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1
제11화. 제안
마왕의 왕좌는 하나.
하지만 이를 노리는 후보는 무려 8명.
단순 확률로 따져도 마왕이 될 가능성이 각각 15%를 채 넘지 못한다.
이게 뭘 의미하겠는가?
나를 포함한 8명의 후보는 그냥 서로가 적이란 뜻이다.
전에 살던 세계에서도 이런 경우를 종종 봤다.
선의의 경쟁을 한답시고 앞에선 서로 웃으며 악수하지만, 뒤에선 서로를 어떻게든 떨어뜨리기 위해 각자의 치부를 까발린다거나, 깎아내리는 등.
별의별 거지 같은 일을 다 하는 것.
여기라고 뭐 다르겠는가?
무려 마계를 지배할 수 있는 마왕의 자리인데.
그런 와중에 손님? 웃기는 얘기지.
손님이 아니라 내 입장에선 그냥 적이 온 거다.
하지만 이사벨 이뉘디아.
이 여자는 지금 아무리 봐도 날,
적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마왕 후보로서 품위는 지키면서 사셨나 봐요? 이 정도면 제 별장용으로 쓰기에 나쁘지 않은 저택이에요.”
오히려 수상할 만큼 날 우호적으로 보고 있었다.
“뒤의 그 아이는, 퍼밀리어인가요?”
대뜸 자신을 가리킨 것에 메이는 화들짝 놀랐다.
“그렇습니다.”
“한눈에 봐도 마력의 그릇이 굉장히 넓은 신동급의 아이네요. 가능성이 무궁무진해 보여요. 어디서 저런 마족을 데려오셨을까?”
“그냥 우연히 만났습니다.”
메이의 핏줄에 대해선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사벨의 말투에선 가식이 아닌 진심이 담긴 흥미로움이 느껴졌다.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메이의 가능성을 보기라도 한 것일까?
나름 나 이외에 메이의 가치를 알아봐 준 첫 마족이었다.
찾아온 손님은 이사벨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엔 족히 2m는 돼 보이는 장신의 마족이 소나무마냥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른 하수인 없이 한 명만 대동한 걸 보니, 아무래도 그녀의 퍼밀리어 같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질 때쯤, 브릴리스가 차를 내왔다.
이사벨은 우아한 손길로 찻잔을 들어 차를 음미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귀족 영애를 보는 듯했다.
“슬슬 무슨 일 때문에 오셨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는 타이밍에 맞춰 물었다.
이사벨은 대답 대신 의미 모를 웃음만 흘렸다.
“분명 제가 없다는 사실을 브릴리스로부터 들으셨을 텐데 대체 뭐하러 5일 동안 여기를…….”
“의외네요? 날 보자마자 반색이 되며 반겨줄 줄 알았는데?”
내가 반기긴 왜 반겨?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왔는지도 전혀 모르는 마당에?
“요즘 벨져 후보에 관한 소문이 심상치 않던데요? 회담장에서 다일 후보에게 사과를 받게 한 것도 모자라, 거리에서 대놓고 마왕 후보의 위세를 과시했다던데……. 망나니 마왕 후보라 불리던 예전이랑은 완전 딴판이네요? 그동안 심경의 변화라도 있으셨나요?”
“마왕의 후보로서 응당 보여야 할 모습을 보였을 뿐입니다.”
뭐 딴 건 몰라도 회담장에서의 일은 이 여자의 도움이 컸지.
뭔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날 도와줬을 거란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별로 웃긴 말을 하지도 않았건만, 이사벨은 웃다 못해 아예 박장대소를 했다.
“아 눈물이야. 미안해요. 설마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거든요.”
옆에선 모욕감을 느낀 브릴리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애써 내색하지 않고, 그녀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뭐 심경 변화야 어찌 됐든 우리야 서로 조건만 맞으면 되겠죠. 이쯤이면 충분할 것 같네요. 이제 그만 벨져 후보가 제시했던 단일화 제안을 받아줄까 해요.”
자, 잠깐만! 뭐?
무슨 제안?
“다, 단일화 제안이라 하시면……?”
“물론, 벨져 후보가 자신의 후보직을 버리고 제 밑으로 들어오는 그 단일화 제안을 말하는 거죠.”
이건 또 무슨 사막에서 낮잠 자다가 얼어 죽는소리야?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감정을 주체못한 브릴리스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뭐야? 설마 아직 모르고 있었어요? 얘기 안 한 거예요 벨져 후보?”
