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96
95
헬무트
95화
7장 중간고사
에런과 그의 두 친구는 정학을 마치고 돌아왔으나 몸을 사렸고, 사바트와 제롬은 아카데미를 떠났다.
편입하든지 해서 다른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그레타 아카데미에 발을 붙일 일은 없을 터였다.
아스카가 헬무트를 따라다니는 건 여전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구제 불능의 사고뭉치가 아니었다.
헬무트는 본의 아니게 아스카의 목줄을 잡았고, 목줄이 잡힌 아스카는 야생의 들개에서 길든 개가 된 것처럼 얌전해졌다.
욕설을 섞지 않으면 말을 하지 못하던 버릇도 좋아졌고, 발끈하는 성질도 죽였다. 거기에는 시안의 덕도 있었을 것이다.
휴일이면 세 사람이 함께 돌아다니는 일도 잦아졌다. 단지 아레아만큼은 끝끝내 합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쨌든 묶여서 사총사 정도로 취급받고 있었다. 본인이 알면 몹시 불쾌해할 테지만 말이다.
헬무트도 검술 학부에 꽤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반성문을 쓸 만한 사건도 없었다. 더 이상 헬무트는 검술 학부에서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도는 존재가 아니었다.
호감을 느낄 만한 외형에 검에 대한 진지함과 성실함. 평민이란 신분을 덮을 만한 실력.
검술 학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실력이다.
게다가 그는 아스카를 바꿔 놨다. 미친개의 위협에 시달리던 검술 학부 2학년생들이 헬무트를 좋게 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물론 헬무트의 검술 학부 생활에 종종 이를 드러내는 아스카가 장애 요인이 되는 건 여전했다.
하지만 그의 덕에 헬무트는 비교 우위로 ‘아스카와는 달리 생각보다 성격이 원만한 녀석’ 정도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그 아스카마저도 검술 학부 녀석들과 대화란 걸 하고 있으니 장족의 발전이었다.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래로 그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시험, 중간고사가 가까워진 즈음에야 헬무트는 불현듯 깨달았다.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아카데미에서의 헬무트의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수련에 좀 더 치중하기로 한 이후, 헬무트는 휴일을 제외한 거의 모든 때에 수련장에 틀어박혀 있었다.
검술 학부 학우들이 공용 수련장으로 나와서 대련하자며 꼬드겼지만, 응하지 않았다.
알란 교관이 수업 외의 시간에서 대련하는 것까지 터치하지는 않았지만, 대련 자체가 별로 헬무트에게 도움이 안 됐다.
대신해서 아스카가 대련에 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검술 학부 2학년생들의 실력 향상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
‘그것도 검이라고 쥔 거야? 농담 아니고?’
‘궁금한 게 있는데, 아카데미에 어떻게 들어왔어? 진지하게, 내가 교관이라면 돈을 줘도 넌 안 뽑아 주겠다.’
‘너 부상 있는 거 맞지? 다리가 부러진 게 아니면 어떻게 그렇게 느릴 수 있냐?’
패자에게 가차 없는 아스카의 무시와 독설을 겪으면 이를 갈고 수련에 열중하게 되는 것이다.
대련이란 명목으로 학우들을 괴롭히는데 맛 들였는지, 아스카는 헬무트에게 대련하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가 질 걸 알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여어!”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헬무트에게 시안이 손을 흔들었다.
아레아는 헬무트보다 늦게 들어올 때가 많은 반면, 그는 항상 헬무트보다 빨리 기숙사에 돌아와 있었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 알 수 없다. 시안은 이상한 데에서 신비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정령 마법사라 그런가.’
정령이란 걸 소환할 수 있다는 것 빼곤 여전히 그게 뭔지 모르겠다. 시안이 넌지시 물었다.
“곧 중간고사지?”
“그래.”
“첫 시험이잖아, 자신 있어?”
“자신 없을 이유가 있나?”
점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실기 시험이야 헬무트가 1등을 맡아놨다.
필기는 편입 시험에 비하자면 어려울 것 없는 수준으로 복습을 철저히 하고 있다.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얄미운 자식. 아, 난 걱정이야. 이번 학기에는 너무 놀아서.”
누구하고나 친하지만, 아무하고도 친하지 않던 시안이었다.
그래서 쏘다닐 일도 별로 없었는데 눈앞의 헬무트란 녀석에게 흥미를 붙이다 보니, 이번 학기 내내 팡팡 놀았다.
