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14
제114화. 얼음의 정령
100년 전 리고 섬.
섬 중앙엔 빙하지대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반라의 상태로 맞고 있는 정신 나간 마족이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이 마계의 절대자이자 마왕, 벨시페르였다.
“하하! 춥구나! 다른 곳은 그냥 서늘하단 느낌만 받았는데, 여긴 내가 한기를 느낄 만큼 제대로 추워! 이런 곳을 진작 알았으면 수련을 잔뜩 했을 텐데 아쉽군!”
벨시페르는 고개를 치켜들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한 여인이 뒤에서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고, 벨시페르는 그녀에게 물었다.
“넌 과거엔 마족이었지만 자연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정령이 된 존재라고 했지? 한데, 왜 아직 마계에 있는 것이냐? 정령은 정령계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정령은 옅은 웃음만 지을 뿐, 온전한 대답을 내진 못했다.
“하기야 너도 그곳이 익숙지 않은 거겠지. 이해한다! 몸이 바뀌었다고 해도, 고유의 천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니! 원래 살던 곳이 더 익숙했을 거라 본다!”
정령은 당황한 듯 잠시 눈을 깜빡였다.
설마 다른 마족도 아닌, 무려 마왕이 이해해 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과연 나도 그럴 수 있을진 모르겠군!”
다소 어리둥절해하는 정령을 뒤로한 채, 벨시페르는 리고 섬의 공기를 쭈욱 들이마셨다.
정령은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인계 침공을 하실 거란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응? 외딴섬에 혼자 살고 있으면서, 그런 소식은 또 용케 듣는구나?”
정령은 멋쩍은 듯 흰 얼굴에 홍조를 띄웠다.
“난 어쩔 수 없는 투신(鬪神)의 피를 가지고 태어난 마족이다. 지금도 끓어 넘치는 이 투욕을 어딘가에 풀지 않으면 안 돼. 이 마계엔 내 투욕을 풀어줄 존재가 없으니 인계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마족보다 약한 종족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들 중에 마왕님을 상대할 만한 강자가 있을까요?”
“그거야 가보면 알겠지! 내가 가기로 마음먹은 이상, 인간들도 필사적으로 날 막아야 할 거다! 여차하면 다른 세계의 강자라도 데려와야겠지! 낄낄!”
그런 게 가능할 리가.
“나는 살아야 할 곳이 아닌, 죽어야 할 곳을 찾고 있다. 하루라도 내가 제정신일 때 찾아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양쪽 세계 모두 혼란이 올 거다!”
“혼란이라 하시면……?”
궁금증이 생긴 정령이 더 깊이 물었지만,
“그나저나 여긴 있으면 있을수록 마음에 드는구나! 결정했다! 이 섬을 내 묫자리로 정했다!”
벨시페르는 뜬금없이 화제를 돌렸다.
“그 녀석들에게 말해둬야겠다! 내가 인계에 갔다가 죽으면, 몸뚱이라도 되찾아서 이 섬에다가 묻어달라고! 그리고 후대에 찾아올 새로운 마왕 후보들에게 보여주라고 명할 것이야! 나처럼 살면 안 된다는 걸 말이지! 그때까지 무덤 관리는 네가 해주면 되겠구나!”
“저 말씀이십니까?”
“넌 어차피 정령이라, 불사(不死)나 마찬가지인 거 아니냐? 나도 명색이 마왕인데 묘지기 정도는 있어야지! 내가 볼 땐 네가 제격이다!”
명령인지 부탁인지 모를 벨시페르의 말에 정령은 당황했다.
허나 오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그러고 보니, 여태 네 이름도 모르고 있었구나? 장차 내 묘지기가 될 정령이여, 이름이 무엇이냐?”
“프린…… 셔.”
정령은 자신의 본명을 아무에게나 함부로 알려주지 않는다.
오직 스스로가 주인 혹은 떠받들 존재라고 인정한 대상에게만 본명을 이야기했다.
하물며 지금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그녀가 마족이었을 때부터 가졌던 이름이자,
“프린셔라고 합니다.”
지난 100년간, 오직 벨시페르에게만 들려주었던, 얼음의 정령의 하나밖에 없는 이름이었다.
* * *
-뚝, 뚜둑
한 방울, 두 방울.
머리에서 흘러 턱 끝에 맺힌 땀이 자꾸만 떨어져 내린다.
물론 더워서 흘린 건 아니다.
의도치 않게 긴장한 몸에서 자꾸만 땀을 배출하고 있다.