“베, 벨져 님? 대체 이사벨 후보님에게 무슨 제안을 하신 겁니까?”
나한테 물어봐도 몰라요 이 숙녀님들아!
난 그런 제안한 적 없다고!
“이, 일단 저희끼리 먼저 이야기하시죠.”
“벨져 님!!”
우선은 듣는 귀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브릴리스는 펄쩍 뛰며 내게 설명을 요구했지만, 나라고 뭐 해명할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할 수 있는 건, 애먼 침묵뿐이었다.
“뭐, 난 상관없어요. 밖에서 기다리세요. 드류.”
“이사벨 님의 지시를 따르겠습니다.”
이사벨은 자신의 하수인을 먼저 밖으로 내보냈다.
눈치를 보던 메이도 곧 뒤따라 나갔지만, 브릴리스는 차마 나가지 못하고 침묵하는 나를 계속 노려봤다.
결국은 시선을 거두며 홱 하고 돌아서더니, 인사도 없이 매정하게 방을 나갔다.
이제 방에는 이사벨과 나, 단둘만 남게 되었다.
“말 못 하고 있던 것도 이해는 해요. 하지만 되도록이면 현실을 빨리 깨우쳐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뤄지지도 않을 환상 속에 영원히 갇힐지도 모르니까.”
이사벨은 난해한 말을 읊다가도, 내 앞으로 낯선 양피지 한 장을 건넸다.
나는 차마 이게 뭐냐고 묻지 못했다.
그저 곁눈질로 양피지에 적힌 내용을 빠르게 훑을 뿐이었다.
“이런 말 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벨져 후보의 선조이자 전대 마왕인 벨시페르를 존경한답니다.”
현실 얘기하다 말고 갑자기 웬 존경?
“벨져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마족은 힘의 양도가 가능한 종족이에요.”
네? 뭐가 가능하다고요?
“우리 이뉘디아 가문을 비롯해, 마계를 대표하는 7가문은 선대가 쌓아온 힘을 마혈석을 통해 고스란히 물려받았어요. 우리 세대는 그 힘을 보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발전시켜서 다음 세대에 물려줄 의무를 지니고 있죠.”
이런 미친? 그런 게 가능했어!?
이거 인간으로 따지면 부모가 쌓아온 부와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무슨 이런 사기적인 종족이 다 있어?
“그런 면에서 전대 마왕 벨시페르는 참 대단해요. 부모로부터 힘을 세습 받지 않고,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마계의 쟁쟁한 강자들을 이겨서 최강자가 되었죠. 아마 그런 마족은 마계 역사에서 다시 안 나올 거예요.”
아, 그래 뭐 그 싸움에 미친 마왕이야 직접 싸워본 내가 제일 잘 알지.
이야, 근데 벨시페르 그놈, 내가 알던 것보다 더 대단한 놈이었네?
흙수저가 혼자 힘으로 왕이 된 거 아니야?
“허나 그 위세가 후대까지 이어지리란 법은 없죠. 최강이란 타이틀도 이제는 과거의 영광에 불과해요. 벨져 당신을 보면 딱 답이 나오죠.”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은근히 나를 지적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니까요? 회담 3일 전에 갑자기 단신으로 절 찾아와선, 자길 받아달라며 애걸복걸하던 당신의 모습이 말이에요. 그땐 정말 어찌나 놀랐는지…….”
아.
그런 거였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이쯤 들으니 대충 알 것 같았다.
벨져 이 녀석.
아무래도 브릴리스 몰래 마왕 후보직을 포기할 생각이었나 보다.
그냥 포기하는 것도 아닌,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보호자 곁에 불을 속셈이었겠지.
그 보호자가 바로 이 여자 이사벨인 거고.
“자! 이야기는 이쯤 하죠! 그 서약서에 사인하시고, 벨져 후보의 마혈석을 제게 넘기시면 모든 게 끝난답니다! 당신은 우리 이뉘디아 가의 보호를 받으며 평생을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요!”
이사벨은 어서 사인하라며 손수 펜까지 건네주었다.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일단 서약서의 내용을 마저 읽어보았다.
딱히 그녀가 말한 내용과 다른 건 없었다.
대충 내 힘을 전부 그녀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이뉘디아 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그런 내용.
이건 그야말로 나 하나 좋자고 날 믿어주던 모두를 버리는 행위였다.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든지요!”