시안은 자신이 별로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수석이야 아레아가 맡아놨고, 자신은 차석 자리만 차지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 차석 자리를 지키는 것이 이번엔 어려울 것 같다.
수재들만 모였다는 그레타 아카데미다. 검술 학부, 마법 학부, 학술부 중 마법 학부의 명성이 가장 높았다. 학장도 마법사니까.
다른 학생들이 연구실이나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는 것이 일상인데, 시안은 이번 학기 들어서 도서관에 가 본 적도 거의 없었다.
어둠의 정령도 확보했겠다 정령 마법사라는 특성상 실기 시험의 점수는 높겠지만, 필기가 문제다.
헬무트가 날카롭게 꼬집었다.
“걱정하는 것치곤 지금도 놀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나오기야? 우린 학부가 다른 데다가 교양 과목도 안 겹쳐서 이런 때밖에 볼 일이 없잖아. 까먹지 않게 내 존재를 인지시켜 줘야지.”
“내 기억력은 그렇게 나쁘지 않아. 성적이 걱정이면 공부를 해야지.”
헬무트는 차갑도록 원론적으로 대꾸했다. 따뜻한 위로나 공감은 없었다.
“왜 너도 놀았는데 나만 성적에 대한 압박을 느끼는 거지? 이거 좀 억울한데.”
“넌 휴일도 논 거고, 난 휴일에만 논 거고.”
우박처럼 직격하는 진실에 시안이 결국 얼굴을 실룩거리며 투덜댔다.
“거참 너무하네. 장래 희망이 교관이야?”
“이만 간다.”
헬무트는 시안을 두고 등을 돌렸다. 반쯤은 엄살이란 걸 알고 있었다. 헬무트가 아는 한 시안은 생각보다 똑똑한 녀석이었으니까.
아마 아스카가 오면 또 하소연하는 척 붙잡고 늘어질 것이다.
“왔어?”
아레아가 눈썹을 살짝 치켜들고 인사를 건넸다.
아스카가 개라면, 아레아는 고양이다. 헬무트는 그동안 미묘하게 거리가 좁혀졌단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아주 조금, 그런 것뿐이다.
그들 사이엔 벽이 있었다. 헬무트도 아레아도 벽을 허물려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래선 안 되는 이유도 있었고. 아레아와 헬무트, 둘 모두에게 그랬다.
대마법사 수준은 아니지만, 아레아는 뛰어난 마법사다. 언젠가 대마법사라는 명칭을 달게 될 만큼.
대마법사 안티올은 헬무트에게 어둠의 싹이 있단 걸 간파했다. 그렇다면 아레아도 언젠가 눈치챌지 모른다.
그가 그것을 눈치챌 수 있게 되기 전에, 헬무트는 아레아와 작별해야 할 터였다.
룸메이트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지워나갔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된 건 놀라운 우연의 산물이었다.
아레아는 그것을 제 마법사의 운명이라 여겼지만, 헬무트는 그것의 이름을 몰랐다.
아레아가 헬무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곧 중간고사인데 검술 학부 수석을 차지할 자신은 있어?”
질문의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 시험을 잘 볼 자신이 있느냐는 게 아니라 수석을 차지할 수 있냐고 묻다니. 그게 당연한 것처럼.
물론 아레아에게는 당연했다. 그는 이번에도 마법 학부 수석을 차지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실기에서는.”
“필기에선 자신 없다는 소리야?”
“편입 시험에서도 만점은 못 받았잖아.”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란 뜻이었다. 아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필기가 더 쉽지 않나? 실기는, 실수할 수도 있잖아.”
행동으로 하는 건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아는 건 틀릴 수 없다. 그것이 아레아의 논리였다.
그 논리의 전제는 시험 문제의 답을 그가 알고 있다는 거였다.
시안과 달리 아레아는 중간고사가 다가올수록 여유만만해 보였다.
시안도 아레아에게 시험공부는 잘되어 가느냐는 말 따위는 꺼내지도 않았다.
분명히 ‘시험공부? 난 굳이 그런 걸 할 필요 없어. 이미 다 머릿속에 있으니까.’ 따위의 재수 없는 대답이 돌아올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레아가 매일같이 연구실이나 기숙사에 틀어박혀 있는 이유는 시험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그건 아마 헬무트가 수련장에 틀어박혀 있는 것과 비슷한 이유로, 그저 그것이 일상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굳이 시험을 앞두고 일상에 변주를 줄 필요가 없다.
“넌 필기시험을 볼 만한 수업도 몇 개 안 듣잖아.”
