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
제1화. 어떤 용사의 죽음
적재적소(適材適所).
알맞은 인재를 알맞은 자리에 쓴다.
자고로 사람 중에 이유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으며, 저마다 마땅히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
그 역할의 가치가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달라서 문제인 거지.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
난 그곳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무의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하지만 여기선 아니었다.
“어서오시오, 이 세계에서 온 용사여! 부디 혼란에 빠진 우리 레지에타 대륙을 구해주시오!”
용사.
사전적 의미론 매우 용맹스러운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내 이름은 차시혁.
마지막 기억은 등교를 위해 집 근처 역으로 향하던 도중, 난데없이 발밑에 생긴 빛에 사로잡혀 정신을 잃었던 것뿐.
정신을 차려보니 한 번도 와본 적 없던 낯선 공간에서 정체 모를 4명의 노인과 마주하고 있었다.
노인들은 자신들을 현자라고 소개했으며, 날 부른 이유를 설명했다.
바로 ‘레지에타’라는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한 용사로서 나를 소환했다는 것.
그들은 내가 이 세계에 없어선 안 될 존재라며, 내 필요성을 절실히 설명했다.
내가 필요한 세계라.
어차피 나란 놈은 현생을 계속 살아봤자, 아무 존재감 없이 무의미하게 사라질 운명이었다.
대한민국 아니, 지구는 나를 원하지 않아.
하지만 이 세계는 나를 원한다네?
그럼 어째야겠어?
나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바로 현자들의 요구를 받아주었다.
용사로서 내가 수행해야 할 의무는 간단했다.
레지에타를 침공한 마계의 절대자 마왕을 처단하는 것.
결과부터 말하자면 성공했다.
물론 그 과정이 험난하다 못해 엄청 지랄 맞았지.
길게 설명할 것도 없었다.
처음엔 마왕의 압도적인 힘에 잠시 좌절했지만, 나를 믿어주는 동료들과 사람들의 염원을 받아 최후엔 마왕을 무찌를 수 있었다……
라는 매우 진부하면서도 해피한 결과로 이어졌으니.
“훌륭했다 용사여! 나 마왕 벨시페르와의 싸움에서 승리했구나! 정말로 좋은 승부였다.”
그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마왕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아무 미련이나, 아쉬움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만족감에 흠뻑 젖어있던 얼굴.
그렇게 난 마왕을 죽이고, 마왕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되었다.
소환의 목적을 달성한 내겐 바로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다.
본래 왔던 세계로 떠날 것인가?
아님, 현재의 세계에 남을 것인가?
난 당연히 잔류를 선택했다.
어차피 저쪽 세계는 내가 없다고 해서 세상이 멸망하거나 하진 않아.
반면 이곳은 내가 용사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과 혜택이 기다리고 있어.
게다가 나란 존재가 앞으로도 더 필요할지도 모르잖아?
나로선 안 남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난 레지에타에 남아 아리따운 왕국의 공주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았으며, 용사로서 추앙받는 삶을 이어가게 되었다.
……
……
…… 라고 끝났으면,
내가 지금껏 이 상념을 읊진 않았겠지?
그렇다.
난 지금 아주 비참하면서도 역겨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지옥에나 떨어져 용사 차시혁!!”
“뭐해? 저런 악랄한 자식을 당장 죽이지 않고!”
“넌 우리 레지에타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야!”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저주를 퍼붓듯 섬뜩하게 들리는 저 말들은 전부 나를 향한 것들이다.
아니, 딴 건 다 그렇다 치겠는데, 뭐?
내가 레지에타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줄까?
지금 나에게 욕과 돌을 던지고 있는 저 미개한 인간들,
전부 나한테 목숨 한 번씩은 빚진 일종의 채무자들이다.
내가 없었으면 진작 마왕군에게 몰살당해 이미 망자의 길을 떠돌고 있을 놈들이란 말이다.
이 세계에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라며 떠받들 땐 언제고, 이제 와선 없어져야 한다고 외치는 꼴이라니.
난 저런 것들 지키겠답시고 그 가혹했던 용사의 길을 지나온 건가?
참으로 역겹고 한심해서 미쳐버릴 노릇이군.
하기야, 지금은 저런 미개한 놈들에게 원망의 시위를 겨눌 때가 아니지.
정작 시위를 겨눠야 할 대상들은 따로 있다.
“화를 자제하고, 마음을 다스리십시오 레지에타의 선민들이여!”
바로 앞에서 들려온 어느 노인의 목소리가 처형장 전체를 압도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목소리가 퍼진 곳으로 향했다.
“용사 차시혁은 분명 우리 레지에타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끔찍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허나 과거에 마왕을 처단하고 대륙을 구원한 공적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 됩니다.”
