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o Wants to Become the Demon King RAW novel - Chapter 12
제12화. 역제안
순혈 마족.
그들은 과거, 마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고대 마족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마계의 전체 구성원 중 약 20%에 불과한 소수의 일족이지만, 이들은 마계를 대표하는 일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동안 엄청난 영향력을 떨쳐왔었다.
그것은 지금도 현재 진행 중.
총 8명의 마왕 후보 중 순혈 마족 출신은 무려 4명이며, 그중 한 명이 바로 이사벨 이뉘디아다.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고 알려진 칠죄종 중 하나, 질투를 상징하는 이뉘디아 가문의 장녀이자 종주,
거기에 한 번 마주하면 3일 밤낮은 눈앞에서 잊히지 않을 만큼의 빼어난 용모까지.
이 마계에서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마족은 가히 있을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레지에타에서 온 인간밖에 없을 거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허나 이사벨이 유명한 이유는 단순히 출신과 용모 때문만이 아니었다.
‘정령 마법의 대가.’
이는 질투의 종주, 이뉘디아 가의 마왕 후보보다 훨씬 많이 불렸던 그녀의 이명이다.
다섯 살에 처음 마력을 발현하고,
일곱 살에 처음 정령을 소환했으며,
열 살엔 무려 다섯 속성의 정령을 다루고 자유자재로 마법을 부렸다.
웬만한 마족이 평생을 가도 닿을 수 없는 경지를 그녀는 불과 성장기 나이에 이룬 것이다.
이러니 마족들 사이에선 그녀를 어찌 봤겠는가?
범접할 수 없는 존재.
절대 무시하거나 모욕감을 주면 안 되는 여자.
진정으로 마왕이 될 자격과 가능성을 갖춘 마족.
이사벨 본인도 자신의 능력과 위치를 알기에, 이를 지키고 성장시키는 것에 열중했다.
자존감 역시 마계의 붉은 하늘을 찌를 듯 매우 높이 솟아 있었다.
그런 탑 같은 자존심을 무려 18년 만에 건드린 이가 있었으니,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바로 전대 마왕의 후손이자 그녀와 같은 또 다른 마왕 후보인 벨져였다.
“내가 말했잖아요! 난 살면서 누구한테 놀림당하거나 무시당해본 적 없다고!”
“전 이사벨 후보를 놀리고자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마왕 후보라는 자가 여자 치맛자락을 붙잡고 제발 좀 받아달라며 애원했을 때, 이사벨은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에 이렇게 한심한 남자가 또 있을까?’
싸움에 있어 적이 제 발로 찾아와 항복하는 일만큼 좋은 것도 없다지만, 이건 차마 적이라고 부르기도 창피할 지경이었다.
아무리 비천한 마인족 출신의 가망성 없는 후보라지만, 그래도 본인을 믿고 따라주는 이들이 있지 않겠는가?
그런 그들을 버리고 자기 혼자 살겠다며 비는 꼴이라니.
오죽했으면 역겹다 못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허나 세상이란 무릇 현실을 보면서 살아야 하는 법.
쟁쟁한 마왕 후보들을 제치고 그녀가 마왕이 되려면, 벨져가 가진 초라한 위신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당장은 거절했지만, 그의 위신이 어느 정도 상승할 기미가 보이면, 바로 들일 생각을 했었다.
이에 기껏 회담장에서 다일과 마찰이 벌어졌을 때도, 손수 나서서 그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 도와줬건만,
“왜 이리 격하게 반응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분명 이사벨 후보께선 제 선조인 벨시페르 마왕을 존경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당신 위신 세워주려고 한 말이고! 당신이 전에 날 찾아와서 어떤 모습을 보여줬는지 벌써 잊은 거예요?”
이 뻔뻔한 마족은 그 은혜를 벌써 잊기라도 한 듯, 모르쇠로 일관 중이었다.
“이런 말씀 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때 이사벨 후보가 보셨던 저는 제가 아닙니다.”
“뭐라고요?”
“그냥 완전히 다른 마족을 보셨다고 생각하시면 편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전 마왕 후보직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게 무슨 얼음 위에서 낮잠 자다가 열사병으로 죽는소리란 말인가?
“갑작스러우신 거 압니다. 이제껏 볼품없는 망나니 모습만 보여주던 제가 다짜고짜 제 밑으로 와달라고 하니, 매우 당황스러우시겠죠. 그러니 기회를 주십시오.”
