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13
제113화. 사신의 전율
여전하다.
비록 죽은 시체지만,
시체인 와중에도 목은 없지만,
두꺼운 얼음 속에 갇혀있다고 한들, 마왕은 마왕이다.
100년 전 느꼈던 그 서늘하고도 위협적인 기세가 그대로 느껴진다.
자, 옛 라이벌(?)에 대한 감상은 여기까지.
지금은 다른 곳에 신경을 집중할 때다.
“그 불결한 손 치워라, 벨져! 그 정령은 내 소유물이다!”
살찐 손가락을 앞세우며 되지도 않는 말을 지껄이는 저 뻔뻔한 모습을 봐라.
당사자는 되어줄 마음도 없을 텐데, 멋대로 소유물이라고 주장하는 꼴이라니.
그래도 내 뒤를 용케 뒤따라서 와서 먼저 보물을 발견한 집념은 인정해줘야 할 것 같다.
뭐,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니 이젠 놀랄 것도 없겠지.
문제는 지금 저 비만 마족이 보여준 힘이다.
“너 어제랑은 많이 달라졌다?”
“닥쳐! 어디서 어쭙잖게 네놈 따위가 날 평가해?”
“그 어쭙잖은 나한테서 꽁무니 빠지게 도망친 게 너 아니었냐?”
그 말을 듣자마자, 네로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차마 반박은 할 수 없었는지, 이만 아득바득 갈았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마냥 여유 부릴 상황은 아니다.
저 비만 마족의 성력.
어제보다 못해도 열 배는 더 강력해졌다.
방금 프린을 구하기 위해 마법진에 몸을 던졌을 때, 하마터면 몸이 고꾸라질 뻔했다.
세나의 디버프 존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디버프 존에 들어섰을 땐 전신의 힘이 쭉 빠지고 뭔가가 짓누르는 기분이었다면,
성력의 마법진은 더 있다간 그냥 몸이 터져 버릴 것 같단 느낌을 받았다.
대체 하루 사이에 뭔 짓을 했길래, 저 정도까지 조절이 가능해진 거지?
뭔가 악마에게 대가를 지불한 계약을 한 게 아니고서야, 내 머리론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 그 더러운 손을 치우지 않겠다면, 좋다! 내가 그 손을 잘라주지!”
구겼던 미간을 다시 펴낸 네로는 성력이 응집된 손을 바닥에 내리쳤다.
“계약 소환! 나의 부름에 응하라! 아이스 리퍼!”
그러자 아까 소환되었던 사신을 닮은 하얀 마수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문제는 하나가 아닌 이번엔 셋이라는 거.
주인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건진 몰라도, 죄다 눈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정작 소유주는 소환 잘해놓고, 갑자기 한쪽 눈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아아악!”
내 예상이 크게 빗나가진 않은 것 같다.
저 비만 마족. 성력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대가로 뭔가를 지불했다.
그 대가가 뭔지는 차차 알아가기로 하고.
일단은 이 하얀 사신들을 처리하는 게 먼저다.
“저도 돕겠습니다!”
그러자 뜬금없이 내 옆으로 익숙한 검사가 다가왔다.
다일의 퍼밀리어 페르였다.
“네 주인이 지시한 거냐?”
“제가 자청했습니다. 주제넘은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같은 검사로서 차마 이 상황을 넋 놓고 방관하진 못하겠더군요.”
녀석의 눈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더도 덜도 말고, 하나만 맡아.”
페르는 문제없다며 자신 있게 검을 빼 들었다.
그러자 이번엔 내 뒤에서 몸을 추스르던 프린이 물었다.
“당신도 벨시페르 님의 힘을 원하시는 겁니까?”
나는 살짝 정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아니.”
매정한 한마디만 뱉고선 다시 돌아섰다.
보이진 않아도 그녀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얼추 예상이 갔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난 저 답도 없는 존재의 힘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필사적으로 막으려 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키케겍!”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나를 응시하던 두 명의 리퍼가 먼저 달려들었다.
-챙!
낫을 휘두르는 힘, 속도 등이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이 역시 물주가 하사한 힘이 달라졌음을 의미하겠지.
오래 끌어봐야 좋을 일은 없을 것이다.
교차한 두 개의 낫이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걸 가볍게 회피한 뒤, 짧게 거리를 벌렸다.
그런 다음 바로 발검 자세를 취했다.