사람들은 그렇다고 그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냐며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자 또 다른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물론, 공적이 있다고 해서 그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우리 레지에타 대륙은 올바른 정의가 남아 있는 땅이니까요. 그 정의의 이름으로 용사 차시혁은 반드시 심판해야 합니다.”
정의 좋아하시네.
괴설을 남발하는 늙은이들이나, 거기에 선동당하는 사람들이나.
앞으로 이 대륙이 어떻게 될지 미래가 참으로 걱정된다.
“지금부터 레지에타의 질서를 관장하는 현자의 이름으로 용사 차시혁의 죄를 여러분 앞에 고하겠습니다.”
앞선 두 노인에 이어, 이번엔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 두 노인이 나서 내 죄목을 하나하나 읊기 시작했다.
인신매매, 역병 살포, 마녀사냥, 거기에 용사의 이름을 앞세워 각국에서 세금을 무단으로 징수한 것도 모자라, 차마 입에 담기도 거북한 집단 성범죄를 저지른 것까지.
그 악행들을 정말 저질렀냐고?
아니.
저건 내가 한 게 아니야.
내가 아닌, 전적으로 다른 놈들이 저지른 악행들이지.
바로 내 눈앞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는 이 네 명의 늙은이들로부터 비롯된!
질서를 관장하는 현자?
웃기고 있네.
저 늙은이들은 현자라는 이름으로 감춰진 이 세계의 어두운 그림자일 뿐, 절대 선인들이 아니다.
나는 그 사실을 용사가 된 지 무려 20년 만에 알게 되었다.
현자들은 나를 이 세계에 부르고 용사로서의 삶을 살게 하면서도, 내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았다.
그런 만큼 이대로 모른 척, 그들의 악행을 묻고 지나갔더라면, 지금의 삶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왜냐고? 난 용사니까.
내가 이 세계에 왜 왔는데?
혼란에 빠진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잖아?
그렇다면 저 현자라는 이름의 악마들을 심판하는 것 역시, 내가 이 세계에서 해야 할 의무이지 않겠어?
난 그것이 의무를 넘어 당연한 도리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마왕군 토벌 이후 흩어진 동료들을 다시 모아, 현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했다.
이후엔 망설일 것 없이 바로 현자들에게 쳐들어갔지.
하지만 결과는?
깨졌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함께 한 동료들은 힘 한 번 못 쓰고 허무하게 죽었으며, 홀로 살아남은 난 현자들의 유희 거리로 전락해버렸다.
그러곤 자신들이 저지른 비리와 악행들을 모조리 나에게 전가함으로써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든 것이다.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다.
내가 왜 진 거지?
난 마계의 최강자 마왕을 죽이고 레지에타를 구원한 용사 아니었나?
분명 이 세계에서 내 위의 강자는 없는 거 아니었어?
대체 뭐가 잘못된 거냐고?
“이 세계나 저 세계나 인간의 미련함은 어쩔 수 없나 보군. 그냥 모른 척하고 살았다면 서로 아무 문제 없이 잘 살았을 텐데 말이지. 안 그런가 용사 차시혁?”
줄곧 나를 쳐다보던 민머리의 늙은이 하나가 내 앞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단 표정이군? 설마 잊은 겐가? 자네를 이 땅에 소환한 건 바로 우리일세. 우리가 만든 인형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웃긴 일이지 않은가?”
인형. 용사인 나보고 인형이란다.
그래, 네놈들은 처음부터 날 꼭두각시로 쓸 목적으로 소환한 거겠지.
“자네가 마왕을 처단할 때 쓴 성력도 결국 우리의 힘으로부터 비롯된 것일세. 자네는 그저 우리의 힘을 가지고 재밌는 용사 놀이를 한 것뿐이야.”
“그래도 즐겁지 않았나? 저쪽 세계에서는 꿈도 못 꿨을 일들을 이곳에서라도 마음껏 펼쳤으니 말이야.”
맞아. 덕분에 실컷 즐겼지.
그럼 뭐하겠는가?
지금의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내가 스스로 갈고닦으며 성장시켰다고 생각한 그 과정들은 사실 저 늙은이들의 농간이었을 뿐.
난 그것도 모른 채 어장 속 물고기처럼 미련하게 20년을 살아온 것이다.
“우리를 너무 원망하진 말게나. 자네가 용사로서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 레지에타에 남았듯이, 우리 역시 소망하는 대로 최선을 다해 사는 것뿐이라네.”
“그래도 자네는 인형으로서의 역할을 참 잘 수행해줬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진 말게. 자네는 죽어서도 레지에타를 구원한 용사로서 명예롭기 기록될 걸세!”
“어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아끼지 말고 하게! 비참한 최후를 목전에 둔 용사의 유언은 뭘지, 은근 궁금하니 말이야!”
현자들을 차례대로 말을 이으며 나를 향한 조롱을 지속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그래 있다.
