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15
제115화. 절대안식
“퉤!”
피와 가래가 뒤섞인 침을 뱉으며, 무거운 몸을 이끄는 네로.
이노투스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이동한 끝에, 겨우 얼음산 밑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네로의 수하들은 둘을 발견한 순간, 기겁했다.
“네, 네로 님!”
한 번도 본 적 없는 만신창이 상태의 모습.
이틀은 굶은 듯 얼굴은 매우 초췌해졌으며, 오른팔은 잘려있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신 겁니까?!”
“호들갑 떨지 말고 준비나 해…….”
네로는 그런 걱정마저 귀찮다는 듯 힘없이 손을 저었다.
“무슨 준비를 말씀하시는지?”
“뭐긴 뭐야! 한시라도 빨리 이 엿 같은 섬을 떠날 준비지! 여긴 이제 1초도 더 있기 싫으니까 얼른 움직이란 말이야!”
“예엡!!”
수하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황급히 간이침대부터 대령했다.
침대에 몸을 누인 네로는 아직 다른 후보들이 남아있는 얼음산을 응시했다.
그러곤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왜? 왜 보내준 거냐?”
자신의 상태는 말 그대로 만신창이.
팔이 잘리고, 팔찌를 뺏긴 시점에서 더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즉 벨져가 마음만 먹었으면, 자신을 죽이고 경쟁자를 줄이는 게 충분히 가능했었지만,
벨져는 네로를 그냥 보내줬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네로로선 머리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하나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오늘,
벨져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것을.
“오늘은 절대 잊지 않겠다. 벨져…….”
그 빚을 어떤 식으로든 갚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네로의 눈에서 또렷이 빛났다.
* * *
돈, 땅, 힘.
인간, 마족을 통틀어 가장 값진 재산이 뭐냐고 묻는다면,
두말할 것 없이 목숨이다.
이 세상에 자기 목숨보다 귀한 재산이 어디 있겠는가?
팔이 잘리고, 팔찌도 뺏긴 상황에 비로소 생명의 위협을 느낀 비만 마족은 퍼밀리어와 함께 비통함을 머금고 물러났다.
남은 건 내 일행과 루비아 남매, 그리고 다일 일행과 얼음의 정령뿐이었다.
“와! 나 진짜 네로 후보 얼굴 보고 깜짝 놀랐네!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그 통통한 얼굴이 반쪽이 된 거야?”
방금 전 네로의 모습에 꽤 충격을 받은 듯 루비아는 혀를 내둘렀다.
“근데 벨져 후보. 그거 언제까지 차고 있을 거야? 기운이 너무 역해서, 다가갈 수조차 없을 지경인데?”
“무리하게 오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덤덤하게 답하며 계속 전방만 응시했다.
이번엔 뒤에 있던 다일이 물었다.
“네로 후보를 저대로 보내도 되겠습니까?”
“굳이 걱정된다면 따라가 보시죠.”
“그런 의미로 물은 말이 아니란 걸 알지 않습니까?”
다일은 어조를 낮추며 마치 진중한 대답을 해달라는 것처럼 물었다.
나는 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이에 다일은 다른 것을 물었다.
“그 팔찌……. 계속 착용하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을 리가.
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고 있다.
그러면서 왜 계속 차고 있냐고 묻는다면,
익숙해지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이번엔 이사벨이 다가와 물었다.
“그 힘. 쓸 생각인가요?”
팔찌로부터 발산된 성력 때문에 모두가 힘겨워하는 반면,
이사벨은 미간조차 좁히지 않았다.
“가장 악질적인 경쟁자도 떠났겠다. 이제 얼음을 부수고, 시체에 담긴 힘을 흡수하는 일만 남았어요. 그런 마당에 또 뭘 하려는 거죠?”
“그러고 보니 제가 지금까지 말 안 했군요.”
뭔가 불안한 기색을 느낀 듯, 이사벨이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전 전대 마왕의 마력을 거두기 위해 이 섬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 말에 이사벨의 비롯한 모두의 얼굴이 볼만하게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의 목표는 처음부터 당신 선조의 힘이었잖아요! 그걸 얻기 위해 여기까지…….”