짧은 심호흡과 함께 발밑으로 검의 영역이 생성되었다.
“십섬(百殲): 잔상의 검무!”
리퍼의 낫이 영역에 닿은 타이밍에 맞춰, 검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여섯 번 휘둘렀다.
일단 체감상 빗나가진 않았다.
허공이 아닌 놈들의 신체를 베어 가르는 느낌을 분명히 받았으니까.
문제가 없다면, 두 리퍼의 몸은 각각 세 조각으로 베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키킥!”
기괴한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귓가에 울렸다.
아무래도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비만 마족은 그런 날 보며 잔뜩 비웃었다.
“하하! 그런 쇠막대기 따위로 내 마수들을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냐! 마력이 있어도 될까 말까인데 어림도 없지!!”
마수고 뭐고 일단 저놈 입부터 찢어버려야 하나?
그렇게 생각할 때, 나머지 화이트 리퍼를 상대하고 있던 페르가 내 옆으로 붙었다.
“십섬(十殲)의 경지론 화이트 리퍼를 소멸시키긴 힘들 겁니다. 못해도 그다음 경지는 보여주셔야 합니다.”
십섬(十殲)의 다음 경지.
즉 도검술의 세 번째 경지인 백섬(百殲)을 의미했다.
“잠시 시간을 벌어주시겠습니까? 다음 비기를 위한 준비 시간만 벌어주신다면, 리퍼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다음 경지를 네가 보여주려고?”
“불안하시다면, 역할을 바꾸셔도 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한쪽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지금 저 말엔 독이 숨어 있다.
역할 체인지.
즉 본인이 시간을 벌 테니, 나보고 백섬(百殲) 비기를 준비하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 내 경지를 같은 검사로서 지켜보고, 확인하겠단 의미일 것이다.
역시 그 주인의 그 퍼밀리어라는 건가?
이런 상황에서도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모습에 손이 여유롭다면 박수를 쳐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 의도를 아는 나로선, 괜히 힘쓰지 말고 시간 버는 역할이나 하는 게 현명하겠지만,
“시간 벌어.”
나는 페르의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직접 하시겠단 겁니까?”
“어. 너도 이쪽을 원했던 거 아니야?”
“그렇긴 합니다만, 설마 정말로 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못할 게 뭐 있냐? 그래 봐야 내 경지를 네가 확인하는 것밖에 더 있어?”
그 말에 페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네가 내 경지를 확인하는 거랑, 그 경지에 닿을 수 있는 것은 완전히 별개야.”
“……그렇겠군요.”
페르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임 없이 아이스 리퍼에게 달려드는 녀석을 뒤로한 채, 나는 아크베리아를 바닥에 꽂았다.
소리, 감각 등 집중을 방해할만한 요소들을 지금부터 전부 무시한다.
오로지 손에 잡힌 아크베리아와의 교감에만 전념할 것이다.
-스스스
교감이 잘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하듯,
검이 꽂힌 바닥 틈에서 무색의 기류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살짝 뜬금없는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지구에서든, 레지에타에서든 어느 한 분야의 정점에 오른 소위 달인(達人)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따라 할 수 있으면 따라 해 보아라.’
비법, 레시피 등을 아무리 알려주고 공개한다고 한들, 긴 시간과 노력을 통해 완성된 경지는 따라잡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얼마나 멋있는 말인가?
지금 내가 보여주려는 이 비기는 마르샤가 보여주었던 그 검술서에도 적혀 있지 않은,
하다못해 지금 내 뒤에 잠들어 있는 마왕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비기다.
“백섬(百殲)…….”
그러니 감히 단언하건대 이걸 한 번 봤다고 해서 따라 할 수 있는 검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사신(死神)의 전율(戰慄).”
* * *
아이스 리퍼(Ice Reaper).
마계 대륙 남부 빙하지대 깊은 곳에 서식하는 마수이자, 네로가 소유한 계약 마수 중에서도 그가 특히 아끼는 마수였다.
차디찬 얼음의 색을 품은 로브를 입고, 거대한 낫을 휘두르며, 얼음의 영역에 들어선 마족들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사신(死神)과도 같은 존재.
죽음을 선사하는 이들이 죽음의 두려움을 느낄 리는 만무했다.
허나 지금 네로에 의해 소환된 세 아이스 리퍼는,
“키익…….”
