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11
제111화. 정령의 본체
이야기는 잠시 몇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섬 외곽에서 대기하는 것이 아닌, 얼음의 정령을 찾기 위해 길을 돌아선 이사벨과 메이.
눈보라를 헤치며 앞장서던 이사벨이 돌연 걸음을 멈췄다.
“그만 나오죠?”
그녀들의 뒤에서 자박자박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 역시 이사벨 님의 눈치엔 못 당하겠군요!”
“미켄 님?”
그의 기척을 인지하지 못한 메이는 깜짝 놀랐다.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벨져 후보님께 허락을 맡고 두 분을 섬 외곽까지 바래다 드리러 온 것이니까요!”
“루비아 후보님은 어쩌시고요?”
“저희 누님이야 옆에 벨져 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있는 것보다 훨씬 안전할 겁니다.”
미켄은 문제없다고 말하면서 은근슬쩍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한데, 이쪽은 섬 외곽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섬 외곽으로 가는 게 아니니까, 당연하죠.”
“정말로 그 얼음의 정령이란 걸 찾으실 생각이신가요?”
이미 오는 동안 그녀들의 이야기를 엿들었기에, 미켄은 숨기지 않고 물었다.
이사벨은 대답 대신 퉁명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 물론 그걸 막거나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정말 가능성이 있을까 싶어서 여쭤본 겁니다.”
“없어요.”
“예?”
너무나도 확고한 대답에 미켄은 고개를 갸웃했다.
가능성이 없다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단 거나 마찬가지였다.
“정령이 우리 앞에 나타날 가능성은 없을 거라고요.”
“그,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찾으실 생각인지?”
“직접 나서서 찾아야죠. 때마침 적합한 장소에 온 것 같네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하얀 벌판.
이사벨은 그 벌판의 중심으로 홀로 걸어 나갔다.
이내 자리를 잡고 앉더니, 찬찬히 눈을 감았다.
“이, 이사벨 님?”
“방해하지 마세요. 10분 안에 내가 눈을 뜨고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때 깨우세요.”
“예. 알겠습니다…….”
미켄과 메이는 어리둥절한 그녀의 행동을 얌전히 지켜봤다.
이사벨은 그대로 명상에 돌입했다.
정령.
자연의 인격체이자 일부.
그들은 인계도 마계도 아닌 정령계라는 범차원적인 공간에서 자신을 부르는 이들에게 힘을 빌려주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그동안 이사벨이 소환하고 다뤘던 정령들도 엄연히 본체가 아니었다.
정령계에 있는 본체의 일부를 마력을 이용해 이곳으로 소환하는 것이었다.
물론 아무나 부른다고 소환되는 건 아니다.
당연하게도 정령으로부터 자신을 다뤄줄 주인으로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며, 아무리 방대하고 강한 마력을 가졌다고 한들, 인정을 받지 못하면 정령은 소환에 응해주지 않았다.
마계에 이름난 정령사가 적은 것도 정령이 얼마나 다루기 까다로운지를 보여주는 예시였다.
그런 정령도 인정만 받으면 애 다루듯 편히 다루는 마족이 바로 이사벨이었다.
그녀는 불, 물, 바람, 빛, 번개 등 이미 다섯 속성의 정령과 계약을 맺었으며, 현재도 멈추지 않고 새로운 정령과 계약하기 위해 틈이 날 때면, 정령계에 수시로 접속해 정령들과의 만남을 이어 나갔다.
그런 이사벨조차 최근 만남에 어려움을 겪는 정령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얼음의 정령이었다.
일단 만남을 요청하면 기본적으로 얼굴은 보러 와주는 다른 정령들에 비해, 얼음의 정령은 그녀와 대면을 하는 것조차 계속 거부해왔었다.
“이번엔 좀 만나주세요…….”
약간의 초조함이 담긴 다짐과 함께, 이사벨은 정령계에 접속했다.
살을 엘 듯이 불던 눈보라도, 섬 전체를 두껍게 덮고 있던 눈 이불도 전부 사라진 주변.
이윽고 눈을 뜬 이사벨의 시야에 보인 것은 금빛의 눈부신 오로라였다.
