잖아. 수에서 압도하지 못하니까 말이지.”
게다가 그중 한 명은 검술 학부의 미친개다. 머뭇거리게 될 수밖에.
아레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그건.”
어쨌거나 이점은 이점이다. 아레아는 이제껏 헬무트를 제외한 누군가와 함께 바덴의 거리를 쏘다닌 적이 없었다. 쏟아지는 시선들은 그 때문일까.
이 네 명이 하나의 무리로 묶이게 되다니.
헬무트야 별생각 없고, 시안의 뻔한 의도일 뿐이란 걸 알면서도 아레아는 으스스해졌다.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되지.’
편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지난 1년간 잘 유지해 온 벽이었다.
경계심을 늦추면 안 됐다. 비밀이 드러난 순간 박살 날 관계였다.
‘무엇보다 저 아스카라는 녀석은 안 돼.’
아레아는 사람을 가렸다. 그것도 무척.
아스카는 특히 허용 범주 밖의 인간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럴 것이다.
“이만 기숙사로 돌아갈까?”
시안이 먼저 제의했다. 그는 목적을 모두 달성한 터였다. 아스카와 아레아를 오래 붙여놔 봤자 싸움만 날 거란 계산도 있었다.
“그러지.”
헬무트도 동의했다. 그는 최근에 깨달음을 얻었다.
아침 일찍부터 수련을 마쳐 두면 저녁 시간이 불의의 사태로 사라져도, 그는 그날의 수련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바깥에 돌아다닐 걸 생각해서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수련을 한 터였다.
저녁에 이어서 하면 좋을 것이다. 주중엔 여러모로 일이 많았으니까.
단지 한 가지가 걸렸다. 헬무트는 이제는 익숙해진 일정을 생각했다.
‘내일 쿠드로 저택에 가 볼까.’
블랙 호크가 자신을 추적한 방식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가 블랙 호크와 마찰을 빚었고, 이번 일로 블랙 호크가 그가 어디 있는지 알아차렸음을 말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그쪽 인원을 살해했단 것까지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잘 들어가!”
기숙사에 도착해서 경쾌한 목소리를 남긴 시안이 먼저 사라지고 아스카도 손을 흔들며 등을 보였다.
헬무트는 아레아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아레아는 책상 위에 사 온 깃펜과 새 노트를 올려두었다. 목검을 쥐고 바로 수련장으로 이동하려던 헬무트는 돌연 멈춰섰다.
거의 충동적으로, 그 말이 나왔다.
“혹시 내일, 나와 함께 쿠드로 저택을 방문하지 않겠어?”
수정처럼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가 지그시 그를 응시한다. 눈동자는 이내 가늘어진 눈매 사이로 반쯤 사라졌다.
“설마 이번에도 그 녀석들을 끼워 넣을 건 아니겠지?”
“네게만 말한 거야.”
나가다가 마주치면 시안이 은근슬쩍 끼려 할지도 모르겠단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듯한 시안과 마주칠 확률이 무척 높다는 말도.
“나는 왜?”
“에단이 내가 널 소개하길 바랄 것 같아서.”
바덴에 오기 전부터 시작된 인연이었다. 과외에 룸메이트까지 거치면서 에단은 헬무트를 통해서 아레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한 번쯤 인사하길 바랄 터였다.
그건 사실일 테지만,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
하지만 그건 헬무트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었다.
아레아가 잠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승낙의 답을 들은 헬무트는 기숙사 방을 나섰다.
이상하게 심장 부근이 간지러웠다. 이렇게 간헐적으로 증상이 나타난다면, 병이라고 보기 어렵다.
“왜 이러지.”
곰곰이 생각해 보던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거, 아레아하고 이야기한 이후에 일어나는 증상인 것 같은데.’
하지만 왜? 이유를 생각하던 헬무트는 그럴듯한 결론을 이끌어 냈다.
아레아에게는 다른 녀석들에게 없는 게 한 가지 있었다. 사람을 홀리는 그의 특수한 마력.
그것이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건지도 몰랐다. 여자한테 더욱 효능이 강력하다고 했지만, 남자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니까.
‘이건, 조짐일지도.’
아레아의 추종자들처럼 되는 건 사절이었다. 헬무트는 경각심을 느꼈다.
‘요즘 수련을 게을리해서 정신력이 흐려진 건가.’
그는 앞으론 좀 더 수련 시간을 늘려야겠다고 다짐했다. 핀트가 엇나간 다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