이전처럼 비웃음을 흘리는 게 아닌,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낫을 잡은 손에선 두려움을 상징하는 떨림까지 일고 있었다.
리퍼들만이 아니었다.
네로와 이노투스,
다일과 페르,
그리고 이 섬의 주인인 프린까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소한 광경에 모두가 당혹을 금치 못했다.
“저건……. 사신인가?”
그중 다일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네로가 소환한 아이스 리퍼들을 보고 한 말이 아니었다.
리퍼가 아닌 벨져의 등 뒤로 나타난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를 보며 읊은 말이었다.
-팍!
벨져는 얼음에 꽂았던 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서서히 올라가는 마검의 끝은 두려움에 얼어붙은 아이스 리퍼들에게 향했다.
검과의 교감을 통해 생성한 진짜 사신.
고작 마수 따위론 감당할 수 없는 살기에 리퍼들은 어떤 대응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준비를 마친 벨져는 검으로 허공을 베었고,
-스윽
벨져에 이어 사신도 똑같이 손으로 허공을 베었다.
-서걱!
그러자 사신과 눈을 마주하던 아이스 리퍼들은 단번에 잘려 나갔다.
머리를 잃은 마수들은 그 즉시 가루가 되어 소멸했다.
목적을 완수한 사신(死神)은 벨져를 한 번 바라본 뒤, 유유히 사라졌다.
“베에엘져어어어!!”
마수를 잃은 것에 분노한 네로의 외침이 동굴을 가득 메웠다.
“감히! 내 마수를 네놈 따위가아아!!!”
그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천장에 맺힌 고드름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네놈은 대체 언제까지 내 앞길을 막을 생각이냐!”
“아마 마왕이 될 때까지겠지?”
벨져는 당연하지 않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 네로는 더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러다 기어이 실성했는지 대뜸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네놈 말이 맞아! 네놈들이 살아있는 한 난 마왕의 권좌를 차지할 수 없겠지! 오늘로써 똑똑히 알았다! 원래는 네놈들을 굴복시켜 내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할 생각이었지만 이젠 아니야!”
네로는 다시 팔찌를 찬 손을 벨져에게 뻗었고, 나머지 한 손은 다일이 있는 곳으로 뻗었다.
“난 이제 너희를 가질 생각이 없어졌다! 그리고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은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게 마땅하겠지! 내 몸이 얼마나 희생되든 상관없어! 내가 추구하는 마계에 네놈들은 필요 없으니까아아!!!”
네로의 절규에 반응한 팔찌에서 어마어마한 빛이 발산되었다.
눈앞에서 터진 가공할 빛에 모두가 눈을 가렸다.
고통을 호소하는 네로의 비명만이 귓가에 울릴 뿐이었다.
* * *
비슷한 시간, 이사벨 일행이 있는 절벽 아래.
아래서 기다리든, 아님 밖으로 나가든, 절대 올라오진 말라는 벨져의 지시로 인해, 전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사벨은 주먹을 쥔 채 벨져가 올라간 절벽 위를 하염없이 보기만 했다.
“베에엘져어어어!!”
그때 절벽 위에서 누군가의 울부짖음이 넘어왔다.
“이 목소리는?”
“네로 후보 아니야?”
욕심이 덕지덕지 묻은 익숙한 목소리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아아아아악!”
그러자 이번엔 고통에 호소하는 비명이 들려왔다.
이 역시 같은 마족의 목소리였다.
“뭔가 네로 후보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모양인데? 대체 위에서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루비아는 어쩌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다.
메이와 미켄의 반응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러면서 살며시 이사벨의 눈치를 보았다.
이사벨은 눈을 질끈 감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돌아가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발언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 진심이신가요 이사벨 님?”
“올라가 봐야, 우리가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요. 벨져의 말대로 방해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냥 여길 떠나는 게 나을 거예요.”
마음을 정한 이사벨은 절벽에서 몸을 돌렸다.
위급하고 알 수 없는 상황일수록 판단은 냉정하게 내려야 한다.
제아무리 벨져를 위해서라고 한들, 지금 올라가 봐야 그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럴 바엔 차라리 방해라도 않기 위해 자리를 떠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몸을 돌렸지만, 이후 밀려드는 수치심과 무기력함에 이사벨은 쉽사리 발을 내딛지 못했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여…….’
깜짝 놀란 이사벨은 바로 몸을 돌렸다.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