그녀의 주위론 지금까지 계약을 맺은 다섯 속성의 정령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얼음의 정령은요?”
이사벨의 물음에 정령들은 고개를 저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만나러 와주지 않았단 의미였다.
이사벨은 당황하지 않고, 정령들의 보호를 받으며 탐색하기 시작했다.
마족으로서 정령계에 정신을 유지할 시간은 끽해야 10분.
그 시간 안에 얼음의 정령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정신줄을 꽉 붙들어 매며 탐색에 나서기를 몇 분여.
-뽀득
익숙한 소리를 들은 이사벨은 즉시 발밑을 내려다봤다.
눈이었다.
리고 섬을 뒤덮은 것과 똑같은 새하얀 눈.
와야 할 곳에 왔음을 직감한 이사벨은 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앞으로 하늘빛 머리카락의 낯선 여인이 나타났다.
“얼음의 정령!”
부름에 반응한 그녀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허나 원치 않는 손님임을 확인한 듯, 다시 매정하게 돌아섰다.
“잠깐만요!”
이사벨은 놓치지 않기 위해 헐레벌떡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와선 급히 어깨를 잡았지만,
“크윽!”
잡자마자 느껴진 냉기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띵해지는 두통은 덤.
이는 정령계에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이사벨은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채, 간신히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간 좀 내줘요! 잠깐이면 돼요!”
여인은 그제야 이사벨과 눈을 마주했다.
시간이 촉박한 만큼 이사벨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당신과 계약하고 싶어요! 리고 섬에 있는 정령, 당신의 조각 맞죠? 그 조각의 힘이 난 필요해요!”
분명 이사벨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음에도 여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뭐야 당신?”
그 행위가 무얼 의미하는지 이사벨은 모르지 않았다.
“당신 본체 아니에요?”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벨로선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왜 조각이 여기 있는 거예요? 본체는 어디 가고?”
여인은 말없이 손가락만 들어 올렸다.
손가락이 향한 곳은 바로 이사벨이 서 있는 발아래.
그렇다는 건 즉,
“본체가 리고 섬에 있단 뜻이에요?”
그 물음에 여인의 고개가 움직이려는 찰나,
-콰콰쾅!
섬 중심부에서 엄청난 굉음이 전해왔다.
졸지에 정령계와 접속이 끊긴 이사벨은 현실로 돌아왔으며, 즉각 소리가 들린 곳으로 눈을 돌렸다.
“다아아아아!”
뭐라는지 알 수 없는 포효는 덤.
대충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것 같은 포효였다.
“베, 벨져 님께 또 무슨 일이 생기신 걸까요?”
메이는 안절부절못한 상태로 소리가 들린 곳을 초조하게 바라봤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저기에 얼음의 정령이 있을 확률이 높아요! 우선 이동을……!”
“저기 두 분?”
혼란 속에서 분주하던 두 여인과 달리, 줄곧 차분함을 유지하던 미켄이 입을 열었다.
“제가 제안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 상황에 갑자기 무슨 제안이요?”
“아무래도 저희 누님께서 이 섬에 있다는 보물을 위치를 찾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 말에 이사벨과 메이의 눈이 번뜩 뜨였다.
“일단 저희는 동맹 관계이기도 하니, 같이 가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요.”
미켄을 미소와 함께 그녀들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 * *
퍼밀리어.
주종 계약을 맺은 마족과 힘과 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관계.
따라서 너무 먼 거리만 아니라면 자신의 주인이 어디서,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퍼밀리어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미켄이 루비아가 있는 이곳에 올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덩달아 같이 있던 이사벨과 메이도 함께.
“섬에 있는 동안 흔적조차 안 보이더니만, 마지막에 보물을 가로챌 중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나 보네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계획을 세웠을 뿐입니다.”
이사벨의 비아냥 섞인 물음에 다일은 무뚝뚝하게 받아쳤다.
그녀도 딱히 조롱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지극히 그다운 행동이었기에 살짝 구역질이 났을 뿐.
“이렇게 된 거 합의를 보시죠. 두 분도 이 보물이 네로 후보나 그룸 후보에게 가는 걸 원치는 않으실 겁니다. 제게 이 보물을 넘겨주시죠. 그럼 두 분에게 손대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 추후에 사례도 반드시 하겠습니다.”
