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03
제103화. 파트로나
100년 전 인계 레지에타, 체플리카 산맥 인근.
짧지 않은 휴식을 끝내고, 마침내 마왕과의 재혈전 준비를 마친 용사 차시혁.
그는 동굴 밖으로 나와 다시 세상의 빛을 마주했다.
“더럽게 뜨겁네.”
기다렸다는 듯이 내리쬐는 태양 빛에 시혁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 뒤를 순백의 고운 머리칼을 지닌 여인이 뒤따랐다.
여인의 머리 위엔 두 개의 굴곡진 뿔이 솟아 있었다.
[드디어 가시는 겁니까?]“피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폐인처럼 있을 순 없으니까. 솔직히 가고 싶진 않아.”
[세상도 참 야속하군요. 아무 관련도 없는 이방인에게 세상의 운명을 맡기다니요.]“어쩌겠어? 나 말곤 이 세상에 그럴 용자가 없다는데…….”
시혁은 무상한 얼굴로 덤덤히 몸을 풀었다.
“근데 너 정말 나 따라올 거야?”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같은 이방인으로서, 나아가시려는 그 힘든 여정에 함께 하겠다고요. 그것이 이 세계에서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생긋 웃는 여인의 뒤로 하얀 안개가 치솟았다.
여인의 몸은 순식간에 안개로 뒤덮였으며, 안개는 점차 좌우로 넓게 퍼져나갔다.
[제 위에 타시지요.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윽고 안갯속에선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편 순백의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전에도 나 말고 다른 인간을 태워본 적이 있어?”
[처음입니다. 아마 일족 중에서도 제가 처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여, 영광이네…….”
시혁은 멋쩍은 마음에 뒷목을 긁적였다.
하기야 어떤 미친 드래곤이 하급 종족인 인간을 등 뒤에 태울 생각을 할까?
이걸 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주저하던 시혁은 결국 못 이기는 척, 그녀의 등에 올라탔다.
생각 외로 흔들림 없이 매우 편안했다.
“그러고 보니, 나 아직 네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 내가 뭐라고 부르면 돼? 드래곤 양?”
[애초에 전 본래의 이름을 잃고 이 땅으로 추방된 존재입니다. 이참에 시혁 님께서 새로 이름을 지어주시지요.]갑자기 작명을 해달라 하니, 시혁으로선 매우 난감했다.
시혁은 잠시 눈을 감으며 고민했다.
“그럼 파트로나로 할까?”
[파트로나요? 어떤 뜻이 있는 겁니까?]“이 땅에서 수호자를 뜻하는 말이래. 너나 나나 어쨌든 지금 이 레지에타란 땅을 지키러 가는 거잖아? 나름 상징적인 의미도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제안해본 건데, 어때?”
수호자.
아무 목적 없이 인계로 추락한 그녀에게 새로이 주어진 역할.
그 역할을 상징하는 단어를 시혁은 드래곤의 새 이름으로 지어주었다.
새 이름을 얻은 그녀의 입가로 만족감이 흠뻑 젖은 진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좋은 이름인 것 같습니다.]파트로나는 새롭게 얻은 소중한 이름을 가슴 속에 깊이 새기며,
-후웅!
레지에타의 푸른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 * *
파트로나(patróna).
레지에타에서 수호자, 혹은 수호하는 성녀를 뜻하는 말.
더불어 내가 용사 시절, 그녀에게 새롭게 붙여주었던 이름이다.
우리는 가장 힘겨운 시기에 만나 유일하게 서로를 이해해줄 수 있는 동반자가 되었고, 덕분에 잠시 잃었던 삶의 의지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만약 이렇게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떠날 땐 혼자, 돌아올 땐 둘.
허나 다시 만난 마왕은 여전히 강력했다.
유리스가 전해준 정보들을 바탕으로 1차전보단 좀 더 밀어붙이긴 했지만, 그 미친 마왕 놈 역시 기다렸다는 듯 더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상대했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첫 혈전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엄청난 합을 주고받던 나는 이전에 유리스가 힌트를 준 대로 마왕을 흥분상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나 역시 전력에 가까운 힘을 소진했다.
겨우 2페이즈에 진입했는데 나는 녹다운 직전인 반면, 벨시페르는 이제 시작이라며 더 맹렬한 기합을 내지르고 있으니,
그대로 갔다간 승패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사이에 힘을 회복하십시오!]그때 파트로나가 나섰다.
