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mut: The forsaken RAW novel - Chapter 99
98
헬무트
98화
“그게…… 패배라는 단어씩이나 나올 일인가.”
시안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성적에서 좀 밀린다고 패배라니 단어가 좀 너무 심한 게 아닌가 한다.
“그래, 넌 익숙해서 별로 감흥이 없을 테지만.”
아레아가 고개를 비딱하게 들고 비꼬았다. ‘이 패배자야!’ 라는 환청이 들렸다.
“너무하잖아? 이래 봬도 차석인데 패배자라니. 그럼 내 아래 녀석들은 뭔데. 그레타 아카데미가 무슨 패배자 집단인가.”
시안이 투덜거렸다. 아레아는 그의 말을 싹 무시하고 헬무트를 쳐다봤다.
“중간고사까지 2주 남았으니 휴일에 놀러 다닐 생각은 접어둬.”
특훈이라고 외치는 듯이 의욕에 불타는 눈빛이다. 혹시 정말로 아스카한테 졌다간 사람취급도 안 할 것 같다.
시안이 턱을 괴면서 권유했다.
“차라리 내기를 하는 게 어때.”
“무슨 내기?”
“헬무트가 아스카한테 지면 아레아 네가 운동장 100바퀴를 돈다든가? 물론 마법을 안 쓰고 말이지.”
“왜 헬무트가 아니라 내가?”
“헬무트가 이기길 바라는 건 너니까.”
“그럼 헬무트가 아스카한테 이기면?”
“아스카가 운동장을 100바퀴 도는 걸로?”
“왜 내가 그런 내기를 해?”
아스카가 기가 차다는 듯이 반응했다.
“자신 없어?”
“그런 거 도발해 본댔자…… 내가 그렇게 단순한 줄 알아? 내기 같은 거, 하려면 네가 해.”
“나? 나더러 너한테 내 운명을 걸라고?”
시안이 호들갑스럽게 놀란 시늉을 했다.
“시안, 너 진짜 죽을래?”
아스카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위험신호였다.
시안이 뒤로 엉덩이를 빼며 손을 휘저었다.
“워워, 진정해. 농담이었어. 아무렴 걸 수 있지. 그래, 운동장 100바퀴.”
시안은 엉겁결에 내뱉고 나서 후회했다.
아무리 헬무트의 답지가 개판이어도 아스카가 믿을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아스카가 안면을 실룩거리며 쳐든 주먹을 내렸다. 아직까지 그가 시안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은 없었다.
덩치 큰 검술 학부 녀석들과는 달리 아무리 깐죽거린다지만 호리호리한 시안을 때리는 건 망설여지는 일이다.
마법 학부 2학년 차석인 시안이 사실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겉보기에는.
시안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 분명해진 게 있어. 이대로 있다간 우리 모두 시험이 망하고 말 거란 거야.”
헬무트도 동의했다. 참 기회만 되면 나불거리기 바쁘다. 시안이건 아스카건.
‘쓸모는 무슨.’
이쯤 되면 그냥 방해꾼이었다.
“그건 너희들 얘기겠지. 난 아니야.”
아레아는 얄밉게도 부정했다. 시험공부는 평소에 하는 거란 전교 1등 다운 사고방식에 충실한 그였다.
그는 앞으로 중간고사까지 2주간 팽팽 놀아도 수석을 차지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과외 같은 걸 할 여력이 있는 것이다.
“어쨌든 좋아, 헬무트가 아스카한테 지면 내가 운동장 100바퀴를 돌지. 이기면 시안 네가 운동장 100바퀴를 도는 거다.”
시안은 죽상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곧 덧붙였다.
“잠깐, 헬무트도 아스카도 아닌 다른 녀석이 1등을 하면 어떡하지? 둘 다 시험을 망칠 수 있잖아.”
“그때는 둘 다 돌아야겠지.”
아레아의 단호한 반응에선 내가 가르치는 한 시험을 망칠 리 없다는 과외 선생의 자존심이 느껴졌다.
‘자기 시험도 아닌데 참 쓸데없는데 자존심을 거네.’
시안이 생각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헬무트가 몸이 안 좋아서 시험 보다가 쓰러질 수도 있는데, 뭘 믿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타인에게 결과가 달린 선택을 하는 건 아레아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그가 아무 녀석에게나 그러지는 않을 터. 과외를 해 준답시고 나선 상대도 헬무트가 처음이다.
누구와도 엮이지 않던 녀석인데, 이상하게 헬무트와는 엮이는데 별로 거리낌이 없다. 시안은 의심을 품었다.
‘헬무트, 저 녀석한테 내가 모르는 뭐가 있나? 수상하단 말이지.’