“어쩌죠? 난 저 보물이 그 둘 보다 다일 후보의 손에 넘어가는 게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정말로 위험한 행동을 하기 전에 이쯤에서 합의 보시죠.”
“어머 무서워라? 몰랐는데 다일 후보 협박하는 재주도 있으셨네요?”
서로의 입장은 확고했다.
이런 상황에 합의가 이루어질 린 없을 터.
무뚝뚝하게 서 있던 다일은 대뜸 턱을 치켜올렸다.
“제가 알던 냉철하고, 합리적이던 질투의 종주와는 많이 달라졌군요. 이사벨 이뉘디아. 벨져 그 남자와 함께 지내다 보니, 함께 교만해진 겁니까?”
그 말에 불쾌감이 치솟은 이사벨은 말없이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눈빛 또한 굉장히 차가워졌다.
다일은 개의치 않고 페르를 돌아봤다.
“페르.”
“예.”
“이 장소에서 나를 제외하고, 서 있는 자가 없게 해라.”
“……다일 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미켄과 마주하고 있던 페르의 입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십섬(十殲)…….”
그의 입에서 나직이 읊조려진 도검술의 비기.
위기를 직감한 미켄은 황급히 물러섰지만,
“무형의 참격!”
-서거걱!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보이지 않는 검기가 미켄을 덮쳤다.
“커허헉!”
“미켄!!”
화들짝 놀란 루비아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일격에 당한 미켄은 피를 토했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간신히 방어 자세를 유지했다.
“용케 쓰러지지 않으셨군요.”
“레이디들 곁에 있으면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게 남자거든…….”
이미 온전치 않은 상태가 됐음에도 미켄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겨. 이 섬을 떠나고 나면, 나한테서 이런 기분을 더 느끼지 못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지요. 제가 지시를 받은 이상, 그대가 이 섬을 떠날 일은 없을 겁니다.”
페르는 여태 보인 적 없던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서서히 미켄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그의 검이 다시 번뜩이려는 그때,
-쩌저적
발밑에서 느껴진 낯선 기운에 페르와 미켄은 동시에 아래를 내려다봤다.
둘의 발은 어느새 얼어 붙어버리면서 꼼짝도 못 할 상태가 되고 말았다.
당황한 것도 잠시,
-스스스
모두가 왔던 방향에서 낯설지 않은 한기가 불어닥쳤다.
이에 모두의 시선이 이끌리듯 돌아갔다.
“저, 저건?”
“화이트 위치?”
하늘빛 머리카락의 스산한 기운을 내뿜는 정체불명의 여인.
리고 섬의 주인 화이트 위치가 다시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 움직일 수가 없다!”
“어째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화이트 위치는 전투 불능 상태가 된 둘을 지나친 채, 전대 마왕의 시신을 향해 유유히 나아갔다.
위협을 느낀 루비아는 바로 물러났다.
허나 어째서인지 프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뭐 하고 있니? 어서 피하지 않고?”
루비아는 어서 피하라고 다그쳤지만, 프린은 요지부동이었다.
이윽고 프린의 코앞까지 다가선 화이트 위치는 그녀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모두가 의문스러웠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프린을 향해 한 발짝 더 내디딘 화이트 위치는,
-쑤우욱!
그대로 프린의 몸속으로 빨리듯 흡수되었다.
그러자 독에 취해 보라색으로 물들여졌던 프린의 눈동자는 점차 푸른색으로 변해갔으며, 외형 역시 전체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후보, 퍼밀리어 할 것 없이 모두가 놀랐지만,
그중 가장 놀란 건 이사벨이었다.
“서, 설마…….”
이사벨은 말하면서도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 함께 든 듯 고개를 내저었다.
마침내 화이트 위치와 완전히 합일을 이룬 프린은 다시 모두를 돌아봤다.
“모두, 안식에 빠질 시간입니다.”
이사벨은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확신이 들었다.
지금 그녀가 보고 있는 저 프린이라는 여자가,
바로 얼음의 정령의 본체라는 것을.
허나 이사벨이 그 사실을 깨달은 직후엔,
-쩌적
그녀가 서 있는 발밑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