“제가 했다는 그 제안을…… 이제 와서 받으시는 이유가 뭡니까?”
싸움에 있어 적이 제 발로 찾아와 항복하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다.
이왕 단일화를 할 거면 내가… 아니지, 벨져 이 자식이 처음 제안했을 때 바로 응했더라면, 그녀의 위신을 더 빨리 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하다못해 회담장에서 다른 후보들을 기죽이는 일도 가능했을 텐데,
그때가 아닌, 지금에 와서 단일화에 응한 이유가 무엇일까?
“흠…. 솔직한 답변을 원하나요?”
“물론입니다.”
“그땐 당신이 너무 구렸잖아요.”
더 들을 것도 없는 명쾌한 대답이었다.
“말이 후보 단일화지. 까놓고 말해서 당신은 8명의 마왕 후보 중 가장 가능성이 없는 후보예요. 그런 후보를 들인다고 해봐야, 제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요? 그냥 없느니만 못한 수준이죠.”
내가 너무 당연한 걸 물었군.
꼴에 후보랍시고, 내가 이 망나니 후손이 전에 어떤 마족이었는지, 잠시 잊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이미 관계자들 사이에선, 벨져 후보가 다일 후보로부터 사과를 받게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어요.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마냥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위신을 가진 후보. 그게 지금의 당신이에요.”
즉 어느 정도 몸값이 올라왔으니, 누가 낚아채기 전에 먼저 데려가겠다 이 말이로군.
뭐 나쁘게 볼 생각은 없다.
그만큼 나란 놈의 가치가 저들에게 의미 있는 수준까지 올랐다는 거 아니겠는가?
궁금증이 풀린 나는 그대로 펜을 집었다.
저 서명란에 내 이름을 적고 마혈석을 넘기면 된다 이거지?
당연하지만 그럴 생각은 단 일도 없다.
내가 이름을 적을 곳은 서명란이 아닌, 바로 이곳.
-찌익찌익
이사벨의 이름이 적힌 곳을 두 줄로 그은 후, 그 위에 내 이름을 덧씌워 적었다.
“무슨 짓인가요 벨져 후보?”
예상치 못한 내 돌발 행동에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죄송합니다만, 전 이사벨 후보의 밑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뭐라고요?”
“아, 밑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는 거지, 단일화할 생각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다시 제안 드리겠습니다.”
나는 수정한 계약서를 도로 이사벨에게 건넸다.
“이사벨 후보께서 제 밑으로 들어와 주시지요.”
역제안.
단일화를 하긴 하되, 내가 아닌 그녀가 후보직을 버리고 내게 들어온다.
서로 주체만 달라졌을 뿐이지 어쨌든 단일화는 맞잖아?
이 몸의 본주는 마왕이 될 마음이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거야 그놈 마음이고, 난 아니란 말이지.
난 마왕이 될 거다.
그게 바로 내가 이 세계에 넘어온 이유일 테니까.
“풉!”
이사벨은 대뜸 웃음을 터트리더니, 배를 부여잡으며 깔깔 웃어댔다.
“벨져 후보 이렇게 유머 있는 남자인진 몰랐네요? 이런 진지한 상황에서 농담도 다 할 줄 알고! 그래도 저니까 이렇게 웃으며 받아주는 거지 다른 후보한테 그랬으면…….”
농담 아닌데?
나는 알아서 깨달으라는 뜻으로 말없이 굳은 눈빛만 유지했다.
“농담 아닌가 보네요.”
곧 내 말이 진심임을 인지한 이사벨은 다시 얼굴을 굳혔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기까진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제 기분이 지금 어떨 거라 생각하시나요?”
“좋은 기분은 아니실 거라 봅니다.”
“흔히 이런 상황을 놀림당했다고 하던데, 전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놀림 같은 걸 당해본 적이 없단 말이죠?”
뭐 충분히 그랬을 것 같다.
보통 배짱을 가진 마족이 아니고서야, 누가 당신 같은 여자를 놀리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지금 기분이 무척 낯설어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참 애매하네…….”
이사벨은 입술을 매만지며 웃음과 찡그림을 반복했다.
얼굴만 봐선 혼란이 가득하다 못해 터질 듯 보였다.
“벨져 후보. 제가 정중하게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그러십시오.”
고민을 거듭하던 그녀는 이내 싱그러운 소녀의 미소를 지으며 내게 나지막이 물었다.
“당신 죽여도 돼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