헬무트는 밝혀진 것 외에 뭔가 있는 대단한 녀석일지도 몰랐다.
맨날 거울로 제 얼굴을 볼 아레아가 잘생겼단 이유로 헬무트를 특별 대우하는 건 아닐 테니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시안은 비극적인 기분이 되었다.
‘운동장 100바퀴라니…….’
왠지, 벌써 피할 수 없는 미래가 밀려오는 기분이 든다.
시안은 운동장 2바퀴만 돌아도 헉헉대는 평범한 마법 학부 학생이었다.
‘분할이 안 된다고는 안 했지?’
하루에 1바퀴씩 100일 동안 하는 거면 괜찮을 것 같다.
시안은 벌써 내기에서 질 것을 가정하고 덜 괴로울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나 내기에서 무조건 이겨야겠다고 마음먹은 아레아가 헬무트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승리에 대한 그의 집착은 수석에 대한 집착과 맞먹었다.
“내가 운동장 100바퀴를 돌 일 없을 거라 믿겠어!”
불이 붙은 눈빛이었다. 압박감을 느낀 헬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레아에게 그런 꼴을 당하게 했다간 무척 피곤해질 것이다. 아레아는 제쳐 놓고 서라도 그의 추종자들한테.
‘감히 아레아 님이 운동장을 돌게 하다니!’
바덴을 편안히 돌아다닐 수나 있을까.
그러나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았다. 헬무트는 처음엔 꽤 막막하게 느껴졌던 편입 시험도 통과했으니까.
시안이 아스카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스카, 나도 내가 운동장 100바퀴를 돌 일 없을 거라고 믿어도 되겠지?”
그 질문에 깃든 불신에 아스카가 콧방귀를 꼈다.
“갑자기 네가 땀 뻘뻘 흘리며 운동장 도는 꼴을 보고 싶어지는데.”
“너무한 거 아니야?”
투닥거리는 그들을 향해 아레아가 냉담하게 일침을 놨다.
“너희 둘, 시끄러워. 공부하던가 나가던가.”
이대로면 쫓아내도 할 말이 없다. 둘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넷은 밤늦게까지 학습실에서 자리를 지켰다.
꽤 오래 조용한 시간이 이어졌다. 차석의 자리도 위태로운 시안이나 아레아, 헬무트야 그렇다 쳐도, 아스카는 온몸을 꼬면서도 이상하게 자러 갈 생각을 안 했다.
자정이 지날 무렵 아스카가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아아, 배고파! 너희들 야식 안 먹을래?”
“나도 배고파. 공부는 잘되네. 운동장을 돌아야겠지만, 차석은 문제없을 것 같군. 역시 나도 아직 죽진 않았어.”
시안은 애매한 미소를 띤 채 아레아와 헬무트 쪽을 쳐다봤다.
헬무트는 두 번째 논술 시험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아예 아레아가 논술 답안 작성법부터 강의했기에 전보다 좀 나아진 시작이었다.
초반 단계에선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한숨이 푹푹 나올지라도 헬무트의 학습 능력은 남달랐다.
기본은 없는데 일단 기본을 배우면 그 후로부턴 쭉쭉 날아간다.
아스카가 인상을 썼다.
“나도 이상하게 공부가 잘되는데. 왠지, 니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반강제로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는 느낌이야.”
“친구를 잘 사귄 거지.”
아레아가 코웃음 쳤다.
“내가 집중력을 상승시키는 방향제를 책상 아래 둬서 그래. 둔해서 니들이 모른 거지.”
집중력을 돋우는, 거슬리지 않을 만큼 약한 마법 효과가 있는 향.
여기도 아카데미 내부다 보니, 대기가 마력이니 비스니 어지럽게 뒤얽혀 있어서 눈치채지 못한 거다.
“별걸 다 한다.”
“역시 마법학부 수석, 아레아답네.”
시안이 아부를 떨었다. 아스카와는 달리 그는 아레아한텐 비위를 열심히도 맞췄다.
아스카는 까칠할 뿐이지만, 아레아는 까칠한 데다가 예민하고 뒤끝도 길다.
‘이렇게 까다롭고 어려운 녀석은 처음이야.’
시안에게도 아레아와 친해지는 건 크나큰 도전이었다. 중간에 지쳐서 포기했다가 헬무트를 계기로 다시 도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스카는 별생각 없었다.
“그거 팔면 부자 되겠다.”
“난 이미 부자거든.”
“그래서 다들 야식은? 먹을 거야?”
“나 사실 요새 배가 좀 나오고 있어.”