아마 이 몸이 인간의 몸이었다면 이러지 않았겠지.
마족의 몸이기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덩달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다일도 네로를 향해 소리쳤다.
“멈추십시오, 네로 후보! 이대로 가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해!”
허나 네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양손에 계속해서 성력을 응집시켰다.
한쪽 눈에선 피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성력이 터지기 전에 저 비만 마족의 몸이 먼저 터질 것 같았다.
저쯤 되면 퍼밀리어가 말릴 법도 하건만, 이노투스는 네로의 옆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방관하기만 했다.
-우우웅!
이러는 동안에도 성력의 구체는 눈앞에서 계속 커지고 있었다.
성력은 레지에타에서 ‘마족을 멸하는 힘’이란 이명을 갖고 있었을 만큼, 마족에겐 치명적인 힘이었다.
만약 저 응집된 성력이 터져 우리에게 미친다면,
장담컨대 살아서 이 섬을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벨져 후보! 시간 없으니 본론만 얘기하겠습니다! 저와 협력하시지요!”
그 사실을 덩달아 깨달은 다일이 내 곁으로 달려와 말했다.
“네로 후보의 상태를 지켜본 결과, 아무래도 그는 본인이 가진 마력을 알 수 없는 방법을 통해 성력으로 전환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마력이 필요합니다!”
정확히는 마력을 쓸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허나 그걸 알았다면 그나 나나, 여태 이러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벨져 후보가 마력을 다룰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일단 네로 후보의 폭주부터 함께 막으시지요!”
“그 방법이 뭔지부터 들어보죠.”
다일은 입이 아닌 손을 움직여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은 다름 아닌 프린을 향해 있었다.
“저 여자! 아니, 저 정령을 죽이면 됩니다!”
황당한 나머지 입꼬리조차 올라가지 않았다.
“이미 눈치채셨다시피, 저 여자는 화이트 위치의 본체입니다! 즉 마력 응집을 방해하는 기운을 만든 주범도 바로 그녀라는 뜻이죠! 그녀를 죽인다면 마력 발현이 가능해질 겁니다!”
듣고 보니 아주 허무맹랑한 말은 아닌 것 같다.
내 눈은 이끌리듯 프린에게 향했다.
그녀의 눈은 방금 전만 해도 감정에 요동쳤었지만, 지금은 영혼 빠진 시체처럼 맥아리가 없었다.
그러곤 그 상태로 나를 돌아봤다.
죽이고 싶으면, 죽여도 된다는 초연한 의지가 담긴 눈.
대신 전대 마왕의 시체만큼은 확실하게 지켜달라는 의사 또한 분명하게 엿보였다.
“시간이 없습니다, 벨져 후보!”
다일은 그런 고민의 시간마저 주지 않으려는 듯, 나를 재촉했다.
정 급하면 본인이 하면 될 걸, 왜 굳이 나한테 부탁하는진 모르겠지만,
나는 의연하게 검을 들었다.
프린이 아닌, 네로를 향해.
“뭐 하는 겁니까, 벨져 후보?”
“뭐하긴요? 그야 저 비만 마족의 폭주를 막으려는 거지.”
“정령을 죽여야 한단 제 말을 못 들으신 겁니까?”
“이봐요, 다일 후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압니까?”
슬그머니 눈을 돌려 당황한 다일의 눈을 바라봤다.
“바로 희생입니다.”
“희생?”
“뭘 하기 위해, 뭘 버려야 하는 거. 내 손에 보물을 쥐기 위해, 손에 쥐고 있던 다른 무언가를 놔야 하는 거. 난 그런 걸 싫어하다 못해 혐오합니다.”
희생.
난 이 말이 스스로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일깨워주는 가장 적합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은 이미 용사 시절에 수없이 겪어왔기에 진절머리가 난다.
더군다나 난 아직, 저 프린이란 여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여긴 언제부터 있었는지, 전대 마왕의 시체는 왜 지키고 있는지, 우리에게 정녕 원하는 건 무엇인지 등, 그걸 듣기 전에는,
난 저 여인을 절대로 희생시킬 수 없다.
“당신의 마음 충분히 압니다, 벨져 후보! 하지만 지금은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입니다! 마력도 못 쓰는 상태에서 네로 후보의 저 기세를 감당할 순……!”
“난 내가 감당한다고 한 적 없는데요?”
그 말에 쉴새 없이 떠벌리던 다일의 입이 꾹 닫혔다.
이윽고 그 또한 뭔가를 깨달았는지 네로가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성력의 밝은 금빛에 가려진 나머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네로의 발밑에는 누군가가 생성한 정체 모를 푸른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저 마법진은 분명……,
“내가 말했죠?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에게 도움을 줄 거라고.”
생각이 딱 떠오른 찰나, 내가 올라온 절벽 밑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늘빛의 오라를 반짝이며,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도도한 기세를 뽐내는 마족 여인.
바로 이사벨이었다.
나로서도 순순히 돌아갈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정말 대단한 여자가 아닐 수 없다.
동시에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프린도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으며,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정령의 주인으로서 명합니다! 얼음의 정령 프린셔(Freinture)! 당신의 모든 마력을 끌어내서라도 벨져를 지키세요!!”
독기 서린 쩌렁쩌렁한 외침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지시를 받아들인 프린, 아니 프린셔라는 이름의 정령은 네로가 만든 성력의 구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상황은 졸지에 힘겨루기 싸움이 돼버렸다.
“정령 주제에! 내 힘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네로는 가당치도 않다며 한층 더 기괴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여기가 리고 섬이 아닌 마계 대륙 본토라면 승산을 장담하기 어려웠을 거다.
하지만,
-우우웅!
어느덧 프린셔의 손에는 성력의 구체보다 훨씬 더 거대한 마력의 구체가 응집되었다.
마족이 발현하는 성력과 정령이 발현하는 마력.
순수하게 힘의 양으로만 따지면 비슷해 보일 순 있을 것이다.
허나 한쪽은 그냥 온전히 써도 모자랄 힘을 맞지도 않는 힘으로 전환한 것에 비해,
다른 한쪽은 집념과 의지로 똘똘 뭉친 전 마왕 후보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승부 예측은,
안 하느니만 못할 것이다.
-콰앙!
멈출 기세 없이 커지던 두 구체가 서로 충돌하면서 엄청난 파동이 발생했다.
두 구체는 서로를 집어삼키기 위해 잠시 교전하는 듯했으나, 얼마 못 가 성력의 구체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예상한 흐름대로였다.
“멈추시오, 네로 후보! 그 이상 힘을 쓰면 당신 정말 죽어!”
그 와중에도 다일은 오지랖을 부리며 네로를 향해 윽박질렀지만,
“닥쳐! 난 탐욕의 종주 네로 아와라티아다! 여기서 죽으면 죽었지 물러나지 않아!!”
저 비만 마족이 들어줄 리가 없다.
아무래도 내가 다시 움직일 타이밍이 온 것 같다.
아크베리아를 한 손에 옮겨 쥔 채, 자리를 박차고 달렸다.
“벨져 후보?!”
“뭐 하는 거예요, 벨져?”
의문이 부름이 뒤를 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내 몸은 몇 초도 안 돼서 네로의 코앞에 이르렀다.
녀석은 성력 발현에 집중한 나머지 내가 온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피하셔야 합니다, 네로 님!”
뒤늦게 이노투스가 네로의 팔을 잡아당기며 피하려 했지만,
늦었다.
아크베리아의 칼날은 이미 비만 마족의 다른 팔을 베어버렸다.
-후두둑!
새하얀 얼음 바닥 위로 붉은 피가 번져나갔다.
항상 붙어있던 신체 일부가 분리되었다는 것을 아직 실감하지 못한 걸까?
네로는 비명은커녕 핏발 서린 눈으로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베, 벨져! 네놈이 감히……!”
“그러게 왜 감당하지도 못할 힘을 가져와?”
당장은 내게서 팔이 잘렸다는 사실에 화가 나겠지.
하지만 언제가 됐든, 이거 하나만큼은 네 녀석도 깨달아야 할 거다.
“팔 하나로 끝난 걸 다행인 줄 알아.”
“뭐?”
“내가 안 말렸으면 너, 지금 팔이 아니라 머리가 터졌어.”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알지.
너무나도 잘 안다.
맞지도 않는 힘을 무분별하게 쓰다간 자멸하게 된다는 사실을.
더불어,
-스윽
아직도 피가 쏟아지는 녀석의 잘린 팔을 들어 성력의 팔찌를 빼냈다.
팔찌를 잡은 순간 역한 기운이 밀려오면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주저하지 않고 곧장 팔찌를 오른손에 찼다.
그 모습을 본 네로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내, 내 팔찌로 뭘 하려는 거냐!”
뭘 하긴?
제대로 보여주려는 거지.
이 성력이란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 지를 말이다.
나는 비만 마족한테서 몸을 돌렸고,
다시금 전대 마왕의 시체가 담긴 빙결체를 마주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