“무슨 기회 말인가요?”
“이사벨 후보에게 절 증명할 기회 말입니다.”
이제는 어이가 없다 못해 얼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이사벨 후보가 절 인정하실 수 있을 만한 거라면 뭐든 좋습니다. 어떤 요구라도 들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어떤 요구를 할 줄 알고, 그런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나요?”
“이사벨 후보께서 합리적인 생각을 지닌 후보시라면, 아주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하시진 않겠죠.”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네 모릅니다.”
그 한 마디에 이사벨의 입이 허공에서 멈췄다.
“지, 지금 뭐라고 했어요?”
“이사벨 후보에 대해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벨져는 단단히 들으라는 듯, 글자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읊어주었다.
뭐가 문제냐는 듯 무심한 얼굴로 눈썹을 치켜세우는 벨져와 아득바득 이를 가는 이사벨의 모습이 무척 비교되었다.
“당장 생각나는 게 없으시다면, 천천히 고민 후 나중에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그럼 전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벨져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이사벨의 퍼밀리어인 드류가 부리나케 안으로 들어왔다.
드류는 평소엔 볼 수 없던 감정이 잔뜩 치솟은 이사벨의 모습을 보며 매우 당황해했다.
“드류.”
“예. 이사벨 님…….”
“나. 이 저택 날려 버려도 돼요?”
그녀의 손엔 어느샌가 어마어마한 마력의 기운이 모여 있었다.
* * *
내가 싸지 않은 똥을 치우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 일이 힘들고 고될수록 정신적 현타가 심히 오는 법이다.
‘아.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용사 시절 저 말을 되새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기야 애초에 이 세계의 용사라는 것 자체가 남의 똥 치우는 일에 결정체라고 할 수 있겠지.
근데 이번 건 경우가 좀 다르다.
내가 쌌지만, 싸지 않은 똥을 치운다고 해야 할까?
진짜 뭐 이런 똥 같은 일이…….
“이사벨 후보는?”
“방금 떠났습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나,
그런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브릴리스,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눈치만 보는 메이까지.
참으로 무거운 분위기가 아닐 수 없다.
브릴리스는 말없이 나를 한참을 내려보다가도 마침내 입을 열고 물었다.
“이제 설명해주십시오.”
“내가 뭘 설명해야 할까?”
“이미 드류 님에게 들었습니다! 회담 전에 이사벨 후보님께 찾아가 후보 단일화 제안을 하셨다면서요! 정말 저 몰래 후보직을…… 포기할 생각이셨습니까?”
차라리 속 시원하게 다 내지르면 더 좋으련만,
차오른 화를 전부 뱉지 않고 막판에 감정을 억누르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웠다.
나는 복잡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몸이 잠시 잘못된 마음을 먹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야. 난 마왕이 될 거야 브릴리스.”
“저, 정말이십니까?”
“당연하지. 그래서 그 여자, 아니 이사벨 후보에게 새로운 제안도 했어. 내 밑으로 들어와서 날 지지해 달라고.”
“예??”
브릴리스의 표정이 새롭게 변했다.
조금 전 이사벨이 내가 단일화 제안을 했다는 말을 꺼냈을 때보다, 훨씬 더 당황한 듯했다.
“왜? 어차피 내가 마왕이 되려면 그녀를 포함해서 일곱 명의 후보를 전부 제쳐야 하는 거잖아?”
“그야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사벨 후보는…….”
브릴리스만이 아닌, 같이 이야기를 듣던 메이도 벌어진 입을 못 다물고 있었다.
반응들 왜 이래?
사람, 아니 마족 무안하게.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난 그저 그녀 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내 의사를 밝혔을 뿐이야. 자 해명은 이걸로 끝! 이제 우리 할 일 좀 하자!”
나는 브릴리스가 더 묻지 않도록 황급히 주제를 바꿨다.
-화악!
울타비스에게서 받은 지도를 꺼내 탁자 위로 쫙 펼쳐냈다.
얼떨결에 지도를 확인한 브릴리스는 동그라미가 그어진 부분을 발견하고선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라면 사이클롭스의 서식지로 알려진 땅이 아닙니까?”
“맞아. 조만간 내가 가야 할 곳이기도 해. 검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마지막 재료를 여기서 구해야 하거든.”
나는 울타비스가 말한 재료를 브릴리스에게 설명했다.