나보다 더 지치면 지쳤지, 멀쩡할 리 없을 그녀가 갑자기 시간을 벌겠다고 나서니, 나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뭘 하려는 거냐고 물을 새도 없이,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나의 주인이시여…….]그녀는 대뜸 마지막 인사를 남긴 채, 지체없이 마왕을 향해 질주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건 마왕도 마찬가지.
“지고의 생명체답게 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냐?”
자신과 정면승부를 원한다는 마음에 벨시페르는 다시 한번 마력을 발현했다.
하지만 파트로나가 원한 건 정면 승부가 아니었다.
[당신이 있어야 할 세상으로 가시지요!]파트로나는 본인에게 남아있는 모든 힘을 끌어내, 마왕의 등 뒤로 차원 게이트를 생성했다.
그 게이트와 연결된 장소는 바로 마계.
나에게 회복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마왕을 다른 곳에 보내려는 의도였다.
“어디서 개수작을!!”
[가는 길 외롭지 않게 제가 함께하겠습니다!]마왕은 저항했지만, 파트로나의 숭고한 의지를 넘어설 순 없었다.
파트로나는 성체의 모습으로 벨시페르의 몸을 끌어안은 채, 미련 없이 마계로 전이했다.
바람처럼 온 인연은 바람처럼 사라진다고 했던가?
지친 일상에 활기를 넣어주는 산들바람처럼 내게 와주었던 그녀는,
그렇게 다시 바람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충격에 휩싸일 시간은 없었다.
그녀가 만들어준 시간을 허투루 낭비할 순 없기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재정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머지않아 마왕은 다시 레지에타에 돌아왔다.
그 역시 또 다른 차원 게이트를 생성해 돌아온 것이지만, 상태는 이전 같지 않았다.
게이트 생성에 마력을 소진한 것인지 한눈에 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었다.
그런 상태라면 잠시 물러서서 회복할 법도 하건만, 그의 자존심은 후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왕과의 3차 혈전에 돌입한 나는,
“훌륭했다 용사여! 나 마왕 벨시페르와의 싸움에서 승리했구나! 정말로 좋은 승부였다.”
그와의 승부에서 승리하며 마침내 레지에타를 지켜냈다.
평화.
그 어떤 보상과도 비교가 불가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상의 보상.
하지만 그 보상을 얻기 위해 나란 놈이 지불한 대가는 매우 컸다.
그 이후 나는 몇 번이고 떠올렸다.
그녀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살아는 있을까? 살아 있다면 나를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그녀는 마지막으로 내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지만, 난 그녀에게 어떤 말도 해주지 못했다.
그러니 먼 훗날 만약 다시 만나는 날이 온다면,
나는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었다.
그런 내게, 마침내 그 말을 전할 수 있게 된 순간이,
삶을 넘어 100년 만에 오고야 만 것이다.
-스스스
파트로나의 날개 사이로 하얀 안개가 치솟았다.
안개는 그녀의 거대한 성체를 순식간에 뒤덮었으며, 점차 한곳으로 뭉쳐졌다.
이윽고 안갯속에서 인간형으로 모습을 바꾼 파트로나가 나타났다.
[정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요….]그녀에게는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불렸을 바로 그 이름.
파트로나의 눈가엔 당장에라도 떨어질 듯한 이슬들이 가득 맺혀 있었다.
“내가 왜 이름을 아는진 묻지 않을 건가?”
파트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당신이 걸어왔던 그 시간들이 전부 느껴지는데. 처음 만났던 그때와 마찬가지로요.]이미 모든 것을 깨달았다는 듯, 파트로나는 가녀린 손으로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하! 정말 꿈만 같습니다! 이렇게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 오다니요! 제가 느꼈던 그 따스한 감흥이 아직 당신의 영혼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기쁘다는 걸,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느끼는군요.]마지막.
나로선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이다.
기껏 다시 재회했는데 마지막이라니.
그런 내 슬픈 감정마저 눈치챈 듯,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 슬퍼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의 연은 이미 100년 전에 끊어진 것과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저희는 지금 이렇게 교감을 나누고 있습니다. 슬퍼할 이유가 없는, 매우 기쁜 일이지요.]그래. 기쁘다.
무척 기쁜 일이지.
하지만 이 기쁨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난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슬픔을 완전히 감출 순 없겠지요. 애석하게도 전 이제 당신의 힘이 되어 드릴 수 없습니다. 드래곤으로서 살아온 긴 여정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졌으니까요.]“내가 너를 구할 방법은…… 정녕 없는 건가?”
[지금 이 순간 당신을 만남으로써 전 제 삶의 모든 염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니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역할이 끝난 제가 이 세상에 남아있을 이유는…… 이제 없겠지요.]파트로나는 어느샌가 떨고 있는 내 손을 부드러이 잡아주었다.