시안이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공부도 운동도 둘 다 손 놓고 있었기에 에너지 소모량이 적은 데다가 휴일이면 쿠드로 저택에 가거나 바덴을 쏘아 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있는 대로 주워 먹는다.
매일같이 검술 학부 수업을 들으며 훈련하는 헬무트나 아스카와는 다른 입장이었다.
아레아가 한심하다는 듯이 비아냥거렸다.
“걱정하지 마. 운동장을 100바퀴 돌면 금세 빠질 테니까.”
“그건 야식 권장? 사 줄 거야?”
“동의도 없이 내가 너희 이름을 써서 학습실을 빌린 건 사실이니까.”
아레아에게도 계산이 있었다. 배가 부르면 졸릴 것이고, 이 근성 없는 두 명도 금방 들어가 버릴 거다.
떠들기 시작한 것도 파투를 내고 다 같이 놀자는 속셈인 게 보였다.
‘대체 왜 이런 녀석들과 어울리는 거지.’
그게 헬무트한테 품은 가장 큰 불만이었으나 아레아가 사람을 거부한다고 헬무트 또한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딱히 다른 녀석들이 이 둘보다 낫지도 않다.
“그럼 요 앞에 가게에서 야식이나 사 올까. 그, 문어를 넣은 동그란 빵 같은 거 인기가 많던데.”
“너희 둘이나 먹고 와. 배가 차면 집중력이 흐려지니까. 음식 냄새 풍길 수 있으니 사오지 말고.”
시안의 권유를 아레아는 칼같이 잘랐다.
그 말은 즉 헬무트도 아레아와 함께 굶주린 채 학습실에 콕 박혀서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헬무트는 야식이 먹고 싶었다. 먹는 즐거움은 그가 인간 세상에 나와서 깨달은 감정이었다. 여럿과 함께 군것질하는 재미도 알았다.
“그래? 그럼 하는 수 없지.”
시안과 아스카는 아레아가 던져 주는 돈을 받아들고 희희낙락하며 사라져버렸다.
헬무트는 잠시 아레아를 빤히 쳐다봤다.
“좀 굶어도 안 죽어. 오늘은 이 문제까지 풀어 봐야 하니까 3시 안에 끝내고 자는 걸 목표로 하지.”
헬무트는 그날 어떤 표현이 가져다주는 느낌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독하다’라는 표현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시안과 아스카는 학습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실컷 먹고 자러 간 모양이다.
헬무트는 아레아와 새벽 3시까지 학습실을 지켜야만 했다.
기숙사 방에서의 이상한 기분은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학습실에서의 공부는 매일같이 이어졌다. 헬무트가 답지를 작성할 시간에 아레아는 제 시험공부를 했다.
아스카와 시안은 매일 자정이면 신나서 자리를 떴다. 심야 공부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헬무트에게도 나쁜 시간은 아니었다. 그동안 아카데미에서의 느슨한 생활이 부족하게 느껴지던 터였으니까.
‘시험이라는 걸 앞두니 아카데미 분위기가 좀 변하는데.’
긴장된 공기. 굳은 표정. 잡담을 나누는 시간은 줄었고, 검술 학부 녀석들도 책을 들여다봤다.
결계를 빠져나온다는 운명을 건 시험을 앞두고 4년 내내 빠듯하게 달려왔던 헬무트에겐 어느 한순간만 그렇게 된다는 건 낯설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동안 인간들은 다 느긋하게 사는 줄 알았는데.’
게으르다거나 나태하다고 욕할 정돈 아니었지만, 헬무트 눈에 차진 않았다.
다들 베짱이처럼 느긋하게도 산다. 잠도 많이 자고, 교류할 것 다 하면서.
명문이라는 이 그레타 아카데미에서도 헬무트와 같은 일정을 소화하는 녀석은 지극히 드물었다.
헬무트가 인정할 만한 상대는 아레아 정도밖에 없었다.
그레타 아카데미는 명문이다. 그 말은 곧, 좋은 성적을 내려는 학생들이 잔뜩 있는 곳이란 뜻이다.
성적이 나빠도 먹고 사는데 지장 없는 귀족들이 대다수였지만, 애초에 놀고먹을 귀족이면 이 먼 바덴에서, 불편한 기숙사 생활을 감수하며 아카데미를 다닐 리 없다.
야망이든 가문의 명예든, 평민이면 출세에 대한 욕심이든 마음속의 동기가 그들을 치열하게 경쟁하게 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지.’
헬무트는 만족했다. 그는 아카데미 졸업할 때까지 놀고먹으려고 여기 들어온 게 아니니까.
아무리 인간 세상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고 쳐도, 헬무트는 치열한 환경에 놓이는 쪽을 선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