“무모합니다!”
브릴리스는 듣자마자 탁자를 내려치며 바로 반대했다.
“사이클롭스가 어떤 마수인지 벨져 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위험한 마수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단순히 위험한 정도가 아닙니다! 사이클롭스의 서식지는 근 100년 가까이 마족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그야말로 미지의 땅입니다! 어떤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을지 전혀 모르는 곳이란 말입니다!”
음. 그런 것까진 몰랐는데.
내가 아는 사이클롭스는 몸집이 거인만큼 크고, 외눈박이이며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통제 불능의 마수라는 거다.
이러고 보니 옛날 생각나네.
레지에타에 소환되고, 용사가 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당시 상대했던 마족 무리에 마수를 소환하는 소환술사가 한 명 있었다.
그때 그놈이 마왕에게 잘 보이겠답시고, 금단의 마법을 시전해 본인이 계약을 맺지도 않은 마수를 소환했었는데,
그 마수가 바로 외눈박이 거인 사이클롭스(Cyclops)다.
오죽 난폭했으면 소환한 주인의 말도 듣지 않고 인간, 마족 할 것 없이 눈에 보이는 건 닥치는 대로 파괴했었다.
그때 난 아직 용사로서의 정체성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제대로 대처할 여력이 없었고, 속수무책으로 파괴되는 도시와 죽어가는 병사들을 보며 절망에 빠졌었다.
집에 가고 싶다가 아니라, 자살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잠식했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뭐.
이제 와선 딱히 상대 못 할 마수도 아니라지만.
마냥 안일한 마음으로 상대할 수도 없는 마수다.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가야 해. 여기까지 와서 검을 안 만들 순 없으니까.”
“하지만…….”
브릴리스는 그래도 내키지 않는 듯, 내 뜻을 쉽사리 받아주지 못했다.
“저, 어차피 필요하신 게 사이클롭스의 안액이라면…….”
그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메이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굳이 사이클롭스를 상대하지 않더라도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은데…….”
* * *
사파이어 빛 청정 호수 뒤로 자리한 이뉘디아 가문의 본가.
이사벨은 끓어오른 열을 식히기 위해 집에 돌아오자마자 욕탕으로 향했다.
“하…….”
땀에 젖은 옷을 벗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그동안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가 풀리는 듯했지만,
“짜증 나.”
그것도 잠시일 뿐.
그 남자 생각만 하면 얼굴이 새빨개지고 주먹이 절로 쥐어질 만큼,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를 모른다고? 감히 나 이사벨 이뉘디아를?”
태어나서 그런 굴욕감은 정말 처음이었다.
차라리 거짓말이었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모르는 척 되도 않는 연기를 한 것이라 하면 차라리 이해라도 됐다.
하지만 그때 봤던 벨져의 얼굴엔 분명,
어떤 가식도 서려 있지 않은, 완벽한 진심만이 담겨있었다.
“대체 뭐냐고 그 남자는……!”
정말 그의 말대로 다른 마족이 되기라도 한 건가?
그야말로 머리가 복잡하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이사벨 님.”
숨을 푹푹 내쉬며 감정을 다스리던 도중, 뒤에서 그녀의 퍼밀리어인 드류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시하셨던 벨져 후보의 최근 행적에 대해 알아 왔습니다.”
“읊어보세요.”
“딱히 후보로서 특별한 활동을 하고 다니진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검을 만들러 다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사벨은 인상을 구긴 채로 상반신을 돌렸다.
이에 드류는 잽싸게 다른 곳으로 얼굴을 돌렸다.
“검을 만들어요?”
최근 레트나 화산에 있는 어느 대장간에 출입이 잦은 것에 이어, 라미아의 호수에서 그녀와 싸움이 있었던 것까지.
드류는 조사해온 정보를 이사벨에게 남김없이 보고했다.
“검이라면 전대 마왕을 죽인 인간 용사가 사용한 무기잖아요? 자기가 뭐 용사라도 되겠다는 거예요, 뭐예요?”
“그, 그것까진 저도 잘…….”
“그래서! 지금 그 남자는 뭘 하고 있다는데요?”
“감시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수하들을 데리고 저택에서 나와 어디론가 이동 중이랍니다. 한데, 그 방향이…….”
드류는 바로 말을 잇지 않고 살짝 뜸을 들였다.
“탐욕의 종주가 관리하는 암시장 쪽이라고 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