“다른 후보들이 차지하는 걸 막겠다고 했지. 제 입으로 전대 마왕의 마력을 원한다고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급히 기억을 돌이켜보려는 듯 이사벨은 골똘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곧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선 삐질 땀을 흘렸다.
“그,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요?”
“그거야……. 여기 묘지기에게 물어봐야죠.”
내 눈은 이사벨의 바로 뒤,
이제는 그녀의 소유가 된 얼음의 정령에게 향했다.
“프린. 아니 프린셔라고 했던가? 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정말로 원하지 않으신 겁니까? 전대 마왕님의 마력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방금 말했듯, 난 보물을 찾으려고 온 게 아니야. 보물이 탈취되는 걸 막으려고 온 거지. 그 목적은 대충 달성했다고 봐. 다만 내가 이대로 가버리면 이 보물은 또 다른 누군가의 표적이 되겠지.”
그 비만 마족이 다시 온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다.
하물며, 지금 내 뒤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잔뜩 보내고 있는 이 다일이란 녀석도 마찬가지겠지.
“그래도 그동안은 네가 있어서 어찌어찌 도굴꾼들을 막았다곤 하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게 된 거 아니야?”
“맞는 말이에요. 섬의 주인 화이트 위치가 아니라, 엄연히 내가 소유한 얼음의 정령이 됐으니까요.”
이사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내게 방해가 되지 않고자 얌전히 물러나려고 했던 이사벨은 떠나기 직전, 정령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정령은 간절한 목소리로 자신의 힘을 내어 줄 터이니, 나를 도와달라고 했고,
이사벨은 그녀와 빠르게 계약을 이행한 뒤, 위쪽으로 올라온 것이라고 했다.
직접 마력을 쓸 순 없지만, 유일하게 마력을 쓸 수 있는 존재의 소유권을 얻게 된 셈이었다.
프린셔는 잠시 말없이 내 눈을 보다가 곧 전대 마왕의 시체가 담긴 빙결체를 향해 다가갔다.
-스윽
차디찬 얼음을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묘한 애틋함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잠시 그 감흥에 빠져있던 프린셔는 다시 나를 돌아봤다.
“이해…… 라는 걸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해?”
“전 마족으로 태어났지만, 지금은 정령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 두 번의 삶을 사는 동안 전 이해라는 걸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 절 처음으로 이해해주신 분이 바로 전대 마왕 벨시페르 님이셨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어느샌가 이슬까지 맺혀 있었다.
“제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경위로 정령이 되었는지. 그분은 모르십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저를 이해한다고 해주셨지요. 무슨 의미로 하셨는진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 한마디를 통해 전 세상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진심을 느꼈습니다.”
이해, 진심.
이 두 개의 단어가 지닌 힘은 세상의 어떤 힘을 갖다 대도 비교할 수 없다.
내가 전생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다.
“그분이 원한 것은 죽음 이후, 리고 섬에서의 안식과 후대에 마왕이 될 마족들과 만남. 이 두 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전 프린이라는 이름의 마족으로 위장해 섬에 찾아온 당신들을 시험했습니다. 행여, 100년 전에 제가 느꼈던 그분의 기세를 반이라도 닮은 자가 있다면, 고민 없이 그분의 안식처로 안내해 드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프린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우리를 마주했다.
“제가 본 후보들은 그분의 반의반도 닮지 못했습니다. 특히 벨져 후보 당신은…….”
“나는?”
“그분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그분과는 정반대의 성품을 지니셨더군요.”
즉 하나도 닮지 않았단 소리였다.
나로선 제대로 보았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었다.
그러자 이번엔 루비아가 손을 들며 물었다.
“잠깐만! 네 말대로라면, 여긴 우리가 와선 안 될 곳이잖아? 굳이 독에 당한 척까지 하면서 우릴 여기로 이끈 이유는 뭐야?”
“직접 보시고 깨달으란 의미에서 이끌었습니다. 처음엔 화이트 위치라는 제 분신을 통해 힘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곧 힘으론 물러서지 않을 분들이란 걸 깨닫고선 방향을 바꿨습니다. 허나 좋은 방향은 아닌 것 같더군요.”
눈앞에 보물이 있는데, 보는 것에 만족하고 돌아갈 위인은 흔치 않다.