100년 만에 느끼는 매우 따스하고도 익숙한 감촉.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세상이 그걸 또 원한다면…….”
[고되겠군요. 하지만 전에도 이루셨듯, 이번에도 반드시 해내실 겁니다. 비록 이제는 제가 곁에 있을 수 없다고 해도, 다시 이어진 저희의 연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겁니다.]파트로나는 이내 고개를 돌려 수호를 보았다.
[이쪽으로 오너라, 수호야.]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했을 드래곤 꼬맹이는 어벙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 아이는 마계로 전이된 제가 당신과 나눈 인계의 추억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잉태한 아이입니다. 온전치 못한 몸으로 낳은 아이인 만큼, 드래곤임에도 드래곤으로 변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신체를 가졌습니다.]파트로나는 자식과의 마지막 교감을 나누려는 듯, 수호의 몸을 꼬옥 안아주었다.
그 마음을 눈치챈 듯, 수호는 우수에 찬 눈으로 물었다.
“어머님. 이제 떠나시는 겁니까?”
[떠나는 것이 아니다. 이 어미는 언제고 너와 함께할 것이야.]“전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요?”
[앞서 말했듯, 이 세상에 가치 없는 존재는 없단다. 너 역시 마찬가지지. 너의 역할은 나의 뒤를 이어 이분을 보필하는 것이다.]“이 마족을 말인가요?”
수호는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때, 수호를 끌어안은 파트로나의 몸이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한 마지막 순간이 마침내 온 것이다.
[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 그러니 넌 내게서 받은 것을 가지고 이분을 따라가거라. 이 어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드러낼 수 있는 너의 가치와 역할은 이분을 통해 주어질 것이니…….]파트로나의 몸에서 다시 안개가 돋았다.
안개는 두 모자를 감싸 안았고, 점차 내 시야를 가렸다.
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파트로나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 향했다.
[부디 원하는 세상을 꼭 이뤄내시길. 나의 주인이시여…….]이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
나 역시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사라져가는 그녀를 보며 나지막이 진심을 전했다.
“고마웠다. 정말로…….”
전생에서 풀지 못해 항상 가슴에 한(恨)처럼 맺혀 있던 묵직한 덩어리가 점차 씻은 듯이 사라져간다.
더불어 그녀의 모습도 점점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슬프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녀의 말마따나 인연의 순리를 거슬러 이렇게나마 다시 만날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이란 말인가?
미소로 보내주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일 것이다.
-스스스
파트로나는 그렇게 안개와 함께 자연의 일부로 되돌아갔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 남은 것은 수호뿐이었다.
허나 수호는 더 이상 이전에 봤던 꼬맹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미에게서 모든 힘을 물려받은 수호는 나와 비슷한 성인 남성의 몸으로 훌쩍 자라 있었다.
다시금 눈을 뜬 수호는 나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한층 더 성장했음을 증명하듯, 굵직해진 목소리.
수호의 물음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물론이지.”
* * *
한편 벨져가 드래곤의 영역으로 전이된 사이,
절벽 밑에 남겨진 일행들은 사라진 그를 찾고자 사방을 탐색하는 중이었다.
“벨져! 벨져! 들리면 대답 좀 해봐요!”
애타는 부름에도 벨져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앞길을 막고 있던 투명한 결계는 사라졌지만, 그 너머는 앞이 꽉 막힌 막장이었으며, 벨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위험에 빠지신 것 같지 않은데, 대체 어디로 가신 걸까요?”
“벨져는 숨바꼭질을 잘하네…….”
그렇게 모두가 혼란에 빠진 가운데,
-스스스
벨져가 사라지기 직전에 나타났던 하얀 안개가 다시 나타났다.
“안개가!”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이쪽으로 모여주십시오!”
제임스는 황급히 흩어진 일행들을 한 곳으로 불러 모았다.
한자리에 모인 일행들은 긴장감을 유지하며 안개가 드리워진 방향을 주시했다.
-터벅터벅
이윽고 들려오는 낯익은 발소리.
소리와 함께 안개는 빠르게 걷혀갔으며, 머지않아 사라졌던 벨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 다들 기다렸지?”
벨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덤덤하게 일행들을 마주했다.
“이제 그만 가자. 이럴 시간 없잖아.”
“어, 어디로요?”
“어디긴, 당연히 리고 섬이지.”
“갈 방법은 있어?”
세나의 물음에 벨져는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얘가 태워줄 거야.”
-쿵! 쿵!
손가락이 향한 곳에선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