검술 학부 2학년까지 그레타 아카데미의 교과 과정에선 기초 훈련에 중점을 둔다.
기본기를 다지고 몸을 단련하는 것 말이다.
그 때문에 이론 과목은 ‘검술의 역사’와 ‘기초 훈련이론’, 두 가지. 거기에 교양 과목이 2개다.
편입생이기에 교양과목을 선택하는 데 불이익이 있었다.
그레타 아카데미에선 성적순으로 교양 과목의 수강 선택권을 줬다.
성적이 높은 순서대로 원하는 과목을 수강할 선택권을 먼저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편입 시험을 통해 새로이 입학한 헬무트는 가장 후순위 선택권을 가졌다.
인원이 찬 수업은 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헬무트가 선택한 교양 과목 두 가지 중 하나는 ‘대륙의 역사’였다.
편입 시험을 본 내용과 어느 정도 일치했기에 별 부담이 없다. 수업이 유독 지루하다는 것이 문제일 뿐.
헬무트는 노년의 교수가 느릿하고 단조로운 말투로 강의하는 역사 수업을 들으며 마법에 걸린 것처럼 책상에 코를 박을 뻔했다.
그는 아레아가 좋은 선생이었다는 것을 절실히 실감했다.
다른 하나는 그래도 그만큼 지루하진 않았다.
‘마법의 이해’라는 이름의 수업, 내용만큼은 흥미로웠지만, 검술 학부 학생들이 기피하는 교과목이라고 들었다.
사실 다른 학부 학생들도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필연적으로 성적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는 과목이기 때문에.
아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의 이해는 아마 마법사들이 많이 들을 텐데. 이름부터가 마법사들한테 유리한 과목이잖아. 그 때문에 경쟁이 치열할 걸 예상해서 피하는 녀석들도 있지만, 그래도 자기한테 유리할 거라고 생각하는 녀석들도 있지.
일단 그 수업 교수님이 굉장히 평판이 좋아서 수업부터가 들을만해.”
어쩐지 마법사들이 수업에 많은 것 같다고 느꼈다.
아레아와의 친분 때문에 처음엔 말을 걸어오는 이들이 꽤 있었지만, 헬무트가 싸늘하게 무시하자 그것도 곧 잦아들었다.
교양 수업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헬무트는 굳이 호기심으로 접근하는 타 학부 학생들과 어울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검술 학부 학생들을 상대해 주는 건, 어쨌든 아카데미 생활에 충실하기 위함이었다.
딱히 그가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니까.
“그 수업…… 공부는 해 뒀지만, 시험이야 적당히 보면 되지 않나?”
“완벽하게 답지를 쓸 생각하지 않으면 상위권도 못될걸. 적당히 봤다간 중간도 힘들 거야. 주관식 논술 시험이잖아.”
등급으로 나눠서 점수를 일정하게 매기는 게 아니라 세부 항목별로 평가 기준을 놓고 섬세하게 점수를 매기는 경우도 있다.
교수가 의욕적인 경우에 그랬는데, ‘마법의 이해’ 수업을 가르치는 교수는 아주 의욕적이었다.
초과 수업은 해도 시간 미달은 없을 정도로.
“교양 수업은 전체 점수에서 비중이 낮아.”
“하지만 검술 학부 실기는 토너먼트식으로 순위를 정하는 게 아니잖아. 단계별로 점수를 매기지. 그러니까 만약 네가 실기 전 항목에서 1등급이었다고 한들, 다른 녀석도 그런 녀석이 있다면 필기에서 순위가 갈리겠지.”
“그건 실기를 잘 본다고 해서 수석이 될 수 없다는 소리로군.”
“맞아. 그리고 그건 다시 말해서, 네가 아스카보다 성적이 낮을 수 있다는 소리지.”
아스카는 작년에 네 차례 있었던 실기 시험에서 연속으로 전 항목에서 최고등급을 받았다.
정학을 받아 점수가 깎였고 그 때문에 수업을 못 들어가서 필기도 망하다시피 하여 불이익을 본 거지, 종합 성적도 5등이었다.
헬무트의 눈빛이 변했다. 약간 위기감이 일었다.
‘그건, 좀 용납이 안 되는데.’
아스카한테 진다는 건 상상만 해도, 엄청나게 싫은 기분이었다.
헬무트의 반응을 눈치챈 아레아가 즐거운 듯이 말했다.
“아마, 그렇게 되면 그 녀석의 태도가 바뀔지도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