비록 입안에 피는 그득하고, 말은커녕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지만,
나는 현자들을 향해 간신히 입을 움직였다.
“만수무강…….”
일도 예상하지 못한 내 유언에 당황한 것일까?
현자들은 전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래오래 사시라고. 다들…….”
뭐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원망과 저주를 퍼부어도 모자랄 판에 오래 살라는 덕담을 하고 있으니.
물론 덕담이나 하자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하지 않은 뒷말이 남아있…….
-털썩
아.
하필 이럴 때 쓰러져버리네.
이미 한계에 다다른 내 몸은 결국 현자들을 향한 마지막 한마디를 던지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쓰러져버렸다.
이래서야 진짜 덕담 남기는 꼴밖에 안 되는데?
적어도 이 말 만큼은 해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오래오래 살아라.
그래야지 언젠가 지옥의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내가 네놈들을 다시 마주할 수 있을 테니.
그 옛날, 마왕과의 혈전을 통해 나 자신에게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나란 놈은 생각보다 아주 지독하다는 거.
지금은 이렇게 허무하게 눈을 감겠지.
허나 내가 다시 눈을 뜬 그곳이 어디가 됐든, 난 다시 돌아와 네놈들의 사지를 비틀다 못해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이계로 넘어와 세상을 구한 어떤 용사는,
자신이 구원했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질타를 받으며,
참담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심하군. 이것이 내게 영광스러운 죽음을 선사했던 용사의 최후란 말이냐? 참으로 허무하기 짝이 없구나.’
음? 이 목소리 굉장히 낯이 익은데?
틀림없다.
이 목소리는 분명 20년 전 내가 목을 베었던 마왕 벨시페르의 목소리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저승에서 마중이라도 나왔나?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용사여? 넌 이 마왕에게 유일한 패배를 안겨준 레지에타의 최강자가 아니었나? 이래서야 너에게 죽은 난 대체 뭐가 된단 말이냐?’
어이 어이. 일단 반가운 건 둘째치고.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했는진 몰라도, 난 사실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야.
그러니 20년을 인형처럼 살다가 이리 허무하게 죽은 거 아니겠어?
‘넌 내가 인정한 유일한 존재다. 난 네놈 덕분에 이 세상에서 미련없는 최후를 맞이했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여야 해! 이런 최후는 내가 용납할 수 없다!’
이건 또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래?
당신이 용납할 수 없으면 뭐 어쩌겠다는 건데?
나를 부활시켜주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냐며 속으로 계속 물음을 던졌지만, 마왕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
“벨져?”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리세요 벨져!”
뭐야? 이거 설마 나 부르는 거 아니지?
벨져라니?
난 그런 인간 몰……!?
“회담 시작을 앞에 두고 멍을 때리다니. 대체 정신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정신이 있냐고?
아니. 없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목소리에 이끌려 얼떨결에 눈을 뜬 내 앞엔 칼날 같은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고 있는 백발 중년의 남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 남자, 남자이긴 한데…….
문제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잠깐 생각의 시간을 가져보자.
사람의 머리엔 원래 뭐가 달려 있지?
달려 있긴 뭐가 달려 있어!
머리카락 말고는 겉에는 아무것도 없는 게 사람 머리잖아!
근데 왜 저 남자 머리엔 뿔이 있는 건데?
이건 마치,
마족 같잖아?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얼떨결에 의자를 박차고 일어선 원형 테이블 앞.
그곳엔 서로 다른 외형을 가진 정체불명의 마족들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뭔데 이 상황?
왜 갑자기 내 앞에 마족들이 있……?
순간 일련의 생각이 머릿속을 강하게 스쳐 지나갔다.
나는 급히 내 두 손을 시작으로 몸 전체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이 몸, 내 몸이 아니다.
남자치곤 비정상적으로 긴 손톱.
어딘지 모르게 슬림해진 몸매.
딱 남자 고등학생 정도 되는 체형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쉴 새 없이 방황하던 내 눈은 마침내 천장에 크게 펼쳐진 거울로 향했다.
어?
저 얼굴, 낯이 굉장히 익은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얼굴에서 좀 더 앳돼 보이긴 했지만 틀림없다.
닮았어!
지금 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분명……!
“벨시페르?”
내가 죽였던 마계의 절대자, 마왕 벨시페르였다.
“예 맞습니다. 당신은 전대 마왕 벨시페르의 유일한 후손이죠. 그 사실을 모르는 마족은 이 자리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만 허둥대고 자리에 앉으세요. 벨져.”
백발 마족은 그런 나를 시큰둥한 눈으로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지시에 이끌리듯 벙찐 얼굴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근데 뭐 후손?
내가 전대 마왕의 후손이라고?
그럼 벨시페르가 아니란 소리야?
“그럼 지금부터, 새로운 마계의 미래를 위한 마왕 후보 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