더군다나, 설마 네로 녀석이 그 정도로 성력을 발현할 줄은 몰랐겠지.
아예 처음부터 꼭꼭 숨어 있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말씀하신 대로 전 이제 묘지기로서의 자격을 잃었습니다. 당신들이 무엇을 하든 전 막을 순 없겠지요. 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벨져 후보가 어떤 선택을 하시든, 전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겠습니다.”
프린셔는 그 말을 끝으로 빙결체로부터 떨어졌다.
그녀만이 아닌 이사벨을 비롯한 모두가 내게서 세 걸음 이상 떨어졌다.
그렇게 나와 벨시페르의 대면이 다시 이루어졌다.
참 지긋지긋한 인연이다.
어떻게 전생도 모자라, 이번 생에 와서도 이 답도 없는 존재를 다시 마주하게 되었을까.
아마 현재 살아있는 모든 인간, 마족을 통틀어 벨시페르의 힘을 가장 잘 아는 존재가 누구냐고 한다면, 그건 더 따질 것도 없이 나다.
그렇기에 지금 내 수중에 있는 마혈석에 담긴 마력과 이 얼음 속 시체에 담긴 마력이 얼마나 위험한지 또한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런 내가 이 위험하다 못해 파멸적인 힘을,
어찌 세상 밖으로 꺼낼 수 있겠는가?
다시는 누구도 넘보지 못하도록 그냥 없애버려야 한다.
나는 성력의 팔찌를 찬 손으로 아크베리아를 들어 올렸다.
지금의 난, 인간이 아닌 마족이다.
게다가 마족에게 있어 성력은 물에게 있어 기름과도 같은 힘.
따라서 성력이 지닌 파워를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그건 전생에 인간이었던 적이 없는 일반 마족 한정한 이야기다.
내가 역한 기분을 꾹 억누르면서까지 계속 성력의 팔찌를 찬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내 영혼에 각인된 성력의 운용 감각을 다시 끌어내기 위해서다.
이를 위한 준비 시간은 끝났다.
이제 다시 한번,
벨시페르란 이름의 마족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순간이 왔다.
“성검술…….”
누구도 듣지 못할 만큼 옅게 속삭인 목소리가 전신에 아련히 퍼졌다.
놀고 있던 나머지 손을 검 자루에 붙인 뒤, 천천히 귀 옆으로 이동시켰다.
이후 팔찌를 통해 전환된 성력을 모조리 검에 전승했다.
맞지 않은 힘에 거부감이 든 것인지, 아크베리아에서 떨림이 일었다.
잠시만 참아라.
어차피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번만 찌를 것이니.
마침내 전승이 끝나면서 검에 금빛이 발했다.
그 순간 나는 지체없이 앞으로 질주했다.
-콰드득!
긴 시간, 전대 마왕을 감쌌던 백년빙(百年氷)과 성력을 두른 마검의 칼날이 마침내 맞닿았다.
벨시페르의 안식을 끝까지 지키려는 듯, 얼음은 단단한 강도로 저항했다.
허나 오래지 않아 아크베이라의 검 끝은 머지않아 벨시페르의 심장 부근을 찔렀다.
“절대안식(絶對安息)…….”
마검에 응집되었던 성력은 얼어붙은 심장을 통해 시체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걸 보다 보니, 환생 직전 머릿속에서 들렸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넌 내가 인정한 유일한 존재다. 난 네놈 덕분에 이 세상에서 미련없는 최후를 맞이했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여야 해! 이런 최후는 내가 용납할 수 없다!’
용납할 수 없는 최후.
지금 내 목소리를 그는 듣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쯤 오니 하나 묻고 싶은 게 생겼다.
그럼 나에게 있어 용납할 수 있는 최후는 무엇인가?
분명 나도, 그리고 벨시페르에게 있어서도 만족할만한 마지막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그게 내가 이 마계에 존재하는 이유일 테니까.
그걸 알긴 전까진 난 죽지 않을 것이다.
허나 당신이 이 세상에서 할 역할은 그만 끝났으니.
이제 그만, 영원한 안식을 취하기 바란다.
-치이익…….
벨시페르의 시체는 마치 고열에 녹아드는 것처럼, 치솟는 연기와 함께 얼